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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85)화 (85/91)

85화.

“서 있지 말고 좀 앉으세요. 저 목 아파요.”

이안을 향해 눈짓했다.

“대공?”

“…예.”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서 있던 그가 내 눈짓에 마지못해 간이의자에 앉았다.

환자인 내 말을 들어주고는 있지만,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다 보인다.’

지금쯤 이 유리멘탈은 내 상처에 대해 지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전부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되뇌고 있겠지.

내가 제대로 선을 그어 놓지 않으면, 이 자식은 예전으로 회귀해서 다시 모든 인간들과 멀찍이 거리를 두려고 할 것이다.

그랬다간 내 노력은 전부 말짱 도루묵이 될 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를 찬찬히 훑던 내가 말했다.

“지금쯤이면 대공께서는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대공의 탓이다, 역시 부부 노릇이고 사교계 평판이고 그만두고 예전처럼 거리나 두다가 일 년 후에 이혼이나 하는 게 맞지 않나… 뭐, 이런 생각 하고 계시죠?”

보나 마나 뻔하다는 내 말투에 그가 비껴 내리던 시선을 끌어 올려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인간은 뻔해도 너무 뻔했다.

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말했잖아요. 난 괜찮고, 괜찮을 거라고. 기절하는 와중에도 대공 탓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건 흘려 들으셨나 봐요?”

“그게 아니라.”

“알아요, 왜 그러는지.”

내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대공께서는 늘 그러셨잖아요. 열 살 생일 이후로는요.”

이안이 멈칫했다.

한 박자 느리게 그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부인께서 어떻게….”

“결혼할 상대에 대해서 알아두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면서요. 대공이 저를 알듯이 저 역시 대공을 안다고 치죠.”

가벼운 말투로 대답하며 눈썹을 들썩였다.

‘미안. 원작을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이안이 열 살이 되던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난폭한 황비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던 유모가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황비였다.

생일을 맞은 이안이 유달리 엘리시아를 보고 싶어 하자, 유모는 황비의 눈을 피해 황태자 엘리시아의 궁 후원에서 두 사람을 잠깐 만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안이 엘리시아가 준 오르골을 들고 기쁘게 황자궁으로 돌아왔을 때, 황비는 황자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유모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정적인 엘리시아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으니까.’

그리고 유모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어린 이안이 덜덜 떨며 토악질을 해 대자, 황비는 이안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말들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똑똑히 보십시오, 황자. 괴로움과 아픔은 나약함의 증거입니다. 이게 다 황자가 나약해서 겪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마세요, 동요하지 말고 마음에 두지 마세요. 쓸데없는 감정은 황자의 마음을 어지럽힐 뿐입니다.”

“누구도 친애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황자의 정적이라면 더더욱이요. 황자가 친애하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불행해질 테니까요.”

“외로움은 허상이에요, 황자. 그러니 휘둘리지 마세요. 감정은 황자를 좀먹기만 할 것입니다. 마음을 죽이고 이성을 따르세요.”

“군주가 될 사람이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겁니다. 이 어미의 말을 명심하세요.”

그 말은 오래도록 이안의 무의식에 저주처럼 남았다.

이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마저도 그 부분을 읽을 때는 그를 동정하고 안쓰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안을 터무니없는 이유로 가스라이팅 한 황비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기 아들이 정말 불행해지기를 바란 게 아니라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다른 게 학대냐, 그런 게 학대지.

‘내가 다쳤다는 사실에 이안이 동요하는 것도 이해는 돼.’

이번 사건은 어쩌면 간신히 과거를 극복하려던 이안에게 다시금 트라우마를 심어 준 일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이안이 그런 식으로 되돌아가는 건 정말로 사양이었다.

“대공, 말씀드렸지만 저는 멀쩡해요. 그리고 대공께서는 그 현장에서 저를 구하셨고요.”

“부인께서 인질로 잡혀 위협을 당한 건 나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죽었나요?”

반박하듯 묻자 이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억지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베개에 상체를 기대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를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대공께서는 자의식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예?”

“수도 귀족 중 적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이안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설마 이번 일이 대공이라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부친 되시는 알피어스 후작께서도 젊은 시절 몇 번이나 암살 위협을 받으셨어요. 아버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다른 귀족에게요.”

사실 알피어스 후작이 진짜 위협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개국공신 가문인 알피어스 후작가라면 적이 되는 가문이 하나쯤 있을 테고, 그중 하나가 후작의 목을 베려고 한 순간도 있었겠지.

아님 말고.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나 때문이다’라고 여기는 이안의 생각을 바꾸는 거니까.

“이게 무슨 뜻인 줄 아세요? 대공과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저는 한 번쯤 목숨의 위협을 받았을 거라는 이야기예요.”

“그런….”

“그리고 혹시 알아요? 그 습격으로 정말 죽어 버렸을지.”

“부인.”

이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누가 정말 죽는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선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내가 습격을 받거나 부상을 당한 게 대공 탓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게 대공 덕분이라는 뜻이에요.”

“…….”

“당신이 나를 구했잖아요.”

이안이 혼란스러운 건지, 혹은 당혹스러운 건지 모를 표정으로 나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조금 궤변이 섞여 있긴 하지만 이 모든 게 이안의 탓이 아니라는 생각만은 진심이었다.

애당초 가만히 있는 이안을 습격한 놈들이 이상한 거지.

그렇게 따지면 우리 공격한 건 황제파의 사람이니 황제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게?

“내가 말했죠.”

베개에 기댄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이 누군가를 곁에 둔다고 해서, 그 마음이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분명히 네 옆에서 행복할 사람도 있다고. 다이아나라든가, 다이아나라든가.

이안의 자청색 시선이 흔들렸다.

“그래도 정 불안하면, 뭐….”

눈을 한 바퀴 굴리고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대륙 제일의 소드마스터가 되어 보시든가요. 혼자 땅 파고 있는 것보단 그쪽이 더 멋있을 것 같네요.”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검 쓰는 거 조금 멋있긴 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마법사의 팔을 깨물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소드마스터인 이안이 앞에 있었기 때문이고.

“아무튼! 이상한 생각하지 마시고 정신 차리세요. 알겠어요?”

눈을 부릅뜨고 묻는 내 모습에 이안이 작게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음, 바로 대답을 듣는 건 무리겠지.’

사실, 이 상황에 이안이 내 말을 끊지 않고 들은 것만 해도 용했다.

‘그래도 혼자 땅굴 팔 걱정은 이제 좀 덜었으니까….’

속으로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슬쩍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하지 않은 말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음, 대공.”

방금 전까지 혼자 막힘 없이 말하던 내가 갑자기 머뭇거리자 이안이 살풋 인상을 쓰며 나를 응시했다.

시선을 옆으로 흘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쩐지 어색해진 탓이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

“생각해 보니 대공이 저를 두 번이나 구해 줬는데 제대로 인사를 한 적이 없더라고요. 화만 냈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슬쩍 그를 곁눈질했다.

이안의 표정이 오묘했다.

얼굴을 미세하게 찡그렸다가, 입을 벌렸다가, 꾹 입술을 다물었다.

말 한마디 뱉지 않는데도 지나치게 소란스러운 낯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정적이 내려앉아 있기를 한참.

이안이 흔들리는 눈빛과 함께 천천히 입술을 뗀 순간이었다.

벌컥!

“대공비이이이!!!!”

음, 어쩐지 조용하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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