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 이후로 이어진 만찬은 무슨 정신으로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더부룩한 속을 끌어안고 꾸역꾸역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날 새벽, 결국 한참을 뒤척이다가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났다.
“하… 심란해.”
내가 엘로이즈에게 빙의하면서 원작과는 다르게 흘러갈 거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이런 식으로 빅 이벤트가 생길 줄은 몰랐다고.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새카만 하늘에 달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고요한 방 안에 내려앉는 푸른 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침대에서 내려왔다.
테라스에서 밤바람이라도 쐬어야지 이 복잡한 심경이 정리될 것 같았다.
비비가 아침에 걸치고 나오라며 의자에 걸어 둔 숄을 두르고 침실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안은 자나?’
냅다 거실 소파로 내쫓긴 했는데 막상 밤이 되니 신경이 쓰였다.
슬금슬금 발소리를 죽이고 거실의 소파 쪽으로 향했다.
“…진짜 자네.”
이안은 소파에 옆으로 누워 담요 한 장을 덮은 채 자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눕기에 비좁은 소파는 아니었지만, 널찍한 킹사이즈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나온 내 입장에선 양심이 살짝 찔려 왔다.
그래도 잘 자는 것 같아 다행이군.
잠을 안 자고 있었다면 정말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을 텐데.
먼 곳에서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소파 가까이 다가갔다.
잠든 이안의 맞은편에 조용히 웅크려 앉은 내가 그를 관찰했다.
‘잘생기긴 했어….’
긴 속눈썹 그림자가 뺨 위에 드리워져 아른거렸다.
푸른 새벽의 달빛이 내려앉은 옆태는 수려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이 안 됐다.
그 아래로 매끈하게 떨어지는 콧대와 유달리 붉은 입술은 꼭 조각을 한 것처럼 단정했다.
‘…어떻게 눈을 감고 있는데도 잘생겼을 수가 있지.’
만약에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다면, 이안의 외모를 아주 힘내서 빚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그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자는 사람을 훔쳐보는 취미가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요.”
별안간 그가 눈을 번쩍 떴다.
“흐아악.”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안이 또렷한 자청색 눈동자로 나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아, 안 잤어요?”
“잤습니다. 인기척이 들려서 깬 거지.”
심장이 반쯤 내려앉은 나와 달리 태연한 목소리였다.
‘…맞다, 이 인간 잠귀 밝기로는 대륙에서 제일이었지.’
황비 태생의 이안은 어릴 때부터 지겹게 암살 시도에 시달려 왔다.
덕분에 잘 때도 긴장을 놓지 않는 게 버릇이 되어, 낙엽 굴러가는 소리만 들려도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소파에 누운 그대로 주저앉은 나를 훑어보던 그가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어… 그게.”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침실에서 쫓아낸 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들여다봤는데 마침 자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잘생겨서 구경하고 있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한 박자 느리게 내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냥요, 잠이 안 와서. 아하하, 이제 다시 자야겠다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연기와 함께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안이 나보다 한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럼 바람 쐬시죠.”
“네?”
“잠이 안 오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침 저도 누구 때문에 잠이 다 달아나 버린 차라.”
내가 얼이 나가 반문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일어난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좋아하시는 바닷바람 맞으러 가자는 말입니다.”
“…정말 나가시게요? 이 시간에?”
진심이냐는 내 말투에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달이 밝은 걸 보니 날도 괜찮고, 날뛰는 파도에 쓸려 가시진 않겠네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조명 하나 없는 밖은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내려가는 길도 안 보일 텐데.”
저 그냥 들어가 자는 게 나을 것 같지 않나요?
온몸으로 말하는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소파에 걸쳐 둔 옷을 두른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방법이 있으니까.”
또 무슨 방법.
이안이 아직까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훑고서 말했다.
“옷 갈아입고 오시죠. 밤바다는 쌀쌀하니까.”
뭐… 뭐야?
***
얼떨떨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는 거실에 이안 말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붉은 머리가 반쯤 붕 뜬 카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자다 끌려온 몰골이었다.
“주군,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저 오늘 오전에 무려 사람 십수 명이랑 말 열 필, 마차 네 대를 운반했다고요. 와서도 내내 짐 정리만 하다가 이제 잠 좀 자려는데 이 새벽에 불러내시기 있습니까? 예? 제 워라밸 어쩌실… 아이고, 대공비 전하.”
눈썹을 팔자로 기울이며 이안에게 토로하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반갑네. 카일.”
“네,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주군, 진짜 이러실 거냐고요.”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번쩍 든 카일이 이안을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당장 해변에 쉴 곳을 만들라고 하는 악덕 상사는 주군이 유일할 겁니다. 자꾸 이러시면 저 그냥 확! 사표…!”
“이번 분기 성과금은 두 배로 주지.”
“…를 낼 리가 없죠. 암요. 주군께서 말씀만 하시면 제가 바로 뚝딱뚝딱 만들어 드릴 수 있지요.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제가 바로 이안 클라우드 대공의 충실한 개인 비서, 카일 엘제이어 아닙니까.”
헤실헤실 웃은 카일이 손짓 하나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일순 희고 푸른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밤바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짠기를 머금은 바람이 채 묶지 않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지나갔다.
‘와, 이게 되네.’
고개를 들자 깎아지른 절벽 위로 방금 전까지 우리가 서 있던 별궁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카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천이 너울거리는 작은 카바나와 티 테이블, 푹신한 소파와 은은한 조명을 만들어 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백사장 위에 나타나는 그것들을 보며 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수전노가 따로 없네.’
경이로울 정도의 태세 전환이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두 분 아주 보기 좋으십니다. 역시 데이트는 새벽이죠. 데이트 끝나면 부르십쇼.”
엄지를 척, 들어 보인 카일이 나타날 때와 달리 아주 깍듯한 태도로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이쯤에서 나는 카일이 여태 잘리지 않고 이안의 충실한 심복으로 일하고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필요하다고 새벽에 수하를 불러내는 이안이나 돈 준다고 냉큼 충성을 맹세하는 카일이나 아주 끼리끼리였다.
한편 사람을 부려 먹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한 이안은 태연하게 내게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예….”
이 시간에 카바나를 뚝딱 만들어 낸 이안을 낭만적이라고 해야 할지, 거기에 이용당한 카일의 처참한 워라벨을 동정해야 할지 헷갈리는 마음으로 어정쩡하게 의자에 앉았다.
쏴아아.
까만 어둠 속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선명했다.
“…….”
이안은 정말 ‘바람’만 쐬러 온 건지, 내 옆에 앉아 바다 쪽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그런 그를 흘끗거리던 내가 운을 떼었다.
“저어… 그, 아카데미로 향하는 일정이 어떻게 된다고 했었죠?”
“한 달 후입니다.”
“아하… 대공께서는 아카데미에 가 본 적 있으세요?”
“아뇨, 없습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말투가 기계적이었다.
‘이 인간을 어떻게 떠보지?’
다이아나에 대한 걸 떠보려면 질문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꺼내고 싶진 않았다.
한참 고민하고 있을 무렵 이안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하시죠.”
“티 났나요?”
“부인께서 아까부터 저를 계속 흘끗거리시는데 모르면 바보 아닙니까?”
쓸데없이 예리한 자식….
속으로 이안을 대차게 씹고서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아니, 뭐. 대공께서는 발이 넓으시니까. 그곳에 아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에둘러 꺼낸 말에 잠깐 미간을 좁히던 이안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 있긴 합니다.”
그 한 명은 분명 다이아나겠지.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한편 이안은 나를 무심하게 훑고서 다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마주칠 일은 없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만날 계획도 없고요.”
“…왜요? 아는 사람이라면서요. 그쪽에서 만나자고 할 수도 있지 않나요?”
내 뜸 들인 질문에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흐릿한 조명을 머금은 자청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쏴아아.
파도 소리가 침묵을 메운 끝에 그가 말했다.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