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당연한 듯 손목을 달라며 내미는 그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굳어 있자 고개를 기울인 이안이 내 손목을 잡아 올렸다.
이어서 그가 태연한 손길로 팔찌를 걸어 주었다.
“오른손잡이시니 왼쪽 손목에 거는 게 좋겠습니다.”
하얀 조개껍데기가 머리 위의 조명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손길을 거둔 이안이 손목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뱉었다.
“예쁘네요.”
“…네, 네?”
더듬거리며 묻자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부인께서도 제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예쁘다고.”
“…….”
“예쁩니다.”
그의 말대로 분명 내가 이렇게 칭찬하라고 가르친 건 맞는데, 어쩐지 이런 식으로 듣고 나니 볼이 한없이 뜨거워졌다.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너무 훅 들어오는 거 아니냐고.
한편, 그 모습을 보던 상인의 표정이 흐뭇해졌다.
“역시 신혼부부들은 사이가 좋네! 남편 사랑이 뚝뚝 흐른다, 흘러. 에이잉, 기분이니까 여기, 이것도 서비스로 줄게.”
상인이 우악스럽게 내 손에 조개껍데기가 달린 머리끈을 쥐여 주었다.
“아니, 괜찮은데….”
“받어, 받어. 딸 같아서 주는 거야.”
꾸역꾸역 내 손에 고리를 주고서는 엄지를 척, 드는 표정이 지나치게 뿌듯했다.
어정쩡하게 머리끈을 쥐고 있자 이안이 나 대신 상인을 보며 짧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마담.”
“어유, 남편이 아주 싹싹하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말을 잃었다.
‘…뭐야?’
동시에 상인에게서 몸을 돌린 이안이 곧바로 평소와 같은 버석한 표정으로 돌아갔으므로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방금 뭐 한 거예요?”
“신분을 숨기자면서 상인을 하대할 수는 없잖습니까.”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가죠, 아직 불꽃놀이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돌아다닐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다시 손깍지를 끼고 나를 이끌었다.
그보다 반 발자국 뒤에서 걷던 나는 문득 발견한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야시장의 광장으로 이어지는 쪽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있었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인 순간 와아, 하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술이군요.”
“이런 데서도 마술을 해요?”
“달에 한 번쯤 집시나 유랑 마술사들이 야시장에 방문해 공연을 하곤 합니다. 오늘 온 모양이네요.”
“아하.”
여기에서 마술을 보게 될 줄이야.
“괜찮으면 저거 보고 갈래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러시죠. 맨 앞자리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이어 나를 훑어본 그가 덧붙였다.
“뒤에선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이 자식 지금 나 키 작다고 무시한 거지.
내가 작은 게 아니라 지가 멀대처럼 큰 거면서.
슬쩍 인파를 보니 이안 말대로 정말 그가 목마를 태워 주지 않는 이상은 뒤쪽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승낙이 떨어지자 그가 나를 데리고 맨 앞쪽으로 향했다.
방금 전 마술 하나를 끝냈는지, 비둘기를 새장에 집어넣은 마술사가 뒤를 휙 돌았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보인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술 앞에 손을 가져다 대자 입에서 카드가 와르르르 쏟아져 나왔다.
와아, 여기저기서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와, 저거 봐요. 신기하죠!”
이안의 어깨를 툭툭 치며 호들갑 떨자 그가 나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네, 그렇군요.”
그러는 사이 마술사는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성냥과 붉은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자아, 다들 눈 깜빡이지 말고 잘 보십시오!”
양손으로 손수건을 들고 휘휘 뒤집은 그가 성냥으로 불을 붙이자, 화르륵! 하고 손수건이 타들어 가면서 새붉은 장미 꽃다발이 나타났다.
“우와!”
한 송이도 아니고 꽃다발이 나오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개박수를 쳤다.
터져 나오는 함성에 만족스럽게 관객들을 훑던 마술사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오호, 작게 탄성을 뱉은 마술사가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 장미는 여기 아리따운 여성분께 드리죠.”
그가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저요?”
“받으시죠, 레이디.”
얼떨떨하게 꽃다발을 받아 들자 찡긋 윙크를 남긴 마술사가 다시 중앙의 무대로 향했다.
쇼맨십 봐라.
“꽃다발은 정말 오랜만에 받아 보네요. 신기하다.”
이안을 보며 자랑하듯 흔들어 보였다.
예상 밖의 선물에 신난 나와 달리 이안은 썩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왜 또 이래?’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꽃다발에서 장미 하나를 빼 그의 귀에 꽂았다.
그가 움찔했다.
“…뭡니까?”
“다들 웃고 있는데 혼자만 뚱한 표정 짓고 있잖아요. 표정을 풀든가, 아니면 이거라도 꽂고 있어요.”
“이걸 말입니까?”
이안이 나를 미친 사람 보듯 봤다.
아무리 그런 표정으로 봐도 지금 머리에 꽃을 단 건 너지 내가 아니란다.
흐흐, 음침하게 웃었다.
“팔찌 사 준 것에 대한 답례예요. 완전 잘 어울려요. 꽃미남 같네요.”
꽃 단 미친 남자.
속으로 간신히 폭소를 삼키며 어깨를 떨었다.
“빼면 안… 크흡.”
이안은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가출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어쩐지 진심이냐고 묻는 것도 같았다.
“대체가….”
그가 급격히 피곤해진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귀에 꽂은 꽃은 빼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데서 순순하다니까?’
사실 짜증 내면서 뺐어도 별말 안 했을 텐데.
그러는 사이 마술은 하이라이트 넘어가, 기다란 실크해트에서 토끼를 꺼내기 시작했다.
“슬슬 끝날 때가 되었나 봐요. 이제 가요. 다른 곳도 돌아봐야 하니까.”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좌판 몇 군데를 더 돌고, 이안이 싫어하는 솜사탕까지 사고 나자 주변이 어둑어둑해졌다.
어두워지는 조명을 올려다본 이안이 말했다.
“불꽃놀이가 시작될 모양이네요. 광장으로 가죠.”
“네. 근데 그건 언제까지 하고 있을 거예요?”
내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안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아직까지 그의 귀에 꽂혀 있는 장미를 가리켰다.
“꽃이요. 잘 어울리긴 하는데….”
“아.”
그제야 잊고 있었다는 듯 그가 착잡한 표정으로 장미를 빼냈다.
“아쉽네요.”
“전혀요.”
굳은 표정의 이안을 눈빛으로 놀려대고선 광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광장은 그리 멀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광장은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 사이로 끼어들어 자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펑!
퍼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 위로 형형색색의 불꽃이 터져나갔다.
처음엔 작은 불꽃이, 그다음엔 하늘을 전부 다 덮을 것처럼 거대한 불꽃이 터지더니 독특한 모양의 불꽃이 연이어 하늘을 수놓았다.
“와아….”
나도 모르게 감탄이 새어 나왔다.
한참이나 영롱한 하늘을 바라보다 고개를 틀어 이안을 쳐다보았다.
나처럼 구경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이안은 하늘이 아닌 인파의 어느 한 지점을 보고 있었다.
‘음?’
그 이유를 미처 묻기도 전에 이안이 예고 없이 자신의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뭐, 뭐예요?”
갑자기 왜 이래, 미쳤어?
나를 보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잠깐 이러고 있죠.”
“네?”
낮고 조용한 읊조림에 나도 모르게 음이탈이 났다.
‘진짜 미친 거야?’
그러나 그의 품을 빠져나오기에는 주변이 인파로 넘쳐나고 있는 데다, 나를 끌어안은 팔이 생각보다 더 단단했다.
“…저, 저기? 좀 살살….”
“쉿.”
쉿은 뭐가 쉿이야!
내가 진지하게 아까 억지로 먹인 솜사탕에 환각제 같은 게 들어 있었던 건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그가 나를 더 강하게 당겨 안고 인파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왜, 왜 그래요…?”
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조용히 말했다.
“…미행이 붙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