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황성에 다녀온 지도 며칠이 흘렀다.
그사이 창문을 반만 열어 놓아도 금세 방 안까지 꽃향기를 밀어 넣던 정원에 푸른 잎이 돋았다.
정원을 산책하던 나는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손차양을 만들었다.
‘덥다….’
슬슬 모자를 쓰지 않으면 피부가 따끔거리는 게 여름이 다가올 모양이었다.
그날, 황성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나는 호시탐탐 남부 별궁행에 대해서 물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날 이후 이안이 눈에 띄게 바빠진 탓에, 늘 마주하는 아침 조찬 이외에는 대화할 시간이 나지 않아 설득에는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다른 의미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하아….”
‘이러다가 내 역할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는 거 아니야?’
그래, 바로 그게 문제였다.
애당초 내 계획은 이안과 내 평판을 적당한 수준으로 올려놓고, 아군을 잔뜩 모아놓은 뒤에 다이아나가 돌아올 즈음 깔끔하게 이혼을 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제를 만난 이후부터 어쩐지 일이 잘못 흘러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황제는 너무 나를 신뢰하는 것 같고, 이안은 이혼에 영 협조적이지 않아 보이고.
이래서야 다이아나를 볼 면목이 없었다.
터덜터덜 정원을 거닐다가 문득 떠오른 사실에 아련하게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 보니 다이아나 생일이 곧이구나….’
여름이 다가온다는 건, 다이아나의 생일도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지금쯤 아카데미에 있을 다이아나를 떠올리고선 다시금 축축해졌다.
‘거기서 생일상은 제대로 받아보았는지 모르겠네.’
내 새끼, 타지 생활이 얼마나 고달플까.
“하아….”
지금만큼 이안 클라우드의 부인 신분인 것이 애석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땅 꺼지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엄마야.”
예고 없이 옆에서 불쑥 들려온 말에 내가 퍼뜩 놀라 제자리에서 뛰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제법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짧게 깎은 붉은색 머리카락, 머리카락보다 조금 더 밝고 선명한 색의 적안, 시원하게 쭉 찢어진 눈꼬리와 위로 말려 올라간 큰 입매까지.
“어?”
이안의 옆에 붙어 다니는 전속 마법사였다.
개성 있는 얼굴인 탓에 못 알아보기가 더 힘들었다.
“그, 다음부턴 기척을 내고 다니게. 그, 이름이… 카….”
“카일 엘제이어입니다, 전하. 이렇게 놀라실 줄 몰랐습니다. 이것 참, 송구합니다.”
내가 자신의 이름을 잊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가 방싯방싯 웃었다.
송구하다는 말과 달리 전혀 미안한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안의 옆에는 왜 이렇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많을까.
황제도 그렇고, 이 마법사도 그렇고.
“…그래, 엘제이어 공.”
“대공비 전하도 참, 딱딱하게 공은요. 편하게 카일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그렇게 부르시거든요.”
그러고는 찡긋 윙크까지 해 보이는데, 생각 이상의 발랄함에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이안은 이런 심복을 용케도 가까이 뒀네.’
반면 카일은 내내 호기심이 그득한 얼굴로 나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지켜보았는데, 저쪽에서부터 걸어오시면서 한숨을 푹푹 쉬시기에.”
“그걸 보고 있었나?”
“제가 시력이 좀 좋습니다.”
그 얘기가 아니잖아.
“…사색에 조금 잠겨 있었지. 그보다 자네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나?”
나는 슬쩍 한 발 물러서 그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분명 이 즈음이면 훈련 시간일 텐데.
자신을 훑어보는 탐탁잖은 눈길을 알아차린 건지 카일이 뻔뻔하게 웃었다.
“아이참, 너무 진득하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별건 아니고, 땡땡이를 치고 있었습니다.”
“…땡땡이?”
그가 사뭇 진지하게 턱을 쓸었다.
“예.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효과적으로 놀고먹을 수 있을까… 뭐 그런 고민도 좀 하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자기가 모실 주인 앞에서 당당하게 땡땡이를 친다고 선언한 거야?
그러자 나의 아연한 표정을 본 카일이 어깨를 떨며 숨죽여 웃었다.
그제야 나는 이 빨간 대가리 마법사가 나를 놀려먹었음을 깨달았다.
“농담입니다. 쉬는 시간이라서요. 잠시 바람을 쐬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
“내내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 보면 햇빛 쐴 일이 많지 않거든요. 이렇게 틈날 때 산책이라도 해 줘야 광합성이 가능합니다.”
그가 으쓱이며 말했다.
‘하마터면 진심인 줄 알았네. 무슨 농담을 저렇게 진지하게 해?’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실배실 웃던 카일이 넉살 좋게 한 걸음 다가와 나와 나란히 섰다.
“실은, 대공비 전하께서 이토록 수심이 깊은 얼굴로 정원을 거닐고 계시니, 모시는 자 된 도리로서 여쭈지 않을 수가 없어서요.”
딱히 그렇게 충성심이 깊어 보이지는 않는데.
“혹 저라도 괜찮다면,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래 봬도 제법 괜찮은 이야기 상대라 자신합니다. 대공께서도 가끔 제게 고민을 이야기하시거든요.”
카일이 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씨익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다지 믿음직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저, 부담스러운데 한 걸음 물러나 주겠나?”
“어이쿠, 죄송합니다.”
카일이 잽싸게 한 걸음 떨어졌다.
그를 훑어보던 내가 눈을 굴렸다.
‘어차피 나 혼자 고민해서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긴 하지….’
이래 봬도 이안의 심복이라면 아주 못 믿을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니, 어느 정도 털어놓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적당히 돌려서. 눈치채지는 못하게.
입 안에서 혀를 두어 번 굴리다가 말했다.
“그, 내가 신경 쓰는 사람이 있네.”
“신경 쓰는 사람이요?”
카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오해는 말게. 순수하게 응원해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의미일세.”
“그런 분이 계셨군요.”
호오, 흥미로운 탄성을 흘린 카일이 의뭉스럽게 웃었다.
‘역시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은데.’
이미 말을 꺼내 버린지라 이제 와 그만두기도 뭐했다.
나는 그에게 ‘최애’의 개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골똘히 고민했다.
“그 사람은 뭐랄까, 나에게… 늘 행복했으면 좋겠고, 무슨 일이든 잘 되었으면 좋겠고, 한 발자국 뒤에서 언제나 지지해 주고 싶은 사람이야.”
카일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거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응?”
“응원해 주고 싶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신경 쓰이면 그게 좋아하는 거잖아요?”
“어… 따지자면 그렇지…?”
나는 다이아나를 사랑하니까.
카일이 히죽, 웃었다.
“그럼 막 옆을 지켜 주고 싶고, 그러십니까? 애틋하고?”
이번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사람의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어. 내가 바라는 건 그 사람의 행복이니까.”
자고로 최애를 향한 사랑은 독점욕이 아닌 숭고한 아가페여야 한다.
다이아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개똥차 이안도 갱생시켜 옆에 예쁘게 놓아 줄 수 있을 정도로.
카일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런 대답은 예상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뭘 알겠니.
“…아무튼, 그래서 내 나름대로 그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 결과가 유의미한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 이 모든 게 삽질일까 봐 슬슬 무서워진다고.
푸른 잎이 돋아나는 나무를 한탄스럽게 보다가 카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카일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나와 시선이 마주친 카일이 눈을 끔뻑끔뻑 떴다.
“어… 그러니까 좋아하는 분께 대공비 전하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봐 걱정이라는 거죠?”
“그렇지.”
그가 눈을 한 바퀴 데구르르 굴리다가 말했다.
“왜 대공비 전하가 그분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다이아나는 지금 바다 건너에 있다고.
어떻게든 우리 다이아나한테 꽃길을 깔아 줘야 하는데. 꽃인 줄 알고 뿌려 둔 게 자갈이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랬다간 1호 팬 자격을 스스로 박탈해 버릴지도 몰랐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내 표정에 내내 장난스럽던 카일의 얼굴이 덩달아 진지해졌다.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대공비 전하. 전하께서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대공비 전하가 진심으로 그분을 돕고자 한다면 분명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분께선 전하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계실지도 모르고요.”
의외로 멀쩡한 위로에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그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런가.”
정작 카일은 다이아나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묘하게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약해졌다, 엘로이즈. 이런 말에 위안을 다 얻고.’
흘끗 시계를 본 카일이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제대로 이야기드리고 싶었는데, 또 일할 시간이네요.”
“아, 괜찮으니 얼른 가 보게.”
내가 선선히 손을 저었다.
아쉽다는 듯이 나를 보던 카일이 꾸벅,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어 허리를 곧게 편 그가 눈을 한 바퀴 굴리곤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전하.”
“응?”
“꼭! 전해질 겁니다! 대공비 전하의 마음이요.”
뭐 저렇게 전해 줄 것처럼 말을 해.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씨익 웃은 그가 물러났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
“부인께서 본인의 자리에 충실하고 계신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다음 날 조찬 시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안이 뜬금없이 툭, 뱉은 말이었다.
포크로 완두콩 하나를 콕 집어 입 안에 넣던 내가 눈을 껌뻑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네?”
갑자기 뭐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