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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84)화 (84/91)

84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안은 눈을 크게 뜨다가, 내가 마법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발을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 지척으로 다가간 이안이 칼을 휘둘렀다.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의 머리였던 것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한 채였다.

“윽.”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내가 고개를 돌렸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몸이 심장이라도 된 것처럼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지, 진짜 죽을 뻔했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살수들부터 몸을 스치고 지나간 칼날, 발밑에 뒹구는 시체까지.

주저앉은 채 간신히 두 팔로 몸을 지탱하고 헐떡거리는데 이안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부인, 다친 곳은 없….”

‘아차, 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대공, 이쪽 보지 말아요!”

동시에 팔을 들어 선혈로 축축하게 젖은 하늘색 시폰 원피스를 가렸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도사리던 생명의 위협이 사라지고 나니 그제야 서서히 이성이 돌아왔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빠르게 뛰는 심장이 아직 진정된 상태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지만, 지금 내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안다.

이건 이안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이었다.

이안이 자신의 곁에 머무는 사람들을 단호하게 밀어내고 거리를 두는 건 비단 그의 성정이 메말라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는 일을 강박적으로 두려워했다.

열 살 생일에 벌어진 사건 이후로는 더더욱.

그래서 어떻게든 그걸 극복시켜 보려고 여태까지 그 애를 쓴 건데….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상처를 가려보려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몸에 힘이 풀린 탓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대공, 이쪽 보지 말고, 그냥….”

최대한 몸을 가린 채 힘없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미 표정이 사라진 이안이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하얀 얼굴에 핏기가 가셔 창백했다.

방금 전까지 검을 쥐고 있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망했네.’

응, 망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그 생각 하나는 분명하게 들었다.

‘이렇게 가린다고 정말 상처를 보지 못할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나는 저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열 살의 이안이 가장 의지하던 사람을 잃었을 때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고 했지.

‘내가 이 인간의 트라우마 버튼을 누를 줄이야….’

지금 밀려오는 현기증이 과다출혈 때문인지, 혹은 막막한 상황 때문인지 정확히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내가 그 자리에서 휘청이자, 뒤늦게 정신이 든 이안이 다급하게 내 몸을 받쳐 들었다.

“…부인.”

“…….”

“지금 피가….”

희게 질린 얼굴로 내 손을 치우려는 이안을 간신히 막았다.

그리고 한쪽 팔로 그를 잡아당겨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확 당겨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간신히 턱을 대고 숨을 몰아쉬자 이안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부인?”

“아….”

이거 진짜 아프네.

동시에 나는 천천히 밀려오는 졸음이 과다출혈 탓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러니 정신을 잃기 전에 확실히 말해 둬야 했다.

나는 그를 안은 채로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목소리에 힘이 없어 얼마나 단호하게 전달되었을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잘 들어요. 나 안 죽었어요.”

“…….”

“그리고 괜찮을 거예요.”

낮게 깔리는 내 음성에 이안이 멈칫했다.

자세가 자세라 그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게 애석했다.

“피를 흘려서 어지러워요. 지금 점점 졸린데, 빨리 카일을 불러 주세요. 급소는 아니니 빠르게 별궁으로 돌아가서 처치하면 괜찮을 거예요.”

나 쓰러지거든 정신 나가 있지 말고 발 빠르게 행동하라는 뜻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이안은 평소 같은 이성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하아, 가쁜 숨을 한번 몰아쉬고 가능한 한 또박또박 그에게 말했다.

아, 정신 혼미해.

“이거, 당신 탓 아니에요. 알겠어요?”

“부인? 무슨….”

혼란스러운 이안의 물음을 끝으로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곧 세상이 완전히 까맣게 물들었다.

***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간간이 다급한 음성과 부산스러운 소음이 몽롱한 정신을 깨우다가도, 밀려오는 아득한 수마에 다시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윽고 눈을 떴을 때, 주변은 고요했고 뿌연 시야에는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대공저가 아닌 별궁의 침실 천장이었다.

‘하… 진짜 거기서 쓰러질 줄이야.’

뻐근한 고개를 겨우 돌려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방 안에 붉은빛이 어른거린다 싶었는데 창밖에선 해가 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꼬박 하루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 모양이다.

“으….”

상황을 대충 파악한 내가 찌뿌둥한 팔을 겨우 움직여 조심스럽게 가슴께를 더듬어 보았다.

얇은 실내복 아래로 단단하게 묶인 붕대가 느껴졌다.

‘다행이다, 진짜로 죽진 않았구나….’

별궁의 천장이 보이고, 처치도 되어 있는 데다가 은은하고 뻐근하게 느껴지는 고통을 보니 나는 확실히 살아 있었다.

사실, 이쪽 세계로 넘어올 때 환생트럭에 치인 순간에 비하면 이 정도 고통은 견딜 만했다.

그래도 움직이기는 여전히 힘들었지만.

겨우 팔을 내리고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이던 나는 위화감을 느끼고 창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이안이 넓은 침대 끄트머리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설마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야?

놀라서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부스럭대는 기척을 알아차린 건지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부인, 괜….”

“조금 뻐근하고 상처 부위가 욱신거리는 것 빼고는 괜찮아요. 정신도 멀쩡하고. 상처는… 아야, 자세한 소견을 들어 봐야 알겠지만 이삼 주 정도 붕대를 하고 있으면 낫겠죠.”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차분히 선수를 쳤다.

오래 누워 있던 탓에 힘이 없어 제대로 전달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안이 작게 입을 벌린 채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쓰러지기 전후로 이 인간의 못 보던 표정을 참 많이 보는구나 싶었다.

은근하게 밀려오는 통증에 잠깐 얼굴을 찌푸리던 내가 덧붙였다.

“…저는 괜찮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그만 그렇게 보고 의사 좀, 불러 주실래요?”

“…….”

“지금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서, 저보다, 대공이 더 환자 같아요.”

스스로도 농담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하고 나서야 이안이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제야 그가 내내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충격을 받긴 했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안이 설렁줄을 당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들과 의사가 쏟아져 들어왔다.

“마, 마님!”

“대공비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어우, 시끄러워.

울먹이며 단숨에 침대까지 달려오는 비비와 그 뒤를 쫓아 오는 의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정신이 들었네. 내가 쓰러진 지 얼마나 지났지?”

“꼬박 사흘이 지났습니다.”

하루가 아니었군.

생각보다 피를 많이 흘린 건지, 엘로이즈의 몸이 연약한 건지 잠깐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둘 다겠지.

“대공비의 상태부터 살펴라.”

그때 굳어 있는 줄 알았던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의사에게 명령했다.

퍼뜩 놀란 의사가 내게로 다가왔다.

“예, 대공비 전하. 소인이 상태를 좀 살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내 허락이 떨어지자 의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맥을 짚고, 상처 부위를 간단하게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다행입니다. 다친 직후 엘제이어 공께서 바로 응급처치를 하신 데다가 상처도 덧나지 않으셔서 금방 회복되실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문제가 없으시고요.”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만, 쇄골 쪽을 다쳤을 뿐이니까. 급소도 아니고.

나는 들었냐는 듯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반응이 돌아온 건 다른 쪽이었다.

“마, 마니임… 저, 저는 정말 마님이 피,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하마터면 돌아가시는 줄 알…!”

“비비?”

울음을 터뜨리려는 비비를 다급하게 막고 불렀다.

지금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짧게 이안의 눈치를 살피고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울지 말고, 배가 좀 고픈 것 같으니 먹을 걸 가져와 주면 좋겠구나.”

“아! 그렇죠, 네, 네! 지금 바로 가져올게요!”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벅벅 닦은 비비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자네도 진료가 끝났으면 하인들을 데리고 잠시 비켜 주겠나? 대공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예, 대공비 전하.”

내 말에 의사와 하인들이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가 문을 닫았다.

달칵, 소리가 울리고 혼자 남아 나를 쳐다보는 이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얘기 좀 해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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