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누군가 정성 들여 선물을 준비하는데, 그에 화답해서 작은 선물로 돌려주는 게 어떻게 쓸데없는 일이에요?”
“…….”
“받은 만큼 주는 거잖아요, 그냥.”
이안은 감정이나 친애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느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할 수 없음과 하지 않음은 큰 차이가 있다.
과거의 편린에서 이어져 온 행동이라고는 하나, 이안이 스스로 그것을 깨닫기까지 다이아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건 변함이 없다.
나는 가능하다면 그가 그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통감하길 바랐다.
“솔직히 대공께서 왜 그러시는지 대충은 알겠는데요. 황제 폐하도, 황녀님도 생각보다 당신을 좋아하세요.”
“…….”
“그러니까 너무 애써서 멀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정갈하게 놓인 행커치프 한 구석, 이안의 이니셜이 적힌 부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이유 없이 상처 준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당신을 이유 없이 사랑해 준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것도 아주 맹목적으로.
고작 이안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 하나로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바라보았던 다이아나를 떠올렸다.
이안의 모친인 전 황비는 그를 이유도 없이 상처 냈지만, 반대로 다이아나는 그를 이유도 없이 아끼고 보듬어 줄 사람이었다.
그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안에게 치유가 될 것이다.
‘역시 다이아나가 아깝긴 하지만….’
쯧, 속으로 혀를 차다가 걸음을 옮겨 마담 제드의 의상실을 나섰다.
“결정은 대공께서 하시는 거지만. 대공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손 한 번 내민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아요.”
그럴 거면 세상은 오백 번쯤 무너졌게요.
흥, 콧방귀를 뀌고선 먼저 유리문을 열고 바깥으로 한 걸음 나섰다.
다섯 시가 훌쩍 넘는 시간임에도 아직 해는 비스듬하게 하늘 위에 걸려 있었다.
나를 뒤따라 나온 이안이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서너 걸음쯤 걷다가 빙글 뒤를 돌았다.
나는 해가 들이치는 양달에, 그는 가로수 그림자가 드리운 응달에 있었으므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보나 마나 또 감정이랄 게 없는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무작정 거리만 두지 말고 조금 더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남부행이든 생일 선물이든, 막상 결정하고 나면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거든요.”
“…….”
“그게 결코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황제 폐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래도 싫다고 하면 그건 이제 제 능력 밖인 것 같아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 주세요.
“…….”
한편 이안이 머리 위로 드리웠던 나무 그림자가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일순 흐드러졌다.
얼굴이 드러난 이안은 무표정이라기엔 소란스럽고, 감정이 드러난다기엔 지나치게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공?”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제 말 들었어요?”
내 부름에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이번만큼은 불쾌함의 표시라기보단 반사적인 반응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들었습니다, 그저.”
“그저?”
채근에 가까운 내 반문에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말할 길이 없어 침묵을 택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닙니다.”
대신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만 돌아가시죠. 외출이 길었습니다.”
내게 내민 손을 게슴츠레 바라보다가 그를 불만스럽게 훑었다.
이 자식, 불리하니까 말 돌리는 거 아니야?
그러나 내 미심쩍은 반응에도 이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꿋꿋하게 손을 내밀 뿐이었다.
마지못해 손을 잡았다.
“네, 그러죠.”
이 정도면 나는 정말 할 만큼 했다.
그래도 고집을 부린다면… 황제에게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는, 그 순간 나를 잡은 이안의 손에 유달리 미약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
며칠 뒤, 이안은 남부행에 동행하겠다는 서신을 황제에게 보냈다.
그 서신을 받아 본 황제가 나를 얼마나 칭찬했는지는 구구절절 묘사하지 않겠다.
간단히 요약하면 ‘내가 주선하긴 했지만 이런 복덩이가 어디서 굴러 들어왔을꼬.’ 같은 유사 시어머니의 주접에 가까웠다.
‘참, 생긴 거랑 다르게 노신단 말이지.’
어쩐지 원작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강단을 겸비한 신비주의 황제의 이미지가 점점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온갖 칭찬으로 범벅된 황제의 편지를 놓고 다시 책상 위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채 서명도 못 한 서류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볼 때마다 막막하네.”
이안의 참석 여부 확정을 끝으로, 황녀의 생일을 기념한 별궁행은 삼 주 뒤로 정해졌다.
덕분에 무려 일주일이나 이안과 내가 대공저를 비울 예정인지라, 그전까지 처리해 둘 일이 배로 많아졌다.
누가 귀족이 놀고먹는다고만 했어. 집안 살림만 해도 이렇게 머리가 빠질 것 같은데.
곧 돌아올 여름을 맞이해서 대공저의 각 부서로부터 올라온 예산안만 해도 산더미였다.
막막하게 그것들을 바라보던 나는 말없이 두 번째 서랍에서 엘로이즈의 비법 노트를 꺼냈다.
“그럼 오늘도 컨닝을 해 보실까.”
무려 손바닥 하나만큼의 두께를 자랑하는 엘로이즈의 비법 노트를 펼치자 빼곡한 글자들이 드러났다.
“언제 봐도 정말 꼼꼼하단 말이야.”
새삼스러운 감탄이 이어졌다.
엘로이즈의 비법 노트는 보면 볼수록 대단했다.
처음에는 대공저 재정 운영에 관련된 내용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동안 자세히 읽어 보니 대공비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자잘한 팁부터 아주 기본적인 것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가끔은 내가 정말 엘로이즈의 후임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가만 보자, 하녀부 관련 설명이 몇 페이지였더라….”
몇 개나 끼워진 책의 가름끈을 이리저리 뒤져 보며 페이지를 넘기던 나는 중간에 적혀 있는 글자를 발견하고선 멈췄다.
“응? 이게 뭐지.”
정갈하게 쓰인 다른 글과 다르게 아주 흐릿했는데, 그마저도 한번 지우려 시도한 흔적이 있었다.
“뭐라고 적힌 거야….”
엘로이즈 필체는 맞는 것 같은데.
눈살을 한껏 찌푸리며 글자를 살폈다.
잉크가 번져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겨우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몇 개 있었다.
‘이 책을, 누군가…?’
더듬더듬 글씨를 읽어내리던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한테 써 놓은 메모인가?’
결국 돋보기를 꺼내 더 자세히 보려던 찰나, 누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마님, 편지가 도착했어요.”
“응, 들어오렴.”
문밖에서 들려오는 비비의 목소리에 돋보기를 내려놓고 책을 탁 덮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비비가 은쟁반에 편지와 레터 나이프를 담아 들어왔다.
‘요즘 초대장이 많네.’
저번 에카르트 후작 부인의 티 파티에 초대된 이후로, 수도의 귀족들에게서 종종 나를 소규모 사교 행사에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이후로 별다른 사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초대장이 도착한다는 건, 아리아 소식지를 인상적으로 보았거나 에카르트 후작저에서 만난 귀부인들이 내 이야기를 좋게 해 주고 다닌다는 거겠지.
“그래서, 이번엔 어디니?”
내 물음에 비비가 대답했다.
“그게, 로저 공작가예요.”
“로저 공작가?”
의아함에 눈썹을 들썩이던 나는, 곧 떠오른 기억에 조용히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올슨 백작저에서 인사를 나눌 적에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했었지.’
반쯤 예의상으로 하는 빈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초대장을 보낼 줄이야.
“이리 주렴.”
비비에게서 은쟁반을 건네받아 봉투를 뜯었다.
예상대로 편지지에는 얼마 전 만남이 짧아서 아쉬웠다며, 기회가 된다면 돌아오는 월요일에 공작저에서 점심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편지를 끝까지 읽어 내린 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