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발코니에서 빠져나와 통창을 닫던 이안이 내 물음과 동시에 멈칫했다.
“…….”
그랬다.
이 화려한 스위트룸에는 침실과 욕실이 딱 하나씩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머리를 억세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한동안 정지되어 있던 이안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허공에서 당혹스러운 시선이 얽혔다.
“…….”
“…….”
우리 둘 다 그 자리에 굳어 멍하니 시선을 교환한 지 한참, 이안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일단은 부부니까요.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렇지.
보통의 부부라면 당연하게도 둘이서 한 침실을 쓸 것이다.
문제는 이안과 내가 보통의 부부가 아니고, 결혼 이래로 단 한 번도 동침을 하지 않은 막장 부부라는 점이었다.
그와 한 침실을 쓸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던 탓에, 잠깐 머리가 아찔해졌다.
‘삼 층에 다른 빈방이 분명히 있긴 하겠지만….’
황제 내외가 같은 건물을 쓰는 한, 각방을 쓴다는 소식이 알려졌다간 무슨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몰랐다.
‘그럼 정말 일주일 동안 이안이랑 한 침실에서 지내야 한다고…?’
방금 전까지 산뜻하니 아름다워 보였던 이 방이 흡사 지옥도처럼 느껴졌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이곳이 말이 방이지 거실과 작은 응접실, 서재까지 딸린 스위트룸이라는 점이었다.
그중 다행이지 않은 점은, 침대가 침실에 딱 하나만 있다는 점이었고.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정말 정신이 혼미해졌다.
물론 이안과 한 침대에 눕는다고 별일이 있겠나 싶지만, 애초에 동침을 한다는 게 문제였다.
“…한 침대…를 써야 하는 거죠? 대공이랑 제가?”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반쯤 얼이 나간 탓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나사 빠진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혼미한 상태를 알아차린 이안이 얼굴을 쓸었다.
“…불편하실 테니, 저는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그러면서 턱으로 거실의 소파를 가리켰다.
푸른색 벨벳 천으로 덮인 소파는 침대에 비해선 비좁지만, 딱 사람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여기서? 일주일 동안?’
내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동침이 불편하다고는 하지만 멀대처럼 큰 이안이 여기서 구겨 자는 모습을 생각하니 조금 안쓰러….
“그럼 그러실래요?”
…울 리가 있나!
당연히 바닥 아님 소파에서 자야지.
그래도 내가 여자인데 저기서 구겨 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레이디 퍼스트 정신이 있지.
“…….”
냉큼 눈을 빛내며 대답하는 내 모습에 이안은 잠깐 할 말을 잃은 듯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
네가 먼저 말 꺼낸 거다.
내가 먼저 말한 거 아니다.
나는 뻔뻔하게 이안을 향해 으쓱여 보였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예, 그렇게 하죠. 일주일이니까요.”
“오예.”
“…부인?”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신난다.
나는 저 드넓은 킹사이즈 침대에서 넓고 쾌적하게 자야지.
이안과 일주일 내내 한방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잠자리가 분리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럼 비비를 시켜 제 짐은 전부 침실에 들여놓으라고 할게요!”
홀랑 침실로 들어가 버리는 나를 보며 이안이 어쩐지 헛웃음을 친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독방 만만세다!
***
하인들이 짐을 정리하고, 이안과 함께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갔을 땐 황제와 황후도 환복을 한 상태로 나와 있었다.
외출을 하려는 건지 옷차림이 거창했다.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오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디 나가시나요?”
나와 이안을 발견한 황제가 반갑게 웃었다.
“아, 벌써들 내려왔군. 우리는 이제 막 근처의 에드워드 후작령으로 출발하려던 참이라서 말이야.”
“에드워드 후작령이요?”
에드워드 후작령이라면 이곳에서 마차를 타고 3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바다 근처 영지였다.
“에드워드 후작 내외에게 오찬 초대를 받아서 말이지.”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황제와 황후는 남부에 와서도 근처 영지에 방문하느라 바쁠 예정이라고 했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나와 이안을 흐뭇한 시선으로 번갈아 보던 황제가 눈썹을 들썩였다.
“우리는 자리를 피해 줄 테니, 이참에 두 사람도 좋은 시간 보내고 있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마음 놓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겠나?”
내 쪽으로 찡긋 윙크한 그녀는 이어서 이안을 탄식 섞인 눈빛으로 훑었다.
“보나 마나 이안 이놈은 바쁘다는 핑계로 항상 집무실에 처박혀 있었을 게 아닌가? 하여간 뻣뻣해서는.”
꼭 이안만 그런 건 아니고요, 저희 부부는 따로 일이 없으면 둘 다 각자의 집무실에 처박혀 있는 게 일상이랍니다.
그 말을 미처 황제 앞에서 할 수는 없었으므로 뻔뻔하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반면 이안은 어쩐지 자신만 콕 집어 맹비난을 당하는 상황이 영 불만인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 변화를 금세 알아챈 황제는 끌끌 웃으며 이안의 볼을 콕 찔렀다.
“내 아우는 이럴 때마다 참 귀엽다니까.”
“폐하.”
“우리 동생이 언제쯤 누님이라고 불러 줄지 기다려지는군.”
이안 나름대로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아무튼, 이참에 데이트라도 하게나. 이 주변에 볼거리가 아주 많다네. 특히 야시장이 아주 멋있어.”
이안에게서 손을 거두고 말하는 황제의 말투에 능글거림이 가득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이번 휴가는 황녀님의 보호를 위해 동행한 것이니 황녀님을 모시는 데 열중하겠습니다.”
내 공손한 대답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황녀는 이미 호위를 대동하고 나갔네만?”
“…예?”
“허허허, 황녀도 이제 올해로 나이가 열넷이고, 생일이 지나면 열다섯인데. 설마 혼자 나들이도 못 가겠나?”
태연자약하다 못해 뻔뻔한 말에 나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황녀 보러 오라며? 나를 따르니까 도움이 될 거라며?’
황당함에 기가 막혔다.
그런 내 표정을 모를 리 없는 황제는 나를 보며 넉살스럽게 윙크나 할 뿐이었다.
‘황제가 막 이렇게 대놓고 사람 낚고 사기 쳐도 돼?’
물론 처음부터 황녀는 핑곗거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별궁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뻔뻔하게 태세를 전환할 줄은 몰랐다.
슬쩍 이안을 보니 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초연한 표정이었다.
한두 번 당한 게 아니군.
이런 면에선 이들도 현실 남매와 그리 다를 바가 없다고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사이에 회중시계를 확인한 황제가 이러다 늦겠다며 잽싸게 로비를 나섰다.
두 사람이 우리를 등지고 사라진 뒤, 이안과 덩그러니 남은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건 뭐….’
꿔다 놓은 보릿자루냐고.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내가 멋쩍게 볼을 긁었다.
만약 여기가 대공저였다면 감사히 침실로 올라가 하루 종일 빈둥거렸겠지만, 애석하게도 여기선 이안과 한방을 써야 했다.
침실이야 내 차지이긴 해도 이안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경을 완전히 끌 수 있을 만큼 나는 낯짝이 두꺼운 사람이 되지 못했다.
‘빙의 이후에 이렇게 할 일이 없어진 건 또 처음이네….’
일단 밥때가 되었으니 밥이라도 먹어야 하나, 생각하던 중 이안이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주변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다짜고짜 먼저 제안한 것 치고 본인도 제법 어색한 얼굴이었다.
“산책이요?”
“황자 시절에 종종 방문하던 별궁입니다. 주변 지리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아.”
황실의 별궁이니 당연히 이안도 몇 번 와 보았겠군.
입을 몇 번 달싹이던 그가 조금 느리게 덧붙였다.
“…절벽 아래에 바다와 이어지는 모래사장이 있습니다. 지름길을 알고 있으니 바다를 가까이서 보시려거든 그쪽으로 가셔도 좋고요.”
…이 인간, 설마 내가 아까 바다 타령했다고 안 어울리게 내 취향 맞춰 주는 건가?
이안은 더 입을 열지 않고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진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