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내 몸은 진작에 회복되었지만, 비비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유난에 결국 이틀이나 더 별궁에서 요양을 한 후에야 대공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가한 후로는 이제 좀 병간호에서 자유로워지나 싶었는데 그마저도 착각이었다.
대공저까지 소식이 파다하게 퍼진 건지, 남아 있던 사용인들도 나를 보살피지 못해 안달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아주 황송한 취급을 받으며 사흘째 침대에만 틀어박혀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유난을 떤다며 한 번쯤 시비를 걸어야 할 이안이 아주 잠잠하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저가 더 심각해서는 사용인들의 분위기를 부추기는 것도 같았다.
‘그 인간, 생각보다 많이 놀랐나?’
충격을 받은 것 같기는 했다만.
‘고작 쇄골 다친 일로도 이렇게 유난인데, 거기서 더 다쳤으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어라, 대공비 전하. 추우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닐세.”
침대 옆 보조 의자에 앉아 허공에 복잡한 마법식을 써 내려가던 카일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마법식은 언제 완성되는 건가?”
“곧이요. 미리 만들어 오면 좋았을 텐데, 신체에 직접 새기는 마법이라 대상의 상태를 봐 가면서 하는 방법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좀 기다리십쇼.”
“…그래, 그러지.”
카일은 내가 기운을 차리기 무섭게 나에게 보호 마법과 추적 마법을 걸어야 한다며 세 시간째 옆에 딱 달라붙어 복잡한 술식을 구현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하루라도 빨리 걸어 놓지 않으면 하루 늦을 때마다 제 봉급을 삭감한다고 하시지 뭡니까? 아니, 봉급이 무슨 해산물도 아니고 매 분기마다 시가입니다, 시가.”
‘봉급이 시가….’
웃으면 안 될 것 같아 입술을 꾹 물었다.
사실, 다른 때였다면 성가시고 귀찮다는 핑계로 카일을 적당히 쫓아냈겠지만 지금은 얌전히 옆에 두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마법식에 집중하고 있는 카일을 훑어보다 침대 옆 협탁에 놓아 둔 아리아 소식지를 집어 들었다.
황녀가 내게 보여 주었던 이번 주 발행분이었다.
저번 1면의 글이 제법 화제였던 건지, 소식지가 발행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간간이 의견란에 댓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소식지를 팔랑팔랑 넘기던 내가 지나가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저번 급습에 관해 아리아 소식지에서 가장 먼저 글을 실었더군.”
“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수도가 떠들썩합니다. 대공 전하야 워낙 암살 위협을 많이 겪으시니 본인 선에서 조용히 처리하셨지만, 대공비 전하까지 휘말리신 건 이번이 처음 아닙니까.”
“그렇지.”
“다들 그 얘기만 하고 있던데요.”
카일의 말대로 의견란이 가관이긴 했다.
어디 무서워서 휴가는 가겠냐는 둥,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쫓아가서 사람을 해치냐는 둥, 따지자면 정적인 건데 악의 무리가 뭐냐는 둥, 이안 클라우드 대공이 황실에 위협이 되는 건 맞지 않느냐는 둥….
평소엔 한마음 한뜻으로 가십거리나 씹어대던 인간들이 은근히 자신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며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주 개판인 의견란을 보다가 머리가 지끈거려 본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 이렇게까지 의견란에서 싸움이 일어난 데는 아리아 소식지의 본문 영향이 컸다.
원래부터 객관적인 기사를 싣는 신문과는 결을 달리하긴 했지만, 이번 글은 제목에서부터 대공을 옹호하는 것이 은근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리아 소식지를 구독하는 귀족들 중에서는 분명히 이안을 견제하는 황제파도 있을 텐데.
그들의 습격 사건으로도 모자라 아리아 소식지가 나서서 이안을 옹호하고 있으니 심보가 꼬일 만도 했다.
‘그러니까 누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습격하래?’
기도 안 찼다.
물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내가 검지 끝으로 소식지의 1면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아리아 소식지 필자가 아주 글을 맛깔나게 쓰더군.”
“제국의 웬만한 귀족들은 전부 보는 소식지인데 그 정도는 해야죠.”
카일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흐음, 역시 그렇지.”
의뭉스러운 콧소리를 흘리며 본문의 두 번째 문단을 살폈다.
일주일 동안 이안과 내가 어떤 데이트를 즐겼는지 적어 놓은 부분이었다.
바로 옆에서 우리 둘을 관찰하지 않았다면 모를 정도로 아주 상세하고 집요했다.
새삼스럽게 감탄하던 내가 중얼거렸다.
“맞아. 훌륭해.”
“아유, 당연히 훌륭해야 하는걸요.”
“역시 자네는 말만큼이나 글 실력이 아주 좋단 말이지, 카일.”
“네, 제가 원래 좀 글을 잘… 네?!”
자연스럽게 대답하던 카일이 뒤늦게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나는 소식지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떼어 카일을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자네지?”
“…뭐가 말입니까?”
카일이 애써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런 것치고는 손끝에서 빛나는 마법식이 달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입술을 죽 늘리며 으쓱였다.
“알면서 뭘 또 묻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카일의 얼굴에 진땀이 흘렀다.
입은 잘 털면서 거짓말은 못 하는 게 꼭 이안이랑 판박이군.
혀를 쯧 차고선 그의 앞에 소식지를 툭 내려놓았다.
“여기, 1면의 두 번째 문단 세 번째 줄. 대공과 대공비가 야심한 밤에 해변에서 산책을 즐겼다는 내용 말일세.”
“그… 그게 뭐 어쨌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날 대공과 내가 산책을 한 걸 아는 사람이 자네뿐이거든.”
내 말에 카일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파드득 저었다.
“에헤이, 전 또 뭐라고. 아리아 소식지가 제국 곳곳의 숨겨진 소식을 보도하는 일이야 잦지 않습니까? 아, 멀리서 지켜본 것일 수도 있고요!”
“그날 자네가 잠이 덜 깬 상태라서 잘 몰랐나 본데, 그 해변은 황실의 사유지라네.”
제국 귀족들의 온갖 추문과 이슈를 보도하는 아리아 소식지가 건들지 않는 게 딱 하나 있었다.
바로 황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
그야, 황실의 사유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안이 철저하다 못해 철통같았으니까.
아무리 아리아 소식지 편집장이라고 해도 그 보안마저 뚫을 수는 없었던 탓이다.
‘대부분은 그것까지는 생각 못 한 것 같지만.’
내 짬이면 그 정도는 대충 훑고도 파악할 수 있단 말이지.
그런데 그 사유지 안에서 일어난 일을 보도했다면 뻔하지 않은가.
내 말에 카일은 쟁반으로 머리 한 대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 스스로도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지?’ 같은 생각을 하는 얼굴이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만들었을 의견란에, 묘하게 대공가에 우호적인 글, 그날 황실 사유지에서 일어난 일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 이래도 발뺌할 텐가?”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 사유지야 무, 무단침입을 할 수도 있죠…?”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필사적으로 둘러대는 꼴이 조금 안쓰럽긴 했다.
백 년 묵은 능구렁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거짓말을 못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건 제 주군인 이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유유상종이구나, 새삼스럽게도.
“흠, 그런가? 어쩔 수 없군. 그럼 황제 폐하게 당장 사유지의 침입자를 조사해서 배후를 밝힌 뒤 극형으로 다스리라고 건의를 올려야….”
“대, 대공비 전하악!”
카일이 다급하게 내 팔을 붙들었다.
그의 표정이 절박했다.
“꼭…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자네 일 아니라며?”
“저 진짜 죽습니다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건지 카일이 순순히 실토하며 울먹였다.
그래, 너도 황권이 무섭긴 하지?
“대공가 근무 조건이 겸업 금지라 들키면 진짜 짤린단 말입니다… 이번 분기 봉급은 보너스가 두둑한데!”
그쪽이었냐고.
내 얼굴에 황당함이 들어찼다.
황권보다 못 받을 보너스를 무서워하는 게 말이 돼?
얘 정말 그냥 수전노 아냐?
“카일…?”
“전하, 진짜 따악! 한 번만 눈감아 주십쇼.”
이제 숨기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한 건지 카일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구구절절한 감성팔이와 핑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부업이나 하려고 만든 사교계 소식지였다, 그런 거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으냐, 그런데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던 건지 점점 입소문을 타더니 이 지경까지 왔다, 이게 다 제가 유능한 탓이다, 대공비 전하도 이 소식지 없어지면 아쉬우실 걸요, 함만 봐주세요, 충성을 바칠게요….
누가 아리아 소식지 필자 아니랄까 봐 정말 눈물 없이는 못 들을 애원이었다.
“그, 그리고 제가 두 분 연애 사업도 아주 적극적으로 밀어드리지 않았습니까. 예? 시즌 파티 때부터 1면에 딱!”
헤헤, 헤실헤실 웃으며 손을 삭삭 비벼 대는 꼴이 간신배가 따로 없었다.
‘뭐, 확실히 아리아 소식지한테 도움받은 게 있긴 한데….’
그래서 이 소식지를 이용하면 괜찮겠다 싶었던 거고.
내 반응이 나쁘지 않았는지 카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 치 혀를 털어 댔다.
“그냥 두셔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이게 다 이 클라우드 대공가를 위한 저의 충심이란 말이죠!”
“호오, 충심이다? 돈벌이가 아니고?”
“암요, 그럼요! 어우, 돈벌이라니 말도 안 되는! 그런 불경한 짓을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번 기사도 보셨죠? 제가 아주 따악, 정치질을!”
“그럼 카일, 하나만 묻지.”
“예! 뭐든요!”
카일의 비굴한 웃음을 보며 내가 물었다.
“나랑 로저 공작 이야기는 왜 실었나?”
“…딸꾹.”
“그것도 자네의 충심인가?”
카일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