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짧은 산책을 마치고 다시 별궁으로 돌아왔을 때는, 루이사 황녀가 로비에 쇼핑백을 한가득 늘어놓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자 고개를 돌린 황녀가 반갑게 손을 붕방붕방 흔들었다.
“어라. 오라버니, 대공비!”
반가움을 숨기지 않으며 그녀가 쪼르르 다가왔다.
“밖에 나갔다 오는 거야? 나도 지금 막 들어왔는데!”
그녀의 어깨 너머, 수북이 쌓인 쇼핑백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을 대동하고 나들이를 나가셨다더니, 즐겁게 보내고 오신 모양이네요.”
“응! 여기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상점 단지가 있거든. 관광지로 유명해서 그런가, 특이한 물건들이 많아.”
멋진 외출을 하고 온 듯 조잘거리는 황녀의 뺨의 상기되어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마음에 드는 게 있었거든. 보여 줄게.”
쇼핑백이 있는 쪽으로 우다다다 달려갔던 황녀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우다다다 돌아왔다.
“이거 봐, 예쁘지?”
그녀가 보여 준 것은 자개 공예로 만들어진 작은 장신구들이었다.
“조개껍데기로 만든 머리 장식이래. 엄청 특이하고 예쁘지 않아? 바닷가에서는 이런 것도 만드나 봐.”
이 세계에도 자개 공예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군.
“마침 잘됐어. 안 그래도 이거 대공비한테 보여 주려고 했는데. 지금 시간 남으면 나랑 같이 방에 올라가서 이거 고르고 놀….”
조잘거리던 루이사 황녀가 일순 무언가 발견한 듯 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나와 이안의 틈 사이로 고정되었다.
“황녀님?”
의아하게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나는, 바로 다음 순간에 그만 기절하고 싶어졌다.
아직까지 이안과 손깍지를 끼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탓이었다.
“엄마야.”
전기 오른 사람처럼 파드득 떨며 이안의 손을 뿌리쳤다.
이안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지만, 이미 우리를 보는 황녀의 눈길은 음흉해진 지 오래였다.
“흐으으응.”
“…황녀님?”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건 나 혼자 가지고 놀아도 될 것 같아! 암, 며칠 후면 나도 이제 열다섯 살인데, 언제까지 보모를 둔 것처럼 굴 수는 없지!”
‘방금 전만 해도 눈까지 빛내면서 같이 놀자며….’
몇 초 사이에 태세를 전환한 황녀를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나 신경 쓰지 마!”
히죽히죽 웃은 황녀가 나를 향해 찡긋 윙크해 보였다.
“자자, 얼른 올라가서 좋은 시간 보내라구!”
하하하핫!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면서 우리 둘을 어깨로 툭툭 떠미는데, 능구렁이도 그런 능구렁이가 없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아니, 황녀님….”
황녀는 내가 잡을 새도 없이 짐을 든 하인들과 함께 쪼르르 사라져 버렸다.
호탕한 그녀의 뒷모습이 어쩐지 황제와 겹쳐 보였다.
허망하게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다가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도 나만큼이나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황녀님이 참… 폐하를 닮아 호쾌하시죠?”
“굳이 포장 안 해도 됩니다.”
“남의 말 안 들으시는 것까지 황제 폐하를 똑 닮으셨어요.”
“예, 그런 편입니다.”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말에 동조했다.
이어서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지 말고 따라가 보지 그러십니까.”
“지금 황녀님을요?”
“방에 돌아가 할 일이라도 있으신 게 아니라면요.”
“딱히 할 일은 없긴 하지만….”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다시금 황녀가 올라간 계단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네요.”
혼자 뒀다가 또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칠지 두려워졌다.
…계속 손깍지 끼고 있던 게 어색했던 것도 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따 봐요, 대공.”
“네.”
이안의 단정한 대답을 끝으로 뒤를 돌았다.
어쩐지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오래도록 느껴졌다. 또다시.
***
이 층 침실에 도착해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와.”
조심스레 문을 열자, 거실 소파에 쇼핑백을 늘어놓고 개봉식을 하던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어라, 왜 왔어?”
“대공과는 충분히 시간을 보내서요. 황녀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올라왔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고개를 모로 기울이던 그녀가 흔쾌히 손짓했다.
“뭐, 이렇게 됐으니까 들어와.”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한 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보던 황녀가 음흉하게 중얼거렸다.
“기껏 보내 줬더니….”
“…….”
“뭐어, 어차피 밤은 기니까.”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황당하게 루이사 황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시치미를 뚝 떼며 으쓱였다.
“이리 와서 앉아. 안 그래도 방금 사 온 물건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거든!”
내가 이 층으로 올라오는 짧은 시간에 이미 개봉식을 거의 진행한 건지 낮은 거실용 테이블에 빈 쇼핑백과 종이박스가 수북했다.
“이건 구두점에서 산 거고, 이건 기념품 가게에서 팔던 가방인데 디자인이 특이해서 샀어. 예쁘지?”
황녀가 팔을 활짝 벌리며 자랑하듯 말했다.
“네, 황녀님의 안목이 어디 가겠나요.”
“크흠! 역시 대공비는 뭘 좀 안다니까. 아, 맞다. 이건 아까 대공비한테 보여 준 머리 장식들.”
어깨를 한껏 치켜올린 황녀가 테이블 위 쓰레기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들고 있던 장신구를 촤라락 펼쳤다.
전부 자개를 세공해 만든 장신구들이었다.
“예쁘지? 대공비랑 같이 가지고 놀고 싶어서 샀어!”
“이걸 저랑요?”
“응. 탄신연에서 입을 드레스가 희고 검은 드레스거든.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하고 가려구.”
이어서 황녀는 마담 제드가 만든 자신의 드레스가 얼마나 예쁘고 화려한지 장장 십 분에 걸쳐 설명했다.
“아무튼, 대공비가 센스가 좋잖아? 탄신연에 이 중 뭘 하고 가면 좋을지 대공비 취향을 좀 참고하고 싶어서 말이야.”
놀자는 게 임시 코디네이터가 되어 달라는 말이었구나.
“저야 영광이죠. 하나씩 순서대로 착용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내 선선한 답에 황녀가 반색했다.
“응! 대공비, 머리 만질 줄 알아?”
“전문가만큼은 아니지만, 간단한 머리 정도는 만질 줄 알아요.”
“잘 됐다! 그럼 지금 바로 파우더 룸으로 가자.”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린 황녀가 나를 잡아 이끌었다.
벽 쪽에서 기척 하나 없이 대기하던 하녀들이 장신구를 들고 조용히 우리 뒤를 따라왔다.
거울이 세 개 달린 화장대 앞에 도착한 황녀가 털썩 앉았다.
“물론 이 몸은 어떤 장신구를 해도 예쁘겠지만, 이왕 일 년에 한 번뿐인 탄신연이니까 최고로 예쁘게 보이고 싶어!”
거울을 통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했다.
조금 전 음흉한 표정을 지을 땐 열네 살이 아니라 사십 대 아저씨 같더니, 이럴 땐 또 소녀가 따로 없었다.
“그럼 한번 제 센스를 발휘해 볼게요.”
내가 팔을 걷어붙이며 장난스럽게 동조했다.
황녀와 함께 장신구를 바꿔 달며 시간을 보낸 지 얼마나 되었을까.
문득 황녀가 입을 열었다.
“대공은 대공비가 설득한 거지?”
뜬금없이 돌아온 질문에 다음 장신구를 고르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거울 너머로 나를 쳐다보던 황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가벼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라버니가 순순히 휴가에 동행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잖아. 다른 때 같았으면 들은 척도 안 했을 거라고.”
진짜로 그럴 뻔하긴 했지.
“저는 조금 거들기만 했고, 결정은 대공께서 하셨습니다.”
“언니, 아니, 폐하는 대공비를 인질로 잡았다고 그러던데?”
애써 포장하려고 했는데 황제가 이미 입을 털어놨구나.
내가 인질인 걸 순순히 인정한 황제나 그걸 듣고 아무렇지 않게 나한테 전달하는 황녀나 아주 쿵짝 잘 맞는 한 팀이 아닐 수 없었다.
“예, 뭐….”
결국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흐흐, 웃던 황녀가 코를 찡긋거렸다.
“사실, 그래서 대공비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
“…저한테요?”
“응. 오라버니랑은 내가 어릴 때부터 데면데면했거든. 폐하 말로는 내가 태어나기 전엔 제법 친한 사이였다는데, 내가 태어나고 난 뒤로 오라버니는 본궁에도 잘 안 오고 제2궁에서만 지냈어.”
“아.”
황녀와 이안의 나이 차이가 열 살이 훌쩍 넘으니까 그쯤이면 이미 대공 작위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겠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탄성을 뱉었다.
콧등을 긁적거리던 루이사 황녀가 해맑게 웃었다.
“그런데 대공비 덕에 오라버니가 내 생일을 축하하러 같이 와 줬잖아? 반쯤 대공비가 도와준 것 같긴 하지만 선물도 주고.”
헤헤, 부끄럽다는 듯이 웃는 황녀를 보다가 마음속으로 신랄하게 이안을 씹었다.
‘이런 귀여운 동생을 두고 할 말이 ‘쓸데없습니다.’밖에 없냐, 망할 이안 놈 같으니라고.’
“근데 말이야.”
한참 이안을 욕하고 있는데 황녀가 슬그머니 나를 훑었다.
자청색 눈동자가 음흉하게 빛났다.
“두 사람 진짜 뭐야? 왜 손을 그렇게 잡아? 둘이 사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