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안과 염병 첨병을 떨어 댄 효과는 대단했다.
원래부터 광장에 있던 사람들 뿐 아니라, 광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사람들까지 슬금슬금 다가와 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쪽을 힐끗대는 구경꾼이 많아질수록 나는 이안의 팔에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보란 듯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대공, 마차를 타고 와서 그런지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네요….”
튼튼한 두 다리를 휘청이며 매달리는 건 덤이었다.
그리고 평소라면 그런 나를 질색하며 쳐다보았을 이안은 오늘따라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일어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만 보자… 근데 이제 뭘 한담.’
그의 품에 뻔뻔하게 기대어 슬쩍 눈을 굴렸다.
소식지를 보고 열이 올라 냅다 끌고 온 거긴 한데, 이다음에 뭘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다.
쇼핑은 이미 많이 했으니 다시 써먹기는 진부하고, 아직 밥때는 많이 남았고, 그렇다고 아무 목적지도 없이 광장에서 내내 배회할 수는 없고.
심각하게 고민에 잠겨 있을 즈음 날 빤히 쳐다보던 이안이 물었다.
“가고 싶은 곳은, 없으십니까?”
있으면 이러고 있겠냐.
고개를 들고선 대답 대신 눈만 과장되게 깜빡였다.
내 가증스러운 표정을 본 그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나밖에 보지 못할 작은 변화였다.
‘음, 공.주 맞군.’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굴길래 이 인간이 정말 뭘 잘못 먹었거나 공.주의 가죽을 뒤집어쓴 사특한 무언가인가 했는데, 느껴지는 잔잔한 싸가지를 보니 확신이 생겼다.
그러는 사이 흘끗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한 그가 말했다.
“공연 좋아하십니까?”
“공연이요?”
“연극이나 오페라요.”
갑자기?
“좋아는… 하죠?”
대한민국에 살 때도 종종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러 다니긴 했다. 비싸서 자주는 못 봤지만.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끄덕였다.
“그럼 보러 가죠. 이 근처 대극장에서 삼십 분 뒤 공연이 있습니다. 유명한 극단이라고 하더군요.”
“예?”
삼십 분이요?
이번엔 정말 얼떨떨한 표정으로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내 눈빛을 읽기라도 한 건지 이안이 날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너 나랑 같이 나와서 내내 붙어 다녔잖아.
‘로저 공작도 그렇고, 이안도 그렇고. 뭐 이렇게 우연이 많아?’
헤이든 로저 공작은 우연히 운 좋게 예약이 빡빡한 식당을 잡질 않나, 이안은 우연히 대공연장의 공연 일정을 알지 않나.
그를 빤히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준비하는 그 한 시간 사이에 공연을 알아본 건 아니겠지?’
의심이 고개를 들던 것도 잠깐, 빠르게 털어냈다.
이 인간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수고로운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저는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어쨌든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 드넓은 광장에서 언제까지고 멀뚱멀뚱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내 선선한 동의가 떨어지자 그가 나를 극장으로 이끌었다.
극장은 대광장에서 도보로 오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유명한 극단이라는 이안의 말이 틀리지 않은 듯 대극장 근처부터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대공과 내가 팔짱을 낀 채로 등장하자 그 많은 인파가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 저기 봐요.”
“설마 대공이랑 대공비예요?”
“아리아 소식지 의견란에서 떠들던 것과는 다른데요? 대공비가 로저 공작이랑 묘한 사이라더니.”
“그러게요, 그건 또 아닌가 봐요.”
수군수군 들려오는 목소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지.
그러나 정작 이안은 수군거림 같은 건 처음부터 안중에 없는지 곧장 입구로 향했다.
‘가만, 근데 표가 있나?’
잠깐 고민했지만 쓸데없는 일이었다.
이안과 나를 발견한 직원이 헛숨을 들이켜고선 버선발로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손목에 달린 마법 통신구로 신속하게 상황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클라우드 대공 전하, 그리고 클라우드 대공비 전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 이제 이 폴더 인사에도 조금 익숙해지려고 해.
내가 잠깐 회의감을 느끼는 사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목을 가다듬은 직원이 이안에게 말했다.
“전달 받, 아니… 저희가 알아서! 좌석을 준비해 두었으니 이쪽으로 오시죠.”
연거푸 허리를 숙이며 횡설수설 말을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살짝 눈썹을 일그러뜨렸던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가시죠.”
“아, 네.”
우리는 굽실거리는 직원을 따라 대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세 걸음 앞서 걷던 직원은 빠르게 2층으로 올라가 복도 한가운데 있는 커튼을 걷었다.
안쪽엔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프라이빗한 박스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쪽이 두 분의 지정석입니다.”
“오….”
말로만 듣던 발코니석.
그러고 보니 이 시대엔 귀족들이 아예 자리를 사 놓고 보고 싶을 때마다 방문해서 공연을 보았다는 얘길 들은 것도 같았다.
‘처음부터 표는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조용히 커튼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발코니석에는 두 사람이 딱 알맞게 앉을 수 있는 크기의 소파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따로 앉는 게 아니었어?’
심지어 2인용 치고는 의자 폭이 좁았다.
아까 사람들 앞에서는 얼굴에 철판도 깔 수 있었는데.
이 좁은 공간에서 팔걸이도 없이 이안과 나란히 앉을 생각을 하니 아찔함이 먼저 찾아왔다.
이안도 이건 예상하지 못한 듯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음….”
난감하게 눈을 굴리던 것도 잠시, 두어 걸음 뒤에서 우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하인을 보고선 생각을 고쳐먹었다.
“앉죠.”
지금 어색한 게 문제냐.
바깥에선 다 로저 공작이랑 나를 엮지 못해 안달인데.
내 결연한 표정을 의아하게 보던 이안은 곧 상황을 읽은 듯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밖에선 잘만 하더니 왜.
나는 먼저 의자에 척, 앉아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앉으시죠, 대공.”
한번 두 시간 동안 비좁은 박스석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어 보자고.
“…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인지 대답인지 모를 답을 한 이안이 내 옆에 약간의 틈을 두고 앉았다.
그리고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생각보다… 더 가깝잖아?’
좁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건 둘 중 한쪽이 조금만 움직여도 어깨가 닿을 거리였다.
‘돈도 많으면서 의자를 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건데…!’
물론, 어둡고 조용한 극장에서 만남을 가지는 여느 귀족들을 위해 굳이 이렇게 만든 걸 알고 있었지만, 내겐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실수로라도 이안 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즈음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음료와 다과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드시고 싶은 걸로 고르시죠.”
“음….”
나 보지 마, 고개도 돌리지 마.
어깨를 한껏 접어 이안에게서 떨어지며 메뉴판을 훑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뭘 먹어도 입에 안 들어갈 것 같긴 하다만….
“그냥 간단한 다즐링 홍차로 주게. 타르트도 몇 개 주고.”
“예,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하인이 멀어지고 나는 서둘러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자꾸만 의식되는 옆자리 이안에게서 신경을 끄기 위함이었다.
팸플릿의 첫 장에 오늘의 공연 제목이 적혀 있었다.
〈저주받은 왕녀와 불멸의 기사〉
‘제목을 보니 사랑 이야기겠군.’
뒷장에는 이안의 말대로 유명 오페라 극단이 제국 전역 순회를 마치고 수도에서 마지막으로 올리는 공연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팸플릿을 유심히 훑고 있을 때쯤 자리를 비웠던 하인이 트롤리를 끌고 돌아왔다.
“주문하신 다즐링 홍차와 과일 타르트….”
그 순간이었다.
순간 휘청인 하인의 손에서 티팟이 미끄러졌다.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펄펄 끓는 홍차가 내 쪽으로 쏟아졌다.
“잠깐…!”
내 쪽으로 끼얹어질 홍차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촤악.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도 뜨거움이 느껴지기는커녕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라…?’
이윽고 슬그머니 눈을 뜬 나는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