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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91)화 (91/91)

91화.

“…폐하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이안이 엘리시아를 바로 응시했다.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면 황족으로서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도요.”

“그걸 아는 놈이….”

엘리시아는 다시금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하나, 폐하.”

잠깐 입을 다물었던 이안이 말했다.

“…대공비가 다쳤습니다.”

황제가 멈칫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들이 저를 노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래 봤자 제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요. 여태껏 폐하의 명을 따른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그의 시선이 내게 짧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그 와중에 위협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봐.’

이게 소드마스터 남자주인공의 가오인가.

실없는 생각을 할 동안 잠깐 침묵하던 이안이 말을 이어 갔다.

“아시잖습니까, 폐하.”

“…….”

“저를 노리는 것과 제 주변인들을 노리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황제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래, 해서 일부러 사람을 멀리했다는 것도 알아.”

엘리시아라고 이안의 열 살 생일에 일어난 일을 잊었을 리 없었다.

유모의 죽음 이후로 이안이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고 마음을 주지 않으며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더욱 이안을 보란 듯이 귀애하고 입지를 다져 주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자신의 혈육이라고 말이다.

이번 습격 사건 이후, 그녀가 황제파 귀족들을 일제히 불러들여 엄중히 경고하고 철저한 조사를 명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 효과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레반트의 ‘황제’를 지지하는 거지, 이안의 누이 ‘엘리시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까.’

황권의 강화는 곧 황제파의 권력 강화다.

그들의 목적은 제국의 황제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두 남매 사이에서 바쁘게 시선을 오가던 내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폐하, 외람되오나 괜찮다면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이제 대공비까지 가세한다 이거지.”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저 역시 폐하께서 고민하시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폐하.”

내가 이안을 짧게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대공이 작위를 받아 황성을 나갔다고 하여 황족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라고요.”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인용하는 나를 황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쳐다보았다.

“대공이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해도, 여전히 폐하의 가족일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연거푸 이마를 매만지던 황제의 손길이 일순 멎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도 느껴졌다.

“…….”

“…….”

남매가 쌍으로 날 쳐다보진 않았으면 좋겠다. 부담스러우니까.

진땀이 흐를 것 같아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게다가 계승권이 없다 해서 대공이 어디 홀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죠. 폐하의 아우가 얼마나 유능한지는 저보다 폐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테고요.”

내 혼신의 포장에 황제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보고선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어, 언제부터 그대들의 손발이 그렇게 잘 맞았는지 모르겠군.”

“폐하께서 제게 대공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으니까요.”

뻔뻔하게 웃어 주었다.

황제가 탄식했다.

“그래, 가재는 게 편이라는 게지.”

그녀가 턱을 괴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한 소리 하려고 불러 놓았는데 도리어 들은 쪽은 나 같군. 알았으니 둘 다 나가 보게. 내 생각을 좀 해야겠으니.”

그녀가 턱을 괴지 않은 손을 허공에서 휘휘 저었다.

‘어차피 바로 허락이 떨어질 일은 아니었어.’

그래도 단호하게 안 된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게 어딘가.

이안의 소매를 꾹 잡아당기며 조용히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우리가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눈을 감고 깊게 고민하던 황제가 이안을 불렀다.

“한데 이안.”

“예, 폐하.”

“네가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을 게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의연한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하아… 그래, 정말 가 봐라.”

그녀를 향해 다소곳이 인사했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

대공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밤이었다.

마차에서 내려 그에게 까딱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얘기는 내일 마저 해요.”

내가 친 사고 때문에 같이 불려 가느라 고생 많았다.

곧장 본관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이안이 맞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어 나를 붙들었다.

내가 몸을 반쯤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오래도록 나를 응시하던 이안이 말했다.

“잠깐 산책 좀 하죠.”

가라앉은 음성을 들으며 생각했다.

음, 올 게 왔군.

아무리 간접적으로 동의를 받았다곤 하지만, 일언반구도 없이 일단 사고부터 친 나를 이 공.주가 가만히 둘 리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를 보니 화는 낼 것 같지 않아 다행인가.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은 채 장미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름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대공저의 장미 정원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형형색색의 여름 장미들이 푸른 달빛 아래에서 분분히 흔들리고 있었다.

느리게 그 장미들 사이를 가로지른 지 한참. 덩굴로 만들어진 터널을 지날 때쯤 이안이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습니까?”

구태여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그가 나를 진득하게 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대공께서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요?”

“이번에는 폐하께서 너그러이 넘어가 주셨지만, 부인께서 질책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뭐… 죽이기야 하셨겠어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터널 아래로 드문드문 들어오는 달빛에 미세하게 찡그린 얼굴이 드러났다.

“부인.”

“농담이에요.”

표정 한번 살벌하기는.

피식 웃고선 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터널 밖으로 나오자 푸른 달빛이 머리 위로 포근히 내려앉았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네요.”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질타보단 의문에 가까웠다.

따지자면 우리는 애정이나 배려와는 거리가 먼 사이였다.

애당초 그에게 기브 앤 테이크를 논했던 것도 내 쪽이고.

눈을 한 바퀴 굴렸다.

“글쎄요… 뭐, 이유가 많긴 한데. 가장 큰 이유는 당신 마음이 좀 가벼워졌으면 해서였어요.”

“…….”

이안의 걸음이 느려졌다.

덩달아 속도를 늦춘 내가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핀 장미들을 응시했다.

“대공께서 그랬잖아요, 대공 주변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한다고.”

“…….”

“제 입장에선 당신이 제 주변인인걸요?”

그가 걸음을 완전히 멈췄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맞대지 않고 있음에도 그가 내게서 오래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번부터 왜 이렇게 진득하게 쳐다봐, 낯 뜨겁게.’

어쩐지 그의 집요한 시선은 매번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선선한 여름 바람이 몇 번 뺨을 스치고 지나갈 즈음, 낮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제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서 그러셨다고요.”

“뭐… 따지자면, 네.”

“상대가 저인데도 걱정이란 걸 하십니까?”

“정확히는 몸이 아니라, 마음을 말하는 거예요.”

이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는 것도 한계라 스치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청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

아무리 내 마음에 차지 않아도 그는 남자주인공이었다.

이 이야기는 다이아나와 이안,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 내용이고.

그러니 내가 그런 점을 걱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긴 하지만….’

사실은, 그 골목에서 본 새하얗게 질려 있던 이안의 얼굴이 마음에 걸려서일지도 모르겠다.

또 그런 얼굴을 보면 그땐 정말 그를 동정이라도 할 것 같아서.

‘어차피 1년 후면 다시 안 볼 얼굴이긴 하지만.’

1년.

문득 떠올린 사실에 명치 한쪽이 추를 얹은 것처럼 묵직해졌다.

나는 곧 파드득 고개를 저었다.

‘뭐야, 나 지금 아쉬운 거야?’

아쉽다니, 그럴 리가 없지.

일부러 요란하게 목을 가다듬고 다시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아무튼! 얼른 들어가요.”

“부인?”

저 멀리에서 대공저 본관의 빛이 어른거렸다.

빠르게 걸은 탓에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계단 앞에 다다랐다.

그를 지나쳐 계단을 두어 칸쯤 올랐을 때, 맞잡은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계단 아래에서 이안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또다.’

말 한마디 하지 않는데도 유난히 소란스러운 표정.

종종 마주하던 얼굴이 왜인지 지금은 더 낯설게 느껴졌다.

“…….”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머리 위로 내려앉은 푸른 달빛을 헝클어뜨렸다.

흐드러진 머리칼 사이로, 한참이나 나를 공들여 바라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굴 곁에 두더라도 그 마음 때문에 상대가 다치진 않을 거라고, 부인께서 그러셨죠.”

며칠 전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당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는 건 결코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

당신은 그 사실에 겁을 낼 게 아니라, 그들을 지키면 된다고.

그때를 회상하듯 이안이 짧게 시선을 내렸다.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쩐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이유 모를 긴장이 서렸다.

“…….”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안의 단정한 얼굴은 방금 전 소란이 무색하게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말, 따라 보겠습니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또렷했다.

“당신께 욕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붙잡은 손이 단단했다.

“…불순한 의미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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