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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88)화 (88/91)

88화.

X 됐다.

카일의 표정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랬다.

내 얼굴빛이 더욱 음험해졌다.

그 글 때문에 내가 진땀을 뺀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자네는 돈을 좇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 분명 다른 이유가 있겠지?”

이제 와서 돈 얘기 꺼내면 재미없을 줄 알아.

협박에 가까운 내 말에 카일이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에….”

그의 붉은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주군, 아니, 대공께서 너어무! 자각이 없으셔서요. 그 기회에 질투 작전으로 위기감을 좀 심어 드리고자 실은 겁니다! 제가 두 분의 애정전선을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

“흐응.”

“…지만 반쯤은 돈 생각도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세요.”

곧바로 비굴해지는 꼴이 볼 만했다.

조금만 더 추궁했다간 내가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카펫 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뻗칠 기세였다.

“돈을 위해 상전을 팔아먹었다?”

“에헤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근데 그거 진짜 반응 좋았거든요….”

“쓰읍.”

“죄송함다.”

다시 푹 고개를 숙이는 카일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진짜 심복이 아니라 수전노다.

내 서늘한 눈빛을 고스란히 맞으며 기 죽은 듯 어깨를 늘어뜨리던 카일이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소식지를 없애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제 정체가 밝혀지는 것도 안 되고요! 저한테는 먹여 살려야 할 토끼 같은 가족들이….”

“없잖나.”

“쳇.”

엘제이어 자작가 외동아들로 꿀 빨면서 산 거 다 아는데 어디서 사기를 쳐.

온갖 핑계와 수작에도 내가 꿋꿋하게 넘어가지 않자 카일의 얼굴에 슬슬 심각함이 깃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여유롭게 턱을 매만졌다.

내 입장에서도 당연히, 이 소식지가 없어지는 건 안 됐다.

‘써먹을 곳이 얼마나 많은데, 누구 좋으라고 없애?’

나는 그의 어깨를 척, 잡고 음험하게 웃었다.

“카일?”

“왜 그렇게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얼굴로 저를 보십니까…?”

제대로 봤다, 요놈아.

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우리 거래를 좀 할까.”

***

“…대공비 전하께서 원하는 글을 소식지에 실으라고요?”

몇 분 후, 그 와중에 착실하게 보호 마법과 추적 마법을 내 신체에 새겨 둔 카일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내가 검지를 쭈욱 펼치고 쯧쯧, 혀를 찼다.

“어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자네를 조종하는 배후세력 같잖나.”

사실 그거 맞다.

“그냥 아주 가아끔, 사교계의 여론몰이를 위해 나를 좀 도와줬으면 한다네. 자네가 제일 잘하는 일 아닌가?”

카일이 눈을 꾹 감고 양팔로 엑스자를 만들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이 아리아 소식지는 저의 분신. 저에게는 언론인의 긍지라는 게….”

“지금 대공께서 집무실에 계시는가?”

“…없죠, 없습니다. 뭐 사교계의 이슈나 모아 발행하는 소식지에 긍지 같은 게 있겠습니까? 그냥 대공비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아~ 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감히 예상컨대 이 인간은 이안 밑에서 일할 게 아니라, 어디 보험회사 영업직으로 일하는 게 적성에 딱일 것이다. 아니면 비슷한 서비스직에 종사한다든가.

비즈니스용 태세 전환이 저렇게 탁월할 수가 없었다.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오히려 좋아.

여유롭게 소식지를 팔랑팔랑 넘겼다.

그 모습에서 불안함을 느낀 듯 카일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대체 뭘… 무슨 글을 실으시려고 이렇게까지…?”

“아, 별건 아니고.”

한 장씩 넘기던 소식지를 접고 검지로 소식지의 1면을 탁탁 두드렸다.

“이 소식지에 우리를 습격한 배후에 대해서는 정확히 적혀 있지 않더군?”

“아, 네.”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는 황제파 귀족이 아닌가? 구태여 사실확인을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던데.”

“예,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대상이 완전히 특정되지도 않았고, 황제파라는 심증만 있지 확실한 귀족의 이름이 드러난 게 아니라서요.”

“흐음….”

“뭐, 어차피 배후가 드러난다고 해도 정확한 가문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겠지만요. 그러다 저 고소당합니다.”

카일이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사교계의 온갖 찌라시를 퍼다 나르는 주제에 고소를 걱정하긴 하는구나.

그를 떨떠름하게 쳐다보던 내가 끄덕였다.

“뭐, 일단 알겠네.”

“그으… 대체 뭘 하시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카일의 물음에 상큼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건 자네가 알 바 아니고. 내 조만간 연락할 테니 괜한 짓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게나.”

카일의 고개가 축 처졌다.

어디, 똥줄 좀 태워 보라지.

***

다음 날 오전.

아직까지는 안정을 취하는 게 좋다는 비비의 과보호를 굳건하게 떨쳐 내고선 다이닝 홀로 향했다.

이안은 오랜만에 겸상을 하러 내려온 내가 반갑기라도 한 건지 묘하게 친절했다.

식사가 한참 이어지던 중 내가 물었다.

“습격 사건의 배후 조사는 어떻게 되어 가나요?”

“심복들이 추적하고 있으니 곧 찾을 겁니다. 불안하십니까?”

“설마요. 확실한 게 좋으니까 여쭤봤어요.”

“예.”

짧은 대답과 함께 이안이 물잔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내가 문득 물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말씀하십시오.”

“황제가 되고 싶으세요?”

콜록.

뱉을 뻔하던 물을 가까스로 삼킨 이안이 황당한 낯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너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의 얼굴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황제파들은 대공께서 황위에 위협이 될까 봐 이렇게까지 하는 것 같은데. 정작 대공의 의사는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아서요.”

그사이에 차분하게 냅킨으로 입을 닦은 이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습니다.”

알고 던진 질문이라 답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는 말해 보셨어요?”

“황위 계승권 포기에 관한 거라면 진작에요.”

“그런데 아직 계승 서열에 포함되어 있다는 건, 폐하께서 허락을 안 하셨다는 뜻이겠군요.”

황제에게 자식이 없는 지금, 제국법상 그의 형제들이 황위 계승 서열을 차례대로 지키고 있었다.

적통인 루이사 황녀가 1순위, 서통인 이안이 2순위.

이안은 스스로 의지로 대공 작위까지 받아 황성을 나왔으니 계승권을 포기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계승 서열을 가지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황제 엘리시아가 그를 황위 계승 서열에서 제외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안 그래도 가족들과 거리를 두려는 이안이 계승권까지 포기해 버리면 정말 남처럼 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여태까지 이안의 태도를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정말 황위를 계승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되니까….’

엘리시아는 이안에게서 구태여 그 권력을 앗아 가고 싶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물었다.

“음… 혹시, 그 계승권 포기가 바깥에 알려져서는 안 될 주제일까요?”

잠깐 눈썹 사이를 좁히던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생각해 보니까 대공께서 계속 위협을 받으시는 건 이어받지도 않을 황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사람들이 네 목숨 노린다는 말을 왜 그렇게 점심 메뉴 얘기하듯이 하는 거니.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소드마스터라 이거니.

착잡하게 그를 훑다가 대답했다.

“아무튼 알겠어요. 저도 직접 엮이고 나니 좀 생각이 많아져서요.”

내 애매모호한 답에 이안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는 듯한 미심쩍은 눈초리였다.

쥐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고 그가 입을 열었다.

“부인, 뭘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하려고.

뒤따라올 기분 나쁜 잔소리를 예상한 내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그로부터 들려왔다.

“다치지 않는 선에서 하세요.”

“너무 염려… 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자 내내 나를 바라보던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말했다.

“다치지 않으셨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아서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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