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화, 황녀님! 대공비 전하께서는 아직…!”
“이쪽은 안 됩니다…!”
노크 한 번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황녀의 뒤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하인들이 따라붙었다.
“몰라 몰라, 비켜어!”
황녀는 그걸 또 전부 피했다.
“대공비, 대공비! 괜찮아? 흐어엉!”
기어코 침대 앞까지 달려와 시트를 부여잡고 눈물 콧물을 빼는 황녀를 쳐다보다가, 허망하게 서 있는 하인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자네들이 고생이 많네….’ 같은 얼굴로 착잡하게 웃자 그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십 년은 늙은 모습이었다.
“되었으니 이만 나가 보게.”
“…예, 대공비 전하.”
그들이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동시에 황녀의 울음소리가 본격적으로 커졌다.
“흐어엉, 흐어엉. 나아, 대공비가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이제 괜찮아?”
“예, 황녀님. 보시다시피요.”
“으흑, 흐아앙. 속상해! 이게 뭐야! 내가 그 자식들 다 찾아서 죽여 줄게!”
이미 죽었어….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그녀를 쓰다듬고만 있을 무렵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예정대로 수도로 올라가셨습니다. 부인께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머물고 싶어 하셨지만 아시다시피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라서요.”
“아, 네.”
“황녀는 보다시피… 부인께서 일어나시면 같이 올라가겠다고 남았고요.”
어쩐지 황녀를 쳐다보는 시선이 나만큼이나 착잡했다.
천방지축 막냇동생을 떠안은 오빠라는 게 다 그렇지.
한편,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트에 대고 줄줄 콧물을 빼던 황녀가 고개를 냅다 쳐들었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이거 봐, 기사까지 실렸다고!”
그런 황녀가 내민 것은 놀랍게도 신문이 아닌 아리아 소식지였다.
그녀가 우악스레 펼쳐 든 소식지를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읽어내렸다.
반쯤 눈물에 젖어 축축했지만 내용을 알아보기엔 어렵지 않았다.
〈휴양지에서의 급습! 대공 부부를 노리는 악의 무리의 정체는?〉
‘악의 무리래….’
따지자면 우리 입장에서는 그게 맞긴 한데….
보통 중립적인 기사나 소식지에선 그렇게까지 표현하지 않지 않나?
‘하여간 독특해….’
언제나처럼 어그로를 끄는 제목을 뒤로하고 본문을 읽었다.
의외로 본문에는 제법 제대로 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공 내외가 휴양지에서의 마지막 날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단둘이 데이트를 나섰고, 그 현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습격당해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 와중에 대공과 내가 일주일 동안 얼마나 근사한 휴가를 즐겼는지, 마지막 날에 방문한 야시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한 내용이 쓸데없이 길게 적혀 있었다.
‘내가 쓰러졌다는 내용은 없네.’
아무래도 곧장 카일에게 이송되어 타인에게 노출될 일이 없었으니까.
두 번째 문단을 읽던 내가 멈칫했다.
‘음…?’
무언가 위화감을 눈치챈 탓이었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소식지를 고쳐 들었을 때였다.
내 앞에 있던 황녀와 소식지가 동시에 휙 사라졌다.
고개를 드니 이안이 황녀와 소식지를 각각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대공?”
“으악, 대공. 이거 놔! 오라버니!”
뒷덜미가 들려 대롱대롱 매달린 황녀와 소식지를 혼란스럽게 번갈아 보았다.
“아니, 열네 살을 한 손으로… 그보다, 사람 그렇게 드는 거 아니거든요?”
그러나 이안은 내 지적은 들은 척도 않은 채 황녀를 침대로부터 떨어진 곳에 내려놓았다.
“일단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몸을 추스르시는 대로 대공저에 복귀할 예정입니다.”
“아, 그러네요. 일정이 많이 지체되었겠군요.”
대공이나 나나 이런 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대공저야 사용인들이 알아서 잘해 주겠지만… 밀린 업무도 봐야 하고, 이번 사건의 배후도 조사해야 하고, 관련해서 황제 폐하도 알현해야 하니까요. 바쁘군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되짚고선 끄덕였다.
여태까지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대공이 어떻게 일을 처리했는진 몰라도, 내가 휘말린 이상 곱게 넘어가 줄 수는 없지.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이안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요?”
이거 아닌가?
내 의아한 물음에 이안은 버퍼링이 걸린 듯 멈칫했다가, 착잡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부인께서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본인이 환자라는 자각이 있긴 하신 겁니까?”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리고 과다출혈이 있긴 했지만 꼴랑 쇄골 좀 다친 거라고요. 누가 보면 어디 하나 날아간 줄 알겠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안을 쳐다보자, 그는 뒤늦게 아차 싶은 얼굴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쉬십시오.”
이어서 나를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머뭇거림 끝에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하는 겁니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
기어코 엘로이즈를 눕히고 황녀를 내쫓은 이안이 침실 반대편의 간이서재로 향했다.
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불쑥 나타났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일단 의사 소견으로는 이상이 없다고 하니 차도를 지켜볼 예정이다. 내가 명령한 건?”
“예, 명하신 대로 곧장 추적을 시도했습니다. 황제파의 소행인 건 확실해 보입니다만….”
카일이 잠깐 말끝을 흐리며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죽은 마법사가 꽤 고위 서클의 실력자였던 것 같습니다. 몇 겹에 걸쳐서 교란 마법과 함구 마법을 걸어 놓은 탓에 암살자와 마법사 모두 누구와 접촉했는지 당장으로선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배후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합니다.”
이안이 서늘하게 카일을 훑었다.
“앞으로 열흘 주겠다. 그 안에 확실하게 배후를 찾아내.”
“예, 주군.”
“그리고 대공비가 몸을 추스르는 대로 보호 마법과 추적 마법을 걸어 두도록. 아티팩트는 분실할 위험이 있으니 신체에 새겨 놓도록 해.”
아티팩트도 아닌 신체에 호신용 마법을 걸어 놓으라는 말에 카일이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음험하게 가라앉은 주군의 분위기를 읽고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근데… 주군 정말 괜찮으십니까?”
슬쩍 눈치를 보며 묻는 카일의 행동에 이안이 눈썹을 까딱였다.
“무엇이.”
“벌써 사흘째 제대로 잠도 안 주무셨잖습니까. 대공비 전하 옆에 계시느라….”
“언제는 신경 좀 쓰라더니.”
“그거랑 같습니까?”
하이고, 탄식하는 카인을 향해 이안이 귀찮다는 듯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피곤하니 물러가도록 해라.”
“어차피 잠도 안 주무실 거면서….”
“혀가 긴 걸 보니 아직 살 만한가?”
“가 보겠습니다아.”
충성.
껄렁하게 경례를 해 보인 카일이 눈부신 빛과 함께 사라졌다.
피곤기가 밀려온 듯 서재 의자에 기대어 얼굴을 쓸던 이안의 손이 느려졌다.
“당신이 누군가를 곁에 둔다고 해서, 그 마음이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사흘 만에 깨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대공 위를 받기 전까지, 황성에서 살아온 스무 해 동안 이안은 철저하게 고립되는 방법만을 배웠다.
이안의 세계는 꼭 두 개로 나뉘었다.
의무와 욕심.
그에게 기꺼이 허락된 것은 의무였으며, 그 외의 것은 전부 욕심에 불과했다.
모친인 황비는 언제나 이안에게 스스로를 죽이고 의무만을 좇으라 가르쳤다.
그리하여 자신의 핏줄이 황위에 오르기를 바랐으니까.
그런 황비가 스스로의 욕망에 좀먹혀 죽고 이안 자신은 대공 위를 받아 나온 지금까지도 그 가르침은 족쇄처럼 남아 그가 걸어갈 길을 제시하곤 했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엘로이즈는 꼭 반으로 나뉜 이안의 세계를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가져 본 적 없는 것들을 자꾸 제 앞으로 들이밀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그러했으며,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길이 그러했고, 모든 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 말하는 단호한 말투가 그러했다.
이안은 처음에 그런 엘로이즈가 거북하고 이상했다면 지금은 버거웠다.
“…….”
이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둥, 둥, 둥.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북소리를 울렸다.
이제는 모른 척 외면할 수도 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