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미행이요?”
여기서 갑자기?
당황한 나와 달리 이안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면서도 차분한 어조였다.
“가끔 있는 일입니다. 예상했고요. 황제 폐하와 별궁까지 동행했으니 황제파 쪽에서는 심기가 뒤틀렸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절 위험 인자로 보니까요.”
“…….”
“그래도 돌아오는 날 습격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건 좀 빠르네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안의 말을 들으면서도 확실하게 이해가 안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상황은 이해했지만, 납득이 안 됐다.
극성 황제파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고, 이안은 왜 또 그걸 예상하고 있던 건데.
그냥 엘리시아랑 이안을 사이좋은 남매로 두면 안 되는 거냐고.
게다가 아무리 봐도 황제와 이안은 황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굉장히 아끼고 좋아하고 있는데.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반면 이안은 이 상황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최대한 조용히 따돌리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서 처리하기엔 사람이 너무 많군요.”
나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졸지에 나는 그에게 완전히 안긴 자세가 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저한테서 떨어지지 마세요. 실례하죠.”
그 말과 동시에 내 허리를 확 당겨 자신의 몸에 밀착시킨 이안이 빠른 속도로 인파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로 비좁은 데다가 조명까지 모두 꺼져 어두운 광장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덕분에 나는 느껴지지도 않는 살기를 피해 그에게 안긴 채로 도망쳐야 했다.
광장에서 벗어난 이안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섰다.
정확히는 길이 막힌 골목이었다.
‘아니, 막다른 곳으로 오면 어떡해?’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으나, 이안은 조금 생각이 다른 듯했다.
나를 벽 앞에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비장함이나 긴장감조차 없는 평이한 음성이었다.
“기척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금방 처리할 테니 벽에 등을 대고 움직이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뒤를 돌아 검을 꺼냈다.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되듯이, 골목길 끝에서부터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진짜로 나타났어?’
그들 손에 들린 암기를 확인하자 온몸의 피가 싸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이안 때문에 무뎌졌던 현실 감각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대공, 조심…!”
“벽에 등 대세요, 부인.”
명령조로 이야기하는 이안의 음성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이런 상황을 몇 번이고 겪어 익숙해진 사람처럼.
더 말이 나오지 않아 입을 꾹 다문 채로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
‘이래서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왔구나.’
사방이 뚫린 길은 전투나 도주에 용이할지 몰라도, 누군가를 보호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으니까.
한편, 살수들과 이안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이안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서슬 퍼런 검기 때문인지 그중 누구도 섣불리 선제공격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이었다.
“눈도 감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가볍게 도약한 이안이 시야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가장 가까이 있던 살수의 가슴을 베었다.
“크윽!”
촤악, 눈앞에 흩뿌려지는 선홍빛의 핏물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야를 차단한 것이 무색하게 비릿하고 역겨운 쇠 냄새가 콧속으로 마구 짓쳐 들어왔다.
그다음은 아수라장이었다.
날카로운 검신과 암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 누군가의 살이 베이는 소리, 낮은 신음과 뭔가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마구 뒤엉켜 들려왔다.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를 끝으로 소음이 끊겼다.
“…….”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땐, 질척한 핏물 위에서 이안이 검을 집어넣고 있었다.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짙은 피 냄새에,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천천히 뒤를 돈 이안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만 눈을 떠도 된다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표정으로 그가 으쓱였다.
“괜찮…아요?”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에 애써 힘을 준 채로 더듬더듬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안이 살해 위협을 지겹게 받아 왔다는 건 이미 책으로 읽은 내용이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이게 아무렇지 않을 정도면 대체.’
내가 휘청거릴 뻔한 몸을 바로 세우려는 순간이었다.
이안의 눈이 커졌다.
“부인, 위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무것도 없던 벽에서 튀어나온 깡마른 손이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이런, 방심하지 마셨어야죠.”
이어서 내 귓가에 긁는 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벽에서 나왔어…?’
뻣뻣하게 굳어 버린 내가 눈동자만을 굴려 나를 붙잡은 인영을 쳐다보았다.
까맣고 더러운 로브를 뒤집어쓴 채 킬킬대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튀어나온 벽에서부터 검푸른색 마법진이 불온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법사였어…!’
한편, 살벌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던 이안이 다시금 검을 빼 들었다.
“놔라.”
“흠. 어쩐지 살수들만 보내기에는 불안해서 와 봤는데, 늦지는 않아 다행이군요.”
이안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마법사가 쯧쯔, 혀를 차며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훑었다.
“나름 이 바닥에서 유능한 놈들이라고 하던데, 의뢰인께서 실망이 크시겠습니다. 뭐, 이제 제가 왔으니까.”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내 목에 서늘하고 날카로운 것이 와 닿았다.
“읏…!”
“대공비한테는 유감이 없지만, 어쩔 수 없군요.”
단도를 고쳐 쥔 마법사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소문이 진짜였다니. 대공이 대공비와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설마설마했는데 말이죠.”
“이거, 놓지 못해…?”
“숨통이 끊기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겁니다, 대공비.”
그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경고했다.
동시에 서늘한 칼날이 내 피부를 얇게 베어 피가 흘러나왔다.
마법사가 고개를 들어 로브 아래의 시커먼 눈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방금 전 여유롭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싸하게 가라앉아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피가 흐르는 내 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본 나는 이상하게도, 그와는 반대로 복잡하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표정 관리도 못 하고. 안 어울리게.’
이안의 동요를 알아챈 마법사가 입꼬리를 비틀어 비죽 웃었다.
“검을 내려놓으시죠? 대공.”
‘…큰일 났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안이라면, 정말로 검을 내려놓을 것이다.
눈앞에 ‘인질’이 있는 한 이안 클라우드의 행동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안 돼.’
검을 내려놓는 순간 이 마법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나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상대는 마법사였다.
깡마른 팔로 날 꽉 잡고 있다지만, 생각보다 힘이 그리 대단하진 않았다.
‘이 정도면 반대쪽으로 몸을 틀어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문제는 이 칼인데….’
시선을 내려 내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 칼을 살폈다.
서슬 퍼런 칼날이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마법사라 그런지 조금 전의 살수처럼 단번에 급소를 노릴 수 있는 실력자는 아닌 듯했다.
게다가….
내 시선이 건너편의 이안에게로 향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의 기민한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저 인간이라면 믿을 수 있어.’
틈만 만들면 어떻게든 해 주겠지.
나는 언젠가 대학교 교양으로 배웠던 호신술을 떠올렸다.
좋아, 기회는 한 번이다.
숨을 한껏 들이마신 내가 이를 세워 목에 두른 팔을 콱 깨물었다.
“끄아!”
짧은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가 흠칫 물러섰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팔꿈치를 세워 남자의 명치를 가격했다.
“크윽! 이 미친 계집이!”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마법사가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 목을 찌르려는 순간, 몸을 재빠르게 굴려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촤악.
빗맞은 단도가 쇄골을 깊게 스치고 지나가 피를 흩뿌렸다.
“악!”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내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됐어!’
나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꾹 내리누르며 이안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