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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59)화 (59/91)

59화.

식사 도중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에 잠깐 사고회로가 멈췄다.

내가 포크를 입에 넣지도 내려놓지도 못하는 사이 박혀 있던 완두콩이 접시 위로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반면 이안은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고 뱉은 건지 평온함을 넘어 후련한 얼굴이었다.

“해야 할 말인 것 같아서.”

잠시의 간극 후에 덧붙인 그가 답지 않게 목이 타는 듯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뭐야, 뜬금없이.’

대답을 하기도 애매한 심경의 변화였지만, 이대로 씹고 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주셔서 감사하네요.”

그리고 접시에 떨어진 완두콩을 콕 집었다.

“황녀의 별궁행엔 함께하실 예정입니까?”

포크를 채 입에 가까이 대기도 전에 그가 물었다.

완두콩과 이안을 번갈아 보던 내가 으쓱였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제안하신 일인데 거절의 여부가 있나요.”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거역하면 대역 죄인이 되는 황명 아닌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폐하께서 벌을 내리시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편하게 생각하시죠.”

지는 황족이라 이거지.

거절해도 괜찮다 이거지.

다시 떨어질 듯 말 듯 포크 끝에서 덜렁거리는 완두콩을 입에 쏙 넣고 물었다.

“그러는 대공께서는요, 아직도 결정 못 하셨어요?”

“…고려는 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시죠? 대공께서 가지 않으시면 전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황녀님 사이에 혼자 끼어 있어야 한다는 거.”

“…….”

내 뼈 있는 말에 이안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뜻 대답을 내어 놓지 못했다.

‘고민 중이라는 것 치고 한쪽으로 마음이 많이 쏠린 것 같은데.’

그야, 가기 싫겠지.

정확히 싫다기보단 부담된다는 쪽이 맞겠지만.

사실, 사교계의 소문이나 평판을 이유로 들어 ‘내가 그 행차에 혼자 동행하면 기껏 만들어 놓은 사이좋은 부부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느냐’며 눈치를 줄 수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황성은 이안에게 역린 같은 곳이니까.’

이안의 친모인 전 황비는 이안을 자식으로서 사랑하는 대신 황성 내 본인의 입지를 단단히 해 줄 장기 말 정도로 여겼다.

그녀는 누구보다 살아남고 싶어 했고,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런 황비에게 황제의 피를 반이나 이어받은 이안은 적통인 엘리시아를 견제하고 황후를 압박하기 아주 좋은 패였다.

필요하다면 이안의 최측근을 몇 명이나 죽여 가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말라고, 감정을 죽이라고 속삭인 것도 황비였다.

‘열 살 때 그 사건이 일어나고선 이안도 완전히….’

그러니 이안이 의식적으로 엘리시아 황제와 황녀에게 거리를 두려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들과 가까이 지낼수록 위험부담이 커진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런 성향이 다이아나와 가까워지는데도 장벽이 됐고.’

원작에서는, 다이아나가 이안을 오랜 시간 설득한 끝에 황제에게 조금 다가갈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이안이 그것을 극복하는 시기가 조금 빨라진다면 다이아나에게도, 이안에게도, 황제에게도 좋을 텐데.

잠깐 눈을 굴리던 내가 그를 쳐다보았다.

“…혹시 오늘 시간 있으세요?”

***

오후가 되자 햇살이 유달리 따가웠다.

이제 정말 여름이 올 모양인지, 가벼운 외출용 반팔 원피스에 얇은 숄을 걸쳤는데도 더운 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시간이 있느냐는 내 물음에 이안은 사유를 집요하게 묻는 대신 선선히 그러자 대답했고, 우리는 조찬이 끝난 직후 마차를 타고 번화가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각종 원단과 부자재를 파는 ‘멜랑 거리’였다.

마차에서 내린 이안이 온갖 원단과 자재들이 오가는 거리를 둘러보다 물었다.

“여기는 왜 찾으신 겁니까?”

“황녀님 생일 선물을 사려고요.”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그가 한쪽 눈썹을 버릇처럼 찌푸렸다.

“…여기서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예쁘게 만들어진 완제품 대신 가공되지 않은 원단이나 원석, 비즈, 자재들이 소·도매로 사고 팔리는 곳이니까.

쉽게 말해 동대문 원단 시장에 가서 선물을 고르겠다고 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녀가 기존 시장에 나와 있는 완제품 같은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엔 황녀가 아주 좋아할 만한 선물이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향해 비스듬히 웃어 주고선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안 잡아 먹어요.”

“…….”

“따라오세요, 여긴 길이 복잡하니까.”

***

‘가만 보자, 지금 이 시기면 막 가게를 개업했을 텐데.’

개미굴처럼 복잡한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을 지나치며 내가 눈을 바쁘게 굴렸다.

내게 손이 잡힌 이안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하면서도 용케 순순히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십여 분을 헤맨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찾았다.”

이럴 줄 알았어,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찾아왔군.

내 눈에 들어온 건 각종 레이스와 공단 리본, 그리고 부자재를 팔고 있는 손수레 상점이었다.

개업한 지는 이제 일주일쯤 되었을까. 손수레의 상태는 얼핏 보아도 안타까울 정도로 조악했고 산처럼 쌓인 리본과 부자재는 진열이랄 것도 없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파리조차 외면한 가게를 두고 턱수염이 잔뜩 난 주인장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목적지를 확인한 이안이 나를 보며 불안하게 물었다.

“설마, 선물을 살 곳이….”

“저기예요.”

“혹시나 해서 여쭈는 건데 혹시 보기보다 황녀한테 유감이 많으신….”

아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 같은 이안을 꾸역꾸역 끌고 손수레 앞에 다다랐다.

“이보게, 주인장.”

“흐억, 어서 오십쇼.”

고개를 리본 끈 위에 처박을 듯이 졸던 주인장이 경련하듯 일어나 입가의 침을 슥슥 닦았다.

그는 콧수염과 턱수염이 빽빽하게 난 풍채 좋은 사십 대의 남자였는데, 앞에 놓인 손수레만 아니었다면 길거리 잡배로 오해하기 딱 좋은 비주얼이었다.

이윽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와 이안의 차림새를 훑어본 주인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귀… 귀하신 분들 같은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혹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흘끔흘끔 자기 손수레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안했다.

‘안 뺏어간다고.’

아무래도 귀족들이 이런 뒷골목을 찾는 데는, 사유지 사용 요금을 요구하며 깽판을 치거나 평민들을 쫓아낼 때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듯 무해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가게에는 리본을 사러 왔지, 뭐 하러 왔겠나?”

“예… 예?”

“자네, 리본이랑 레이스를 팔고 있지 않나.”

“예, 그렇긴 한데….”

반응이 얼떨떨한 게 언젠가 마담 제드를 처음 찾아갔을 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당혹스러움과 의심이 반반 섞인 그의 표정을 가볍게 흘리고 수레 위의 물건으로 눈길을 돌렸다.

“흐음, 여기 올라와 있는 건 전부 파는 것들이고?”

“예, 예. 그렇습니다만….”

무더기로 쌓여 있는 레이스 끈 하나를 집어 들어 자세히 살폈다.

낡은 수레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리본과 레이스, 부자재들은 얼핏 보기에 그냥 자투리 천이나 혹은 팔다 남은 재료들 같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질이 눈에 띄게 좋았다.

특히나 레이스 같은 경우에는 시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패턴과 형식이 주를 이루었다.

‘이 레이스를 전부 저 솥뚜껑 같은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었단 말이지.’

힐끗 주인장의 투박한 손을 곁눈질했다.

‘알고 보는데도 믿을 수가 없네.’

속으로 중얼거린 내가 본격적으로 물건을 고르기 시작했다.

“대ㄱ… 아니, 당신. 마음에 드는 게 있으세요?”

이안이 시선을 내렸다.

“전부 똑같아 보이는데요.”

주인장이 억장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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