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10분을 더 달린 끝에 마차는 별궁 앞에서 멈췄다.
사실 별궁이라고 해서 작은 별장 규모가 아닐까 했는데 전부 내 착각이었다.
도착한 별궁은 대공저의 본관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안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저 멀리서부터 작은 인영이 우다다다 달려왔다.
“대공비!!!”
어김없이 요란하게 등장한 황녀가 우리 앞에 끼이익 멈춰 섰다.
“왔구나!”
“벌써 와 계셨네요, 황녀님.”
“응, 아침에 눈 뜨자마자 왔지.”
황녀가 나를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봐, 오늘 내 옷 예쁘지?”
그녀는 마담 제드가 만든 샛노란 드레스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모자는 저번에 이안과 내가 함께 고른 공단 리본 장신구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황녀의 뿌듯한 눈길이 우리 둘을 번갈아 향했다.
뽐내듯이 모자를 고쳐 쓴 황녀가 이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흠흠! 오라버니, 선물 잘 받았어.”
그제야 먼 곳을 응시하던 이안이 시선을 내려 황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쓴 모자를 천천히 훑고선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씨구.’
반응이 그게 전부냐.
좀 예쁘다고 해 주든가.
옆에서 표정을 있는 대로 찌그러뜨린 나와 달리 황녀는 이안의 반응이 제법 기꺼운 모양이었다.
빵실한 볼이 한껏 위로 올라가 동글동글해졌다.
“아주 마음에 들어!”
황녀가 보란 듯이 모자에 달린 장식을 한 번 흔들어 보였다.
물론 이안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지만.
‘인간아, 아까 출발 전 했던 반응의 반만 해라.’
그 어색함을 견디다 못한 내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팍 찌르려는데, 황녀가 한발 빠르게 내게 손짓했다.
“대공비, 잠깐 귀 좀.”
“예? 예.”
이안을 치려던 팔꿈치를 거두고 그녀에게 종종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발꿈치를 든 황녀가 내게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이 장식, 대공비 아이디어지? 마담 제드를 통해 보내 준 연락처도 잘 받았어.”
“아, 티가 났나요?”
“설마 작은 오라버니가 그랬겠어? 리본이랑 같이 주인장 이름이랑 주소를 보낼 센스를 가진 사람은 대공비뿐이잖아.”
티가 났군.
여기서 시치미를 떼는 것도 이상했으므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가 있으시면 연락해 보세요. 사람이 좀 투박하긴 해도 레이스 만드는 실력 하나는 끝내주던걸요.”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가 보려고. 고마워, 대공비.”
“뭘요, 제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 둘이서 한참을 속삭이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이안이 이쪽을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의 시선이 좀 더 못마땅해지기 전에 황녀가 냉큼 떨어져 웃었다.
“아무튼,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려요.”
“부탁은 무슨! 나는 나대로, 대공비는 대공비 대로 놀아. 옆에 대공도 있잖아?”
혀를 샐쭉 내민 황녀가 다시 우다다다다 본관 쪽으로 달려갔다.
기운 넘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이안에게로 돌아와 다시 가볍게 팔짱을 꼈다.
“우리도 들어가죠.”
***
본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황제와 황후를 알현하러 갔다.
“레반트 제국의 지고하신 첫 번째 태양, 엘리시아 카를로테 헬리오스 레반트 황제 폐하와 그의 반려이신 제국의 찬란한 달, 라일리 헤레미아스 게리언 레반트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이안과 내가 깍듯이 예를 갖춰 인사하자 황제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참, 여기까지 와서도 그런 틀에 빠진 딱딱한 인사인가?”
그러지 않으면 불경죄라서요.
턱까지 차오른 말은 생략하고 생글생글 웃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우리도 방금 왔다네. 하인들이 이제 막 짐을 풀고 있지.”
이안과 나를 번갈아 본 황제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쩜,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기쁘군!”
그러고는 나를 향해 찡긋 눈을 접어 보이는 게, 아무래도 내가 여기까지 이안을 데려온 것을 생각보다 더 기특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폐하, 두 사람도 이제 쉬어야 할 테니 인사는 이쯤 해 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렇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내려가서 쉬게. 대공과 대공비의 침실은 삼 층에 있으니 하인들이 안내해 줄 거야.”
“예, 폐하. 잠시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한 걸음 물러서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우리를 삼 층으로 안내했다.
황제와 황후는 사 층을, 나와 이안이 삼 층을, 황녀가 이 층을 통째로 쓰는 모양이었다.
“두 분께서 지내실 침실은 이쪽입니다.”
하인이 멈춰 선 곳은 삼 층 중앙에 있는 유독 큰 문 앞이었다.
그들이 문을 열자 맞은편 벽을 가득 채운 넓은 창과 발코니, 그리고 그 너머의 새파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탄성을 뱉었다.
“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지잖아!’
샌드위치 햄이 될 각오로 온 보람이 있었어!
나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러 밖으로 난 통창을 밀어 열었다.
유리창에 고여 있던 시원한 바닷바람이 앞다투어 밀려 들어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깎아지른 절벽 위,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청아하게 두드렸다.
“너무 좋다.”
한참이나 바닷바람을 만끽하던 내가 빙글 뒤를 돌았다.
어느덧 하인들은 방문을 닫고 사라진 지 오래였고, 하얗고 푸른 방에 이안만 덩그러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다가 아닌 나를.
‘저건 또 무슨 표정이야.’
어쩐지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처럼 뚱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못마땅한 것도 아니고.
‘요새 왜 저렇게 나를 자주 쳐다보는 거야?’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했으나, 마침 바다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시야를 어지럽게 가렸다.
결국 그를 관찰하는 건 포기하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손짓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대공도 이리 와서 좀 보시지 그래요? 여기 엄청 예쁘다고요.”
내 채근에 이안은 찰나 미간을 좁히는가 싶더니, 천천히 발코니 쪽으로 걸어왔다.
“바다를 좋아하십니까?”
“예쁘잖아요.”
세상에 바다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하루가 바쁜 현대인에게 시간을 내어 바다를 보러 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휴가라도 온 기분이라고!’
그러나 정작 이안은 나와 달리 무덤덤하다 못해 감흥조차 없는 얼굴이었다.
내 옆에 나란히 선 그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설마 바다를 보면서도 ‘뭘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파랗군요.’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로 묻자 입을 살짝 벌렸던 그가 꾸욱 입술을 닫았다.
정곡을 찔렀군.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인지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그를 탐탁잖게 위아래로 훑어보고 다시 바다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아까 마차 안에서 보았던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이곳에서는 더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튼, 여기 머무는 일주일은 눈이 심심하지는 않겠어요.”
매일 아침 이 넓은 창으로 바다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니.
생각만 해도 좋았다.
브릴루즈 공작 부인 대신 황녀를 보호 차 살피는 일이라고는 해도, 유모처럼 하루 종일 따라다닐 필요는 없을 테고.
대공저의 업무도 전부 처리해 놓았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놀아 줘야지.
바다만 보고도 기분이 풀린 나는 이안을 발코니에 두고 나와 콧노래를 부르며 방 곳곳을 살펴보았다.
별장이라 그런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하기보단 시원하고 편안한 느낌의 인테리어였다.
중앙엔 통창을 둔 거실이 있었고, 거실의 양옆으로 침실과 응접실, 서재가 있었다.
한참을 뽈뽈 돌아다니다가 욕실 문을 연 내가 작은 탄성을 뱉었다.
“오.”
욕실에도 바다 쪽으로 난 통창이 있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바깥을 볼 수 있는 구조인 게 마음에 들었다.
‘이따 비비한테 거품 목욕을 준비해 달라고 해야겠다.’
만족스럽게 히죽히죽 웃으며 욕실 문을 콩 닫고 나와 이번에는 침실로 향했다.
“와아, 침실이 제일 예쁘네.”
휴양지답게 메인이 되는 방은 전부 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이었다.
특히나 침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침대는 하얀 시트 위에 푸른 천을 덧대고 하늘하늘한 캐노피를 달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만족스럽게 침실을 벗어나 다시 거실로 돌아온 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이제 막 발코니에서 들어오는 이안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잠깐….
근데 이거….
“우리, 한방 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