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57)화 (57/91)

57화.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황제는 시종들까지 전부 물리고 나를 테라스로 안내했다.

만찬장의 테라스는 간단한 차와 다과를 즐길 수 있는 작은 테이블과, 태양궁의 후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경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내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당황스러웠다면 사과하지.”

이건 무엇에 대한 사과일까.

내 핑계를 대고 이안을 별궁행에 동행시키려고 한 것? 아니면 다짜고짜 이런 숨 막히는 독대 자리를 만든 것?

짚이는 게 많아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있자,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내 아우를 놀리려다가 그대까지 함께 당황시키고 말았잖나. 너무 재밌어서 그만.”

이 인간 진짜 알고 그랬어.

내 착잡한 표정을 읽은 듯 그녀가 와하하 웃었다.

“그대, 보기보다 귀엽군?”

혹시 황제의 눈엔 만물이 귀여워 보이는 걸까.

“대공비 그대도 알다시피, 이안 그 아이가 대공 작위를 받아 나간 이후로는 전보다 더 틈을 내어 주지 않아서 말이야. 이렇게라도 놀리지 않으면 나를 정말 남처럼 대하지 않나. 보았지? 방금도 내내 깍듯이 폐하, 하고 부르는 거.”

“아….”

그래서 아까 이안의 유사 하극상을 전심전력으로 즐긴 거였구나.

황제가 이복동생인 이안을 아끼는 것과 별개로, 이안은 황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건 황비 태생의 황자로 평생을 살아온 이안의 몸에 밴 본능 같은 것이었다.

진심으로 이안을 아끼는 황제와 달리, 전대 황후와 황비는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연적이었다.

때문에 황비 태생인 이안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당시 황태자였던 엘리시아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거기다 황비는 그런 이안을 옆에서 부추기기까지 했지.’

그 당시 엘리시아는 열두 살, 이안은 네 살짜리 꼬마에 불과했다.

이안의 감정이 이토록 메마른 데에는 불행했던 유년 시절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이안이 열 살 때 일어난 ‘그 사건’ 때문이었지만.

“어릴 때도 쉽지 않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더욱 쉽지 않아. 대공 작위를 주면 조금 괜찮아질까 싶었는데….”

황제가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가족끼리 이렇게 멀어져서야.”

그녀가 즉위한 직후 이안에게 대공 작위를 내리면서 두 사람을 적으로 보는 시선이 조금 잠잠해지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몇몇 황제파와 귀족파는 황제와 이안을 필두로 당사자가 원치 않는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황제파는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서통인 이안을 완전히 계승권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귀족파는 그런 황권을 견제하기 위해 황비 태생의 이안에게 더 힘을 실어 주려고 했다.

황제가 이안을 아끼는 티를 낼수록, 황제파는 그녀를 나무랐으며 귀족파는 빈틈을 찾아 황제와 황녀를 공격하기 바빴다.

‘황제도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그럼에도 꿋꿋하게 이안과 가까워지려는 황제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황제에게 거리를 두려는 이안이 이해가 되기도 했고.

“이번 별궁행이 그대가 불편할 수 있는 자리라는 건 알고 있어.”

“아닙니다, 불러 주심에 오히려 감사드려야지요.”

“그대, 얼굴만큼이나 말을 참 예쁘게 해.”

황제가 환하게 웃었다. 입꼬리가 근사하게 말려 올라가며 시원한 입동굴이 훤히 드러났다.

‘와… 잘생겼다.’

여자가 이렇게 잘생겨도 되는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에 홀릴 것 같아 그녀를 멍하니 보고 있을 때였다.

“그대가 이안을 잘 좀 설득해 주게. 저렇게 반응해도 제법 무르고 여린 아이거든.”

…여려요? 이안이?

죄송하지만 폐하, 이안 캐해 잘못하신 것 같은데요.

“여리군요… 대공이….”

“그럼, 그 아이가 겉으로는 그래 보여도 속은 아주 말랑 푸딩이 따로 없어. 나는 매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네.”

푸딩….

나랑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 같은 황제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럼 이만 일어나지. 대화가 길어지면 이안 그 아이가 또 인상을 팍 구기고 있을 테니.”

황제가 이안을 흉내 내듯이 미간을 잔뜩 좁히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와, 이거 완전 이안이잖아.’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녀와 이안이 닮은꼴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놓고 보니 제법 인상이 비슷했다.

역시 남매는 남매인 듯했다.

“참,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이안한테 말하지 말아 주게. 그 아이가 워낙 세심해야 말이지.”

“물론입니다, 폐하.”

엘리시아 황제가 입매를 늘리며 키득거렸다.

테라스에서 빠져나와 오찬장을 나서려던 순간, 황제가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대공비.”

“예, 폐하.”

방금 전까지 가득하던 장난기를 전부 지운 얼굴로, 그녀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앞으로도 이안을 잘 부탁하네.”

***

뭔가 심히 잘못됐다.

‘황제한테까지 이렇게까지 신임을 얻을 생각은 없었다고.’

돌아오는 마차 안, 나는 심각한 상태로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아까 그 자리에선 황제의 페이스와 분위기에 휘말려 동조를 하긴 했지만, 혼자 가만 생각해 보니 징조가 좋지 못했다.

나는 적당히 이안과 내 평판만 올려 주고 쿨하게 퇴장할 예정인데. 이래서는 황제에게 필요 이상의 믿음을 주는 꼴이 아닌가.

이안을 거의 나한테 맡기는 것처럼 말을 하던데.

게다가 그 사춘기 소녀처럼 빛나는 눈은 또 뭐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황제가 아리아 소식지를 왜 읽는 거야?’

황제가 사교계 지라시 같은 걸 그렇게 막 읽어도 돼?

급기야 성질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하아….”

“그래서 땅이 꺼지겠습니까.”

바닥을 향하던 시선을 끌어 올려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딱 봐도 아까 황제랑 내가 단둘이 남아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눈 게 무지하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폐하와 나눈 이야기가 그리 기껍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부인.”

“참,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이안한테 말하지 말아 주게. 그 아이가 워낙 세심해야 말이지.”

확신하건대 이안은 분명히 황제의 손바닥 위에 있을 거다.

역시 남동생을 둔 누나는 위대했다.

나는 곧이곧대로 대답을 하는 대신 넌지시 고민하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 대공. 제가 대공에게 협조를 구할 때 내건 조건을 기억하세요?”

“어떤 조건을 말씀하는 겁니까? 부인께서 내건 조건이 워낙 많아서.”

말을 돌린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돌아오는 대답이 삐딱했다.

“…일 년 뒤, 제 평판이 바뀌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을 깔끔하게 그만두고 이혼해 드리겠다 했던 말이요.”

흘러나온 내 대답에 이안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한 박자 느리게 끄덕였다.

“…네.”

‘반응 뭐야.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눈을 가늘게 뜨던 내가 고개를 털고 말을 이어갔다.

“만약… 일 년 후에 대공과 제 평판이 크게 바뀐다면, 이혼은 못, 아니, 안 하겠죠…?”

물론 지금의 네가 원하지 않아도 다이아나가 등장하면 마음이 바뀌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최대한 빨리 이혼을 하는 게 좋단 말이야.

내 질문의 의중을 파악하듯이 잠깐 미간을 좁히던 이안이 아까보다 조금 더 구겨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한 얘기를 하시는군요.”

“…….”

“꼭 일 년 뒤에 이혼을 청하실 계획인 사람처럼 말씀하십니다.”

“아, 아뇨. 뭐, 꼭 그렇다기보단….”

‘해야 하니까, 이 깡통 로봇아!’

이제 1년하고도 2개월이 지나면 다이아나가 돌아오는데.

그때까지 내가 이혼 안 하고 너랑 살고 있으면 우리 애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어?

다이아나는 마음이 여리고 비단결 같아서 같은 일에도 상처를 더 많이 받는단 말이야.

이왕이면 다이아나가 돌아오기 전에 깔끔하게 이혼해 주는 게 팬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조공이라고.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편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이안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폐하께서 주관하신 결혼입니다.”

“네, 알죠.”

“오늘 보니 폐하께선 황녀의 일로 부인을 꽤 마음에 들어 하신 것 같고요.”

“…네, 그런 것 같더라고요.”

“제국법상 백작위의 이상 부부의 이혼 최종 승인은 폐하께서 맡고 계시지요.”

“…그렇…죠.”

이대로라면 이혼이고 뭐고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소리를 아주 고상하고 고급스럽게도 돌려 했다.

‘이러다가 다이아나한테 다시 대못 박게 생겼네….’

다이아나의 재등장 이후로는 원작대로 흘러갈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빠르게 퇴장해 주고 싶었는데.

착잡한 내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오래도록 바라보던 이안이 덧붙였다.

어쩐지 표정이며 말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평소보다 톤이 반 정도 낮았다.

꼭 이 대화가 기껍지 않은 사람처럼.

“물론, 바라신다면야 아주 못 할 일은 아닙니다만….”

‘다만?’

“폐하를 설득하는 일은 이혼을 원하는 쪽이, 알아서 해야 할 겁니다.”

관망적이다 못 해 비협조적인 이안 놈의 대답에 나는 보이지 않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누가 얘랑 사이 좋댔냐고!’

이 망할 똥차 남자 주인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