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68)화 (68/91)

68화.

카일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표현이라는 걸 해 보십시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이제 인정하실 때가 됐습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선 물었다.

“소식지, 신경 쓰이시죠?”

“…….”

“대공비 전하와 로저 공작이 엮이는 것도 거슬리시고요.”

“…….”

“거 보십쇼.”

쯧쯔, 그가 혀를 찼다.

“부디 노오오력 좀 해 보십시오. 그러다가 정말 뺏기십니다? 저는 경고했습니다?”

카일의 말에 이안이 불쾌한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헛소리는 그쯤이면 됐다, 카일 엘제이어.”

“허어….”

“되었으니 나가 봐라.”

단호한 축객령에 카일이 혀를 내둘렀다. 어째 또박또박 풀네임을 부른 걸 보니 이쯤에서 퇴장해야 할 타이밍인 듯했다.

“예, 뭐. 거기 자료 두었으니까 보시고요. 전 이만 갑니다.”

불똥이 튈세라 재빨리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카일을 이안이 건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카일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가 이마를 짚었다.

“…피곤하군.”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에 신경을 쏟은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마를 짚고 서류를 훑던 이안은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덮었다.

‘머리를 좀 식혀야겠어.’

그가 향한 곳은 3층 동쪽 날개 끝의 도서관이었다. 이안은 생각이 복잡할 때면 도서관을 찾아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버릇이 있었다.

덕분에 대공저의 도서관은 황실국립도서관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책장 사이를 천천히 지나다니며 책을 고르던 이안이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대공비가 사 온 책도 이즈음 있던가.’

이안은 두어 달 전 엘로이즈가 품에 잔뜩 안고 들어온 책들을 떠올렸다.

사춘기 영애들이나 볼 법한 수준 낮은 연애 서적들이었다.

거들떠볼 일 없는 책이 왜 하필 지금 생각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부디 노오오력 좀 해 보십시오. 그러다가 정말 뺏기십니다? 저는 경고했습니다?”

왜 또 그 말이 생각나는 건지.

하여간 하나 있는 수족이라는 놈은 이런 식으로 제 주군 속을 뒤집어야만 속이 풀리는 건지.

‘뻔한 헛소리지만.’

무시하자니 계속 신경을 갉작였다.

카일 엘제이어는 말 한 마디로 사람을 거슬리게 하는 기묘한 재주가 있었다.

제자리에 서서 잠깐 고민하던 이안이 반대편 책장으로 향했다.

엘로이즈가 사 둔 책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책장의 맨 끝 구석, 제대로 정렬도 되지 않은 채 한 뭉텅이째로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분홍색으로 범벅된 책 표지는 어찌나 자기주장이 넘치는지 그냥 지나치려도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맛살을 찌푸리던 이안이 그중 하나를 책장에서 뽑아 들었다.

“…….”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히 엘로이즈가 사 온 책이 맞을 텐데, 자세히 보니 영애들이 보는 서적이라기엔 제목이 조금 이상했다.

〈여자에게 사랑받는 남자!〉

…대공비가 사 온 책이라면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 쪽이 맞지 않나?

빤히 제목을 들여다보던 그가 책장을 다시 훑었다.

이제 보니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죄다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100가지 비법〉 따위의 제목뿐이었다.

“대체 이건 또 무슨….”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리던 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그가 손에 든 책을 펼쳐 들었다.

〈첫 번째. 그녀를 리드하세요. 연애는 적극적인 구애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녀의 마음을 진정 사로잡고 싶다면, 한 발 앞장서서 그녀를 이끌어 보세요! 단, 너무 서두르면 그녀를 놓칠 수 있으니 적당한 속도 조절이 필요합니다.〉

“…….”

팔락, 팔락.

몇 장을 더 넘겨 보았다.

그 뒷장에도 비슷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녀를 보며 다정하게 웃어 보라든가, 칭찬을 건네라든가, 매너를 보여 주라든가.

어째 아까 집무실에서 신경을 살살 긁던 카인 엘제이어의 말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이러면 꼭 그놈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

불만스러운 눈으로 본문을 읽어 내리던 이안이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별소리를 다 적어 놨군.”

***

“으악! 별소리를 다 하네 진짜!”

으아아악! 음소거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옥 같은 아침 식사가 끝난 뒤, 나는 곧장 방으로 뛰어 들어와 미처 다 읽지 못한 소식지를 읽는 중이었다.

차분히 앉아서 읽은 소식지는 정말 가관이었다.

나와 로저 공작을 적폐 수준으로 엮어 둔 본문은 그렇다 치고, 그 아래 달린 의견란의 댓글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게 익명의 무서움이야? 그래?”

그래도 아까 아침에 슬쩍 보았을 땐 로저 공작과 나의 식사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는데, 이제 본문은 뒷전이고 저들끼리 이안과 로저 공작을 카테고리별로 비교해가며 논쟁하는 중이었다.

결혼 상대로는 클라우드 대공이 나을지 몰라도 연애 상대로는 로저 공작만 한 사람이 없다, 그 미소를 봐라 나라도 구할 상이지 않느냐, 아니다 나라 하나를 말아먹을 절세가인이다….

‘미친 거 아냐?’

“이거 귀족들 맞아?”

어째 고상한 척하는 인간들이 익명의 가면 뒤에서는 더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소식지 1면에 적힌 의견 대부분이 로저 공작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쏠려 있다는 점이었다.

“안 돼! 내가 어떻게 이안 놈 이미지 메이킹을 해 뒀는데!”

물론, 이안이 개차반인 것도 맞고!

대공 직위나 소드마스터라는 타이틀 빼면 썩 매력 포인트를 모르겠는 것도 맞는데!

그건 나니까 깔 수 있는 거고.

얼굴 모를 귀족이 이안을 까대는 건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였다.

‘이안은 다이아나의 미래 신랑감이라고!’

이대로 눈 뜨고 코 베일 수는 없었다.

나는 괴롭게 머리를 쥐어뜯던 것을 멈추고 전투적으로 메모지와 깃펜을 들었다.

-그래도 역시 승자는 클라우드 대공 아닌가요? 원래 나쁜 남자가 나한테 다정하게 굴 때 더 매력 있잖아요.

이럴 땐 여론 조작이지.

스스로 이 추잡한 논쟁에 뛰어든다는 사실에 문득 자괴감이 고개를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댓글이 의견란에 올라가자 슬금슬금 동의한다는 의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건 그래요. 역시 수도에는 클라우드 대공만 한 분이 없으시죠.

-하긴, 저번 시즌 파티 때도 등장이 남달랐잖아요. 대공비 손등에 키스하는 모습 보고 뒤로 넘어간 여자들만 한 무더기일걸요?

-헉, 사실 저도요.

-외간 남자 보고 설레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네요.

-그 손등 키스 한 번만 받아 보면 소원이 없으련만!

-아서라, 대공비가 떡하니 지키고 있는데 무슨 소릴.

-문지기 있다고 문 통과 못 하나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대공비 전하도 이 소식지 보신다던데요?

-방금 쓴 의견 삭제하는 법 아시는 분?

아냐, 아냐.

더 해.

아주 이안을 수도 최고의 핫가이로 만들어 버려.

뿌듯하게 턱을 괴고 구경하고 있던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은근슬쩍 반박이 하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대공비라면 클라우드 대공보다는 로저 공작이 더 좋을 듯. 대공이랑 결혼하고 한동안 바닥으로 처박혔던 평판 기억 안 남?

-그거 오해였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쨌든 그런 소리가 돌았던 건 맞잖아요. 그리고 로저 공작이 보통 여자 마음을 잘 아나요?

-하긴, 아무리 대공비라도 상대가 로저 공작인데. 아무런 감흥이 없진 않았겠죠.

-맞아요, 그리고 익명이니까 하는 말인데 어떤 여자가 마음에도 없는 남자랑 오붓하게 식사를 해요? 그것도 그런 레스토랑에서.

-저는 하는데요? 들어보니 로저 공작이 상의 없이 데려간 것 같다드만.

-혹시 로저 공작 추종자세요? 질투하시는 것 같은데.

-역시 로저 공작 쪽이 더….

아니, 잘 나가다가 왜 또 헤이든 로저가 나와. 이안 이야기를 하라고!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여론은 로저 공작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고작 식사 한 번 한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부풀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하아….”

고개를 푹 숙이고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얼마나 공들여서 이안 클라우드 놈을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 놨는데….”

머리를 팍 쓸어 넘기며 튕기듯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둘 순 없지.”

그대로 침실을 벗어나 전투적인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랐다.

삼 층의 집무실에 도착해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대공! 저희 데이트하죠!”

예고 없이 쳐들어온 내 행동에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심각하게 보고 있던 이안이 움찔 떨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분홍색 표지의 무언가가 책상 아래로 툭, 떨어졌다.

“…대공?”

너 지금 뭘 보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