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76)화 (76/91)

76화.

이안의 손을 잡고 별궁을 나섰다.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하기에 절벽 쪽에서 길을 찾을 줄 알았는데, 그는 절벽이 아닌 반대쪽 숲으로 나를 이끌었다.

“대공, 바다는 저쪽인데요.”

내 손을 잡고 나란히 걷던 그가 나를 짧게 쳐다보았다.

“…어릴 때, 저 숲 입구 쪽에서 폐하와 함께 지름길을 찾아 뒀었습니다.”

오… 황제랑 같이?

“어릴 때는 사이가 꽤나 좋으셨나 봐요. 별궁에 와서 같이 지름길도 찾을 정도면.”

당연하게도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나를 성실히 이끌어 별궁의 맞은편 숲 입구까지 도달했다.

“잠깐 여기 계십시오.”

나를 남겨 둔 채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간 그가 수풀을 한 겹 걷었다.

그러자 곧 나뭇잎 사이에 가려졌던 길이 하나 드러났다.

길은 사람 두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폭으로, 경사가 완만했다.

아무래도 높게 솟은 절벽을 빙 둘러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로 보였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내가 고개를 들고 이안에게 물었다.

“여기예요?”

“예, 아직 있군요.”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알았대.

어쩐지 소설 속에서 짧게 스쳐 지나갔던 이안의 유년 시절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게로 걸어온 이안이 다시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중간에 잠깐 경사가 가파른 곳이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저 잘 걸어요.”

으쓱이며 손을 잡자, 그는 능숙하게 나를 이끌고 아래쪽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살짝 경사 있는 구간이 있긴 했지만 외출용 원피스를 입고 걷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편안한 길이었다.

그렇게 10분쯤 걷고 나자 내리막길이 끝나고 허리춤 정도까지 오는 낮은 관목들이 줄지은 출구가 나왔다.

“이쪽입니다.”

이안이 내 손을 가볍게 잡아당겨 낮은 나무들을 헤치고 길을 내었다.

동시에 내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건너편에 새하얀 백사장과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저 먼 곳에서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수평선이 뺨을 맞대고 있었다.

“바다다…!”

잡고 있던 이안의 손을 놓고 뛰는 듯한 걸음으로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낮은 구두 굽이 고운 백사장에 푹푹 빠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파도가 이는 곳까지 달려가자, 청량한 물소리가 귓가에 감미롭게 감겨 왔다.

새파랗고 투명한 바닷물은 꼭 에메랄드처럼 바닥을 다 비추고 있었다.

‘우와, 진짜 맑아.’

이런 건 사진으로만 봤는데.

정말 휴양지라도 온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들떴다.

한참 반짝이는 눈으로 바다를 쳐다보다 빙글 돌아 물었다.

“대공, 여기 사유지 맞죠?”

“황실의 소유냐 물으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좋아, 그럼 보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말이군.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냉큼 구두와 발목 스타킹을 벗고 맨발로 바다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부인?”

뒤에서 들리는 이안의 놀란 목소리에도 개의치 않은 채 파도를 밟으려던 순간이었다.

철썩!

빠르게 밀려간 파도에 모래가 쓸려내려 가면서 내 몸이 휘청였다.

“어어…!”

그대로 쓰러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고 없이 뒤에서 달려온 이안이 나를 와락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으악.”

순식간에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아왔다. 시야에 은색 머리칼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뒤늦게 그의 서늘한 체향이 밀려왔다.

졸지에 그의 품에 어정쩡하게 안긴 내 몸이 굳었다. 귀에 열이 확 올랐다.

“지금 뭐 하는…?”

“부인이야말로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안은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다.

덕분에 나는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그를 얼 나간 채로 쳐다보아야 했다.

“그, 그야… 발 좀 담가 보려고.”

“그렇다고 무작정 달려가시면 어떡합니까. 그러다 빠지면 어쩌려고요?”

“모래가 그렇게 갑자기 쓸려 내려갈 줄은 몰랐죠.”

“잘하는 짓이군요.”

한심스럽게 고개를 저은 이안이 나를 데리고 곧장 파도가 닿지 않는 백사장 쪽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쏴아아.

때마침 다시금 밀려온 파도가 내 발목까지 차올랐다가 쓸려 내려 갔다.

자연히 나를 안고 있던 이안의 신발과 바짓단도 전부 젖어 버렸다.

“…….”

“…….”

갈매기가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입을 꾹 다문 내가 눈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혹시 지금 저, 사과해야 하는 타이밍인가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묻자, 얼굴을 쓸어내린 이안이 나를 내려놓고 떨어졌다.

“…됐습니다, 다치지 않았으면 됩니다.”

그런 것치고는 급격하게 피곤해 보이는데.

어쩐지 저번 극장에서부터 그에게 은근히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튼, 깊게 들어가지 마세요. 물에 빠지면 구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제가 구하러 갈 때까지 부인이 가라앉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습니까.”

지금 그걸… 걱정이라고 하는 거야?

황당하게 쳐다보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린 듯 이안이 헛기침했다.

“…수영을 못하시니까.”

엘로이즈가 수영을 못했군.

“제가 수영 못하는 걸 용케 알고 계셨군요?”

“결혼 상대가 될 사람의 특이사항을 알아 두는 건 기본 소양입니다. 결혼 전 받아 본 자료에 물과 그리 친하지 않으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부인께 관심이 없었던 거지 기억력이 안 좋은 게 아니니까요.”

그동안 관심 없었단 얘기를 참 장황하게도 하는구나.

누가 공.주 아니랄까 봐.

어쩐지 그 말이 더 얄미웠다.

“예, 잘 알겠고요. 그보다 지금은 관심이 있으신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톡 쏘아붙이듯 묻자 이안이 멈칫했다.

“…….”

‘응?’

이번에도 ‘대체 뭔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같은 시선을 받을 각오를 했던 나는 도리어 당황했다.

야, 왜 부정 안 해?

이안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그저 갑자기 바다로 들어가시려는 줄 알고 놀랐던 것뿐입니다.”

“아, 그래요?”

뭐. 중요하지 않은 건 넘어가 주지.

“그보다 이제 대공도 신발 좀 벗어 보시는 게 어때요?”

“예?”

“어차피 젖었잖아요. 젖은 김에 같이 걷자고요. 이렇게 발 담그고 걸으면 좋거든요.”

그에게 보란 듯이 맨발을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달랑거리는 내 발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됐습니다. 위험하니 그냥….”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했다.

토요일이었다.

“주말이네요.”

그를 보고서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이안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벗으시죠, 신발.”

요새 내가 너무 풀어 줬지, 이 깡통 로봇아.

그가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교육의 일종이다?”

“따지자면요.”

건성으로 답해 주고서는 얼른 벗지 않고 뭐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턱짓했다.

권력 남용인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영 마뜩잖은 얼굴의 이안이 천천히 신발을 벗고 맨발로 섰다.

팔짱을 낀 채로 그것을 지켜보던 내가 선심 쓴다는 듯이 말했다.

“이쯤에서 얘기해 주는 건데, 사람들은 뭔가를 같이 해 주는 연인을 좋아해요. 보통은요.

검지를 펴서 그의 앞에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

“내가 바보짓을 할 때 옆에서 말리는 것보다는, 민망하지 않게 같이 바보짓을 해 주는 사람이 좋은 거라고요. 물론, 그렇다고 방금 전 제 행동이 바보짓이라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이 인간은 낭만을 몰라요, 낭만을.

쯧쯔 혀를 찼다.

“애당초 바보짓을 하지 않으면 될 일 아닙니까.”

“가끔 사람은 알면서도 멍청한 짓을 해 보고 싶어진다는 말, 못 들어봤어요?”

“못 들어봤는데요. 지어낸 거 아닙니까?”

쓰읍, 예리하기는.

눈썹을 능청스럽게 들썩이는 나와 달리 이안은 여전히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쏴아아, 물소리를 내며 파도가 밀려왔다.

흰 포말을 일으킨 파도는 이번엔 발등을 겨우 적시고 다시 쓸려 내려갔다.

발치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대신, 잡고 걸으시죠. 또 부인께서 휘청이실까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네, 뭐….”

오랜만에 사람들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적당히 거리두기 좀 하나 싶었는데.

이안의 눈길이 매서웠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올렸다.

그러자 이안은 평소처럼 살포시 내 손을 쥐는 게 아닌, 자신의 손가락을 엮어 단단하게 붙들어 잡았다.

별안간 손이 얽힌 내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넘어지실까 봐, 그런 겁니다.”

어쩐지 전해지는 손의 온도가 평소보다 조금 뜨거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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