〈 14화 〉 재앙의 시작
* * *
재앙의 시작
수많은 지렁이들이 땅속을 파고 나와서 주변을 포위한다. 처음엔 공격하려고 하는 줄 알고 먼저 먼저 주먹을 날리려고 했던 유셀이였지만 세이린의 만류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황녀님?"
"아니…. 혹시나 몰라서 말이야."
세이린은 아까전에도 그렇고 방금전에도 그렇고 자신의 냄새를 맡으며 공포에 떨던 새끼를 기억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 전 그 변태 지렁이가 자신의 엉덩이를 깨물고 몸을 비빌 때 어떠한 흔적을 남겼을 가능성을 말이다.
그리고….
"역시…."
앞으로 한걸음 지나갈 때 마다 지렁이들이 뒤로 한걸음씩 물러간다.
유셀은 세이린의 행동과 지렁이라는 몬스터의 행동을 통해서 많은 놀라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좋게만 볼 수 없는 게 도대체 어떠한 방법으로 이런 작용을 하는지 모르거니와 그로 인해서 어떠한 피해를 가져다줄지 의문이기에 걱정이 들었다.
"황녀님 6개월 전에 오신 이후 어떠한 징후를 보인 적 없으십니까?"
"응 없었어. 돌아왔을 적에 나도 혹시나 싶어서 궁정 할아버지한테 부탁해봤어"
"끄응…. 어째 스승님에게 할아버지라고…."
"뭐 어때?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그랬는걸?"
세이린의 마법 스승이자 아포미네 제국 궁정 마법사로 있는 8서클 카서스는 세이린이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걸 극심하게 반대하고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라 했기에 세이린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녀석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스윽….
뀨~
눈앞에 있는 지렁이 한 마리를 쓰다듬자 기분 좋은지 연신 몸을 빌빌 꼰다.
"이 녀석들 분명 5층에 있었던 거 확실하십니까?"
"응 맞아. 내가 퍼펫들을 상대하고 있었을 때 그 변태 지렁이가 나타났으니까"
"음…. 결계가 깨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몬스터들이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이 녀석들만 지나다닐 수 있다는 말인데….
"무엇보다 5층에 있던 녀석들이 1층까지 온 걸 보면…. 아무래도 모두 점령당했다고 보면 되겠지?"
확실히 5층에서 1층까지의 거리는 엄청나다. 깊이로 따진다면 15킬로에 다다르고 거리로 따진다면 대륙 전체를 합할 정도로 거대한 곳이었기에 1층부터 5층까지 모두 이 녀석들이 점령했다고 보면 쉬웠다.
"빨리 5층으로 가봐야겠네"
"알겠습니다. 황녀님"
유셀은 세이린을 품에 안고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면 한쪽에 작은 깃을 꽂아 넣었는데 이것은 좌표를 알아내는 아티펙트로 훗날 텔레포트 할 경우 이곳의 좌표로 올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장치였다.
이것은 황제의 명이자 카서스 궁정 마법사의 부탁이기도 했기에 1층부터 7층까지 꽂을 수 있게 총 7개의 깃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
와….
지렁이 삶에 이런 고비는 처음이네.
뭐라고 해야 할까?
5층 퍼펫을 공격 못할 때 보다 더 심한 충격 감이랄까? 애초에 퍼펫이나 플로그 종류는 이길 수는 있었지만, 공격을 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심각성을 느껴진 않았다. 하지만 아까전 참수사의 경우는 공격은커녕 한 대만 맞아도 지렁이 인생 훅 가는 상황인지라 생경한 충격이랄까?
[띠링! 남은 튜토리얼 시간 10일 남았습니다.]
....
거참 할 말 없다.
벌써 그렇게 됐나?
[2,990일 0시 01분]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뭔가 했다. 튜토리얼이라니? 장난도 유분수지 목숨을 걸고 레벨업 시켜놨더니 이게 튜토리얼이란다.
게다가 시스템 녀석이 말을 하는 게 튜토리얼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50%로 감소된 몬스터들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튜토리얼 이후 몬스터들이 2배는 더 많이 나온다는 소리였기에 더욱더 암울한 상황이었다.
[사용자에겐 무엇보다 몬스터의 `양`이 중요합니다.]
누가 몰라서 그래? 단지 몬스터가 많아지더라도 내가 약해서 문제인 거지.
그나저나 튜토리얼이 끝나면 넌 어떻게 되는 거야?
[저는 사용자의 튜토리얼을 위해 태어난 존재, 그러니 튜토리얼이 끝나면 소멸이 됩니다.]
아쉽겠네….
[삶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뭐랄까.
조금 불쌍한 생각도 든다.
아니
8년…. 약간 넘는 시간 동안 투닥거리며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사라진다는 것에 약간이라도 정들었는데 이렇게 소멸한다는 것에 슬픈 생각이 들었다랄까?
넌 더 살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야?
[사용자의 행동 약식을 보면 저 없이 1년을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3,000일, 그러니 더는 미련은 없습니다.]
와.
시크의 정석인가?
자기 죽는다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단다.
그러고 보니 나 말고도 다른 환생자가 있었을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은 무슨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데?
[과거의 잔존 기억을 토대로 사용자처럼 게임능력을 타고난 환생자는 전무 합니다. 하지만 몇몇 환생자는 게임능력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인 `무한의 잠재력`과 `108번의 기적`을 가지고 태어난 환생인이 있습니다. 그중 108의 기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붓다, 사용자의 말로는 `부처`라고 합니다.]
아.
이해했어.
왠지 부처라는 말만 들어도 감이 딱 오는 게 108번의 기적은 말 그대로 108개의 소원을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시발.
좋겠다.
세상에 한가지 소원만 들어준다 해도 미친짓을 하는 인간들이 넘치고 넘치는데 108개란다.
지금 당장 5가지만 써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 텐데…….
콰가가강!!
어…. 참수사가 근처까지 왔나 보다.
내가 있는 곳은 땅속 100m 깊이였는데 아무래도 숨을 곳이라고는 땅속뿐이 없어서 이렇게 들어온 것이었다.
부드득…. 부드드극….
....?
무슨 소리지?
뭔가 쥐가 전선을 갉아 먹는 소리랄까…?
아니면 두더지가 땅을 파는 소리랄까?
어…….
땅…?
땅을 파는 소리?
부북….
난 몸을 꿈틀거리며 내가 들어왔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엄마야!!!!
하필 고개를 돌리자마자 내 눈앞에 참수사의 머리가 떡하니 있는 걸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건 도대체 무슨 공포 게임이야!!?!?!?!?!?
크아아아앙!!!!!!
참수사가 들고 있는 도끼에서 핏빛오라가 머금는 걸 보곤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불멸화를 쓴다고 해도 1초였고 몸을 돌렸기 때문에 다시 반대로 돌리려면 못해도 5초의 시간이 걸린다. 그 정도 시간이면 수십 번은 더 휘두를 참수사였기에 그냥 편하게 눈을 감았는데….
````
````
````
````
?????
얼라료? 나 안 죽음?
크와아아아앙!!!
....?
한참을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오지 않자 살며시 눈을 떴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입만 뻐끔 뻐끔거리는 참수사를 보았다.
어째서? 라는 의문이 들기도 전에 최선을 다해서 몸을 꼼지락거리는 참수사를 보고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하?
너 끼었구나?
덩치가 크면 뭐하나.
이렇게 끼이는데?
케케케케!!
까드드득..!
뭐랄까?
뭔가가 비틀리는 소리랄까…. 아니면 부서지는 소리랄까?
입안에서 열심히 굴리고 굴리는 참수사의 머리였다.
뭔 놈의 대가리가 이렇게 딱딱해?
까드득…!
어우…. 이빨 다 부러지겠네
과 를 이용해서 참수사의 머리를 와그작와그작 씹고 있는데 도통 들어가질 않는다. 거기다 이 녀석은 입안에서 대가리를 마구 흔들어 재끼는 통해 이빨 몇개가 부러지기도 했는데 확실히 이런 상태에선 삼켜도 뱃속에서 날 죽일 놈이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지?
손을 턱에다 괴며 이리저리 고민하던 도중 괴성을 지르며 핏빛오라를 내뿜는 도끼를 꿈지럭거리는걸 보았다.
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슬쩍….
크와앙!!
참수사의 손에 있던 도끼를 슬쩍 뺏어버리니 마구 발광을 한다.
에헤이 손님.
이거 왜 이러실까?
아까까지는 네 것인지 몰라도 지금은 내 손에 있으니 내껀데?
[사용자의 정신 ㅅ…….]
네네
나도 이상한 거 잘 아니까 다물어 주시옵소서
도끼를 이리저리 보며 확인을 해보았다.
[참수사의 도끼]
흉폭의 참수사가 적을 참수할 때 사용하는 도끼로서 매끄러운 절삭력을 위해 매일 도끼날을 갈아둔다.
착용조건 : 도끼를 들 수 있는 자.
체력 + 500
민첩 500
스킬: 참수(즉사)
오오오!?
이런 좋은 아이템을 들고 있었어?
난 도끼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곧바로 참수사의 머리를 내려찍으려고 했는데….
뭔 개미 똥구멍처럼 움직인다.
참고로 말하자면 도끼 움직이는 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누가 보면 벌이라도 서는 줄 알겠지만 분명 나한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얼라료?
이게 왜 이런다느냐….
[민첩 스탯이 78이 되었습니다. 이동속도 및 무기 사용 속도가 현저히 감소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옵션 중에 민첩 500이라는 게 있었지?
이 녀석은 이런 옵션을 들고서 어떻게 그런 속도로 휘둘렀다냐?
참수사가 도끼를 휘두르는 장면을 떠올린 난 온몸에 지렁이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으음…. 느려도 어쩔 수 없잖아? 어차피 참수 스킬로 즉사데미지를 줄 수 있으니 느려도 닿기만 하면 되지!
끄응차!
아주 천천히 그것도 무진장 느리게 떨어지는 도끼를 보며 참수사는 무슨 생각을 할까?
크아앙! 크앙!
응.
아무 생각 없구나?
제 딴에는 살려달라 이런 말이겠지만 내가 알아듣지를 못하니 어쩔 수 있나?
배알 꼴리면 지렁이 언어 배워오던가?
츠츠츠츠츳……!
느리지만 꾸준히 내려간 결과 결국 참수사의 목에 닿은 도끼였다.
스으윽…….
아무런 저항감 없이 계속 파고드는 도끼를 보는데…. 뭐랄까?
이거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진장 아프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수가 아니라 고문 아닌가?
케켁! 켁!
응.
고문 맞구나?
원래 같으면 빠르게 목을 베어서 죽여야 하는데 민첩이 78에 이르는 나로서는 그저 느릿하게 목을 베어 가기에 참수사가 느끼는 고통이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불쌍해
응.
너무 불쌍해서 빨리 죽여주고 싶은데…. 미안 나도 방법이 없네?
그러니 그냥 이대로 죽으렴
한 손으로 도끼 자루를 들고 한 손으로는 하품을 하는 입을 가리고는 연신 지루해하며 슬쩍슬쩍 얼마나 베었는지 확인한다.
에이 아직 절반밖에 못 베었어?
너 살아있냐?
콕콕
켁…..켁….
응
살아있네?
그럼 죽을 때 까지 계속 베어야지
[띠링! 남은 튜토리얼 시간 7일 남았습니다.]
이거 웃어도 되지?
나 지금 이 녀석 목 절반 베는데 3일 투자한 거야?
핳핳핳ㅎ핳핳핳ㅎㅎ핳ㅎ핳ㅎ핳ㅎ핳ㅎ핳ㅎ…. 켁켁….
어우 너무 웃었나 봐 목에 가레가 끼네
캬악 퉤!
어쩐지 슬슬 졸려 오는 게 이상하다고 했어.
음…. 빨리 시간을 보낼까 말까?
이대로 정신 놓아버리면 남은 3일 따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애초에 지렁이한테 시간개념이 엉망이란 건 알고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현상이었는데 그렇게 하자니 시스템이 약간 걸린다.
[저에게 미련을 가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 그래? 8년 동안 같이 지낸 전적이 있는데 모르는 척 하기엔 그렇잖아?
[과거의 기억을 살펴본 결과 사용자처럼 지대한 관심을 둬 준 환생자는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용자 역시 저를 미련없이 버리면 됩니다.]
거참 정 떨어지는 소리 하네
남들이 안 했다고 나 또한 그러라는 법은 없잖아?
남들이 내 인생 살아줄 거도 아닌데 따라 해서 뭐하게? 난 내 마음대로 살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이 녀석 때문에 혼자라는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나만의 위로 조건이랄까?
이 녀석이 사라지면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기에 최대한 시간을 버리기 싫었는데….
[조건 충족! 특전이 열립니다.]
응? 이건 또 뭐다냐?
[Ai덕후]
[튜토리얼용 Ai를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여 사용자가 소멸할때 까지 Ai의 생명이 지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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