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나는 그 눈빛을 보며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이안과 내가 손잡은 모습을 보고 묻는 것도 민망했지만, 뒤따라 붙은 질문이 정말로 황당했다.
사귀냐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한참을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그, 황녀님. 일단은 부부인데요.”
“…….”
“…….”
“아.”
수 초 후에 황녀가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뭔데, 그 새삼 깨달았다는 반응은.’
어이가 없어지려던 차, 황녀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키득거렸다.
“아무튼.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 난 두 사람 응원해.”
‘저번부터 황제도 그렇고, 황녀도 그렇고….’
어쩐지 이안과 내가 이 가족들의 콘텐츠가 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
황녀와 머리를 맞댄 끝에 최종적으로 탄신연에 착용할 장신구를 정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다.
결국 하인이 만찬에 참석할 시간이라며 파우더 룸에 노크를 하고 나서야 이 기묘한 코디네이터 놀이가 끝났다.
황녀와 나란히 만찬장으로 내려갔을 땐 이미 황제와 황후, 이안까지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형 지각이었다.
황녀는 먼저 앉아 있는 윗사람들을 보고도 태연하고 뻔뻔하게 자리에 가 앉았고, 기겁한 나만 냅다 예를 갖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아하하, 괜찮네. 듣자 하니 루이사와 내내 놀아 주었다고 하던데. 이 아이가 귀찮게 굴지는 않던가?”
넉살 좋은 황제의 말에 루이사 황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폐하, 대공비도 재밌게 놀았거든요? 나랑 노는 거 좋아하거든?”
흥, 콧방귀를 뀌는 모습이 새초롬했다.
호칭만 폐하일 뿐, 깍듯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이 이안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따지자면 이안은 황녀에 비해 선을 잘 지키는 편이지.’
황제가 영 헛소리를 한다 싶을 때가 아니면 그래도 예의를 차례 대하니까.
“황녀의 놀이 상대가 되어 준 건 고맙네만, 남은 휴가는 이안이랑 시간을 좀 더 보내는 건 어떤가? 괜찮으면 산책이라도 좀 하고.”
언제는 황녀 보러 오라며.
아주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태도에 어떻게 장단을 맞출지 고민했다.
그사이 황녀가 냉큼 끼어들었다.
“폐하, 난 방해 안 했다? 두 사람한테 좋은 시간 보내라고 했는데 대공비가 따라온 거야. 그리고 아까 보니까 둘이 손깍ㅈ… 읍.”
“황녀님? 이만 앉으시죠.”
다급하게 황녀의 입을 막고 웃었다.
‘여기서 말했다가 무슨 눈빛을 받으려고.’
그러나 내 재빠른 대처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눈은 이미 미심쩍게 가늘어진 뒤였다.
“흐으으응.”
수상한 눈초리로 콧소리를 흘리는 황제의 얼굴이 익숙했다.
‘와, 황녀랑 똑같이 생겼어.’
둘이 판박이야, 뭐야.
“둘이 손…?”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도 전에 빠르게 부정하고 냉큼 이안의 옆에 착석했다.
나란히 앉은 우리를 흐뭇하게 보던 황제가 말했다.
“두 사람의 원만한 부부 생활을 응원하지.”
이 집 가족들은 유전자 검사 같은 거 안 해도 되겠다.
생긴 것부터 하는 말까지 똑 닮았으니까.
착잡함을 느끼고 있을 즈음 황제의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로 돌아갔다.
“아무튼,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노모스 제국 초청장 얘기까지 하셨습니다.”
“아, 그래. 아우가 돌아오는 여름에 비블로스 아카데미에 가 주었으면 해. 공식적으로 레반트 제국에 초청장을 보낸 만큼 우리도 성의를 보이는 게 좋겠지.”
조용히 수프를 떠 먹으려던 나는 하마터면 스푼을 놓칠 뻔했다.
재빠르게 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비블로스 아카데미요?”
내 다급한 물음에 황제와 황후, 이안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꽂혔다.
“아, 대공비는 듣지 못했겠군.”
식기를 내려놓은 황제가 말했다.
“노모스 제국에서 얼마 전 초청장을 보내왔어. 국립 비블로스 아카데미 100주년 기념으로 특별 강사들을 초대하고 싶다더군. 그래서 검술 강사로 이안을 추천했다네.”
다시 손에 힘이 풀려 스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테이블보에 닿기 전에 힘주어 잡았지만.
“…거기에… 대공을요?”
국립 비블로스 아카데미는 노모스 제국에서 세운 종합 교육 기관으로, 검술부터 마법, 음악, 체육, 미술까지 최고의 학생들을 뽑아 가르치는 명실상부 세계 제일의 아카데미였다.
비블로스 총장의 직인이 찍힌 졸업장 하나면 대륙 어디서든 쉽게 취업을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결혼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거나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평민들은 자신의 커리어에 한 줄을 긋기 위해 몇 년이고 아카데미 입학을 준비하곤 했다.
매년 전 세계에서 입학생이 몰려드는 최고의 학교.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 그 국립 비블로스 아카데미에.
‘다이아나가 있다고!!!’
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영원한 여주인공, 다이아나가 지금 비블로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다.
이안의 결혼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3개월간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린 끝에 당당하게 비블로스 아카데미의 미술 대학 의상 디자인 학과에 합격했다.
실연의 아픔을 겪는 와중에도 최고의 대학에 합격한 다이아나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아니, 지금 그게 포인트가 아니지.’
새삼 그녀의 멋짐에 감탄하던 내가 정신을 차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이 비블로스 아카데미에 간다니.
‘원작에선 이런 에피소드 없었잖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캠퍼스가 넓다지만, 이안이 그들의 초청을 받아 아카데미를 방문하면 그 사실이 분명히 아카데미 전체에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다이아나 귀에도 들어가겠지.
‘그러다 무방비한 상태로 둘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직 사람이 덜 된 이안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고!
거기까지만 생각했을 뿐인데 머리가 띵하니 아파 왔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어정쩡하게 쥔 수저를 고쳐 쥘 생각도 않고 냅다 던진 말에 모두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대공비 자네가?”
“부인?”
절대, 죽는 한이 있어도, 이안을 거기까지 혼자 보낼 순 없다.
나는 눈을 빛내며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였다.
“아, 그! 음, 저도 한번 가 보고 싶었거든요. 비블로스 아카데미는 명실상부 최고의 교육 기관이잖아요?”
얼렁뚱땅 둘러대는 말에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대공비 자네가 대학에 관심이….”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옆자리에 앉은 황후가 쿡쿡 옆구리를 찔렀다.
이어 황후가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자 그녀의 얼굴에 의뭉스러운 웃음꽃이 피었다.
이안과 나를 번갈아 보는 시선에 흡족함이 담겼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어쩐지 대차게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쯤 되니 해명할 기운도 없어 그냥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다.
“하긴, 그곳에 닷새는 머무를 테니 이왕이면 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부부가 함께 가는 게 좋겠지. 아, 이참에 관광도 할 겸 열흘 정도 머물렀다 오는 건 어떤가? 두 사람 다 바빠서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잖나.”
그 말이 갑자기 왜 나와. 하마터면 먹은 것도 없는데 뱉을 뻔했다.
“…신혼…여행이요?”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당혹스러운 나와 달리 황제는 이미 마음을 먹은 듯했다.
‘아니, 잠깐. 체류 기간이 늘어나면 이안 놈이 다이아나를 마주칠 확률도 높아지는 거잖아.’
식은땀이 흘렀다.
“그으,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만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실 필요는 없을 것….”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이 말허리를 자르고 즉답했다.
내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니, 너는 지금 내 편을 들어야지 왜 황제 말에 끄덕여?
다이아나는 그렇다 치고 나랑 단둘이 타국에서 열흘을 보내도 괜찮은 거야, 너는?
정작 내 시선을 고스란히 받은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아카데미를 돌아보실 거라면 일정이 넉넉한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비를로스 아카데미는 일주일 일정으로 견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체험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긴 하지만 너 지금 헛소리한다.
그러나 내가 반박하기도 전에 황제가 냅다 이안의 말을 받았다.
“부부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갸륵하고 돈독하군. 그럼 돌아오는 여름에 대공 내외가 함께 노모스 제국을 방문하는 것으로 하지.”
황제가 껄껄 웃었다.
내가 테이블 밑으로 허망하게 손을 툭 떨어뜨렸다.
‘혹시 내 무덤을… 내가 판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