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문고리를 잡은 채 어정쩡하게 서서 물었다.
“…뭐 하세요?”
“무엇을요.”
“방금 뭐 보고 계셨잖아요.”
“…오늘까지 처리해야 하는 이번 분기 영지 보고 자료를 보고 있었습니다.”
“표지가 분홍색이었는데?”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칼같은 반문이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무뚝뚝하다 못해 기계 같았다.
“계속 그러고 계실 겁니까?”
“아.”
그제야 문고리를 놓고 몸을 바로 세웠다.
뭐지? 너무 당당한데.
잘못 봤나?
분명 방금 떨어진 책이 내가 서점에서 사 온 연애백서랑 비슷한 표지였던 것 같은데….
‘하긴, 이안이 그런 걸 볼 리가 없지. 쓸데없다면서 전부 폐기해 버리면 몰라도.’
이안이 연애 서적 같은 걸 들여다본다니, 다이아나의 독신 선언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신을 차리고 음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벅저벅 이안의 집무실을 가로질러 책상을 탕, 소리 나게 내리쳤다.
“저희 데이트하죠.”
그는 데이트 신청을 무슨 결투 신청처럼 비장하게 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눈이 이글이글 불탔다.
“보아하니 안 되겠어요. 해이해진 사교계 가십에 기강을 잡아 줘야겠다고요.”
“해이해진… 기강이요.”
이안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표정도 익숙했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자세한 건 몰라도 돼요. 난 지금 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실은 소식지와 그 구독자들의 머릿속에 제대로 내 입장을 박아 넣어 줄 생각이라고요.”
이안 클라우드는 최고의 신랑감이 되어서 다이아나랑 결혼할 거다, 이 뻑킹 귀족들아.
“미안하지만 이번엔 거부권 없어요. 대공의 교육자로서 하는 통보이니 순순히….”
“그렇게 하죠.”
“에?”
준비한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책상을 정리했다.
뭐야, 아깐 비뚤어져 있더니 이번엔 왜 또 이렇게 순순해?
도리어 얼떨떨해진 건 나였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문득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번에도 ‘연습’입니까?”
“네?”
“연습인지, 진짜 데이트인지 여쭈었습니다.”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따지자면… 연습보다는 그냥 데이트…겠죠?”
이번엔 딱히 이안의 정신머리를 고치러 가는 건 아니니까.
그가 끄덕였다.
어쩐지 아까보다 조금 흔쾌한 태도였다.
“이만 일어나죠. 준비는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지금요?”
난 이번 주 주말에 나가자는 거였는데.
갑자기 이유 모를 급발진을 보여 주는 이안을 얼빠진 채로 쳐다보았다.
정말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 그가 나를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문제 있습니까?”
…아니, 문제는 없는데.
방금 오늘까지 처리해야 하는 문서가 어쩌고 하지 않았나?
의문이 생겼지만 서늘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왔다.
‘…뭐, 나야 좋긴 하지만.’
이런 소문은 빨리 잡아 줄수록 효과적이니까.
“그럼 한 시간 후에 일 층 로비에서 만나요.”
***
시간에 맞춰 로비로 나왔을 때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채비가 한 시간 정도 걸린다기에 적당히 외출복을 주워 입고 오겠거니 했으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뭔데, 왜 저렇게 힘을 준 건데?’
잘생겨도 너무 잘생긴 인간이 로비 한가운데에 떡하니 서 있었다.
머리의 반을 깔끔하게 정리해 넘기고, 아이보리색의 산뜻한 여름용 정장을 입은 이안은 평소보다 두 배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선뜻 다가가기가 망설여질 정도였다.
“음… 대공?”
“오셨군요.”
머뭇거리며 다가가자 그가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네.’
어쩐지 황제의 초대를 받아 황성에 갈 때보다 더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설마….’
“이번에도 ‘연습’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살살 털었다.
이 깡통 로봇이 갑자기 빙글 돌아버린 게 아닌 이상, 진짜 데이트라면서 차려입고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근데 그럼 아까 그 말은 무슨 의미였던 건데?’
한 박자 느리게 의문이 서렸다.
그러나 내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나를 정중하게 이끌었으므로, 내 얄팍한 사색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모시겠습니다.”
“…어? 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무언가를 보여 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비장해진 나와 그런 나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이안 때문이었다.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뇨.”
“근데 왜 아까부터 그렇게 보세요?”
평소였으면 마차에 탄 직후부터 눈이나 감고 있었을 이안은 내게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깊게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물음에 잠깐 고민하던 그가 눈을 느른하게 감았다가 떴다.
“제가 데이트 상대인 제 부인을 들여다보는 것에 사유까지 있어야 합니까?”
“아니….”
또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서 반박이 안 나왔다.
평소에 안 그랬던 인간이 그러니까 당황스러워서 그러지.
그러나 아무래도 이안은 내 의문을 해소해 줄 답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쯤 다시 그의 입이 열렸다.
“…드레스가.”
내 드레스가 왜.
진짜 뭐 묻었나? 오늘 일부러 산뜻한 연보라색으로 챙겨 입었는데.
드레스를 확인하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내렸으나 곧 그 행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오늘따라 예뻐서요. 꼭 수국처럼.”
우뚝.
내 몸이 굳었다.
한참 지난 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의 이안은 나를 피하지 않은 채 또렷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요?”
“수국 같다고 했습니다.”
순식간에 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진짜 이상하잖아!’
***
그 이후엔 어떤 정신으로 마차를 타고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이안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다.
마침내 가장 북적거리는 ‘레반트 대광장’에 도착했을 때 이안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살포시 잡고 마차 바깥으로 나오자, 순식간에 쏟아지는 시선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거지.’
나와 대공을 보고 저마다 쑥덕거리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훑어보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심전력으로 다정한 연기를 해 줄 테니 두 눈 딱 뜨고 봐라.’
내가 어떻게 키워놓은 이안인데, 고작 헤이든 로저 공작과의 말 같지도 않은 스캔들로 수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보란 듯이 이안에게 착 달라붙어 팔짱을 끼며 웃었다.
“대공, 날씨가 너어무 좋네요. 이런 날 데이트라니! 바쁘신 와중에도 저와 시간을 내어주신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장담하건대 내가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나는 연예계 데뷔 후 여우주연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눈을 한껏 접어 내리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울 정도였다.
이 정도면 이안이 조금 뻣뻣하게 굴어도 적당히 참작되겠지.
돌아올 이안의 경멸 어린 시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인지 그의 반응이 예상한 것과 달랐다.
살짝 굳은 듯이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조금 몸을 밀착해 왔다.
“네, 저도 그렇습니다.”
…응?
내가 미처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의 팔이 내 허리를 능숙하게 당겨 안았다.
몇 주 전 함께 번화가에 왔을 때 지겹게 잔소리를 해도 쓸데없는 짓이라며 호응하지 않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허리를 감싼 단단한 손길에 도리어 굳어 버린 건 나였다.
“…대공?”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시다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그는 뻔뻔하리만치 태연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인간 공.주 맞아?’
설상가상 아까부터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시선들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당황하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정신 차려, 엘로이즈.
이 인간이 무슨 심경 변화를 겪는 건진 몰라도 여기 휘둘릴 여유가 없다고.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자기최면을 걸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참, 대공도. 저는 대공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은걸요!”
주변에서 경악에 찬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