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나는 그제야 꽉 쥐고 있던 냅킨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네. 황후 폐하. 브릴루즈 공작저의 시즌 파티에서 황녀님을 만났습니다.”
“황녀가 어찌나 그대 이야기를 하던지, 대공비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파티에서 뵌 날 황녀님이 저를 좋게 봐 주셔서요.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 틈에 물을 한 모금 마신 황제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전까지는 둘이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던가?
“예, 폐하. 대공과의 결혼식, 그리고 황성의 공식 행사에서 잠깐씩 뵌 게 전부니까요.”
정확히는 엘로이즈가 황녀뿐만 아니라 귀족들 전부를 멀리한 탓이지만.
“황녀가 말하기를 이번에 대공비의 개인 재단사를 소개해 주었다고 하더군요.”
“네, 황후 폐하. 그 역시 황녀님께서 좋게 보아 주신 덕분에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제단사도 아주 기뻐했고요.”
예의를 차린 내 대답에 황제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황녀가 생떼를 부리지 않았으면 다행인 것을, 겸손은.”
“아닙니다, 황녀님이 그날 제 드레스를 칭찬해 주셔서, 제가 감사한 마음에 황녀님께 먼저 권한 일인걸요.”
물잔을 내려놓은 황제가 덧붙였다.
“아무튼, 이번 일로 황녀가 대공비를 꽤나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다행이야. 그 아이가 누굴 싫어하는 것만 봤지, 따르는 건 또 처음이더군.”
“하하….”
“그렇지 않습니까, 황후? 그 브릴루즈 공작 부인도 제대로 다스리질 못해 황태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 않았습니까.”
“브릴루즈 공작 부인께서는 충분히 잘해 주고 계십니다, 폐하.”
네, 거의 파블로브의 개 같던데요.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키고 잔잔하게 웃었다.
브릴루즈 공작 부인에게 교육을 받으면서도 어지간히 여기저기 패악을 부리고 다녔던 모양이지.
황제의 고상한 말에서 진의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황제가 말했다.
“그래서 말일세, 이번 황녀의 생일 기념으로 휴가차 방문하는 남부 별궁에 대공 내외가 동행해 주었으면 하는데.”
“네?”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평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원래는 브릴루즈 공작 부인이 동행할 예정이었는데, 중요한 일이 생겼다지 않나. 일주일이나 되는 일정이라 공작 부인도 이번에는 오래 자리를 비우기는 어렵다더군.”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황실 행사이니 나 역시 참석할 예정이지만, 알다시피 별궁에 가서도 나와 황후는 할 일이 꽤 많아서 말이야. 남부 영지의 영주들도 만나 보아야 하고.”
그녀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그러니 대공과 대공비가 도와주지 않겠나?”
“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제안에 눈을 굴렸다.
동시에 이게 황제와 황후가 우리를 부른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은 부탁이지만….’
이건 황실 일가의 공식 행사에 나와 대공을 초대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황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이유로 들며 말이다.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사실 내가 아니라….’
나는 흘끗 옆자리에 앉은 이안을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그의 표정은 방금 전보다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좋은 분위기는 다 끝났네.’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식기를 슬쩍 내려놓았다.
황제의 말만 들으면 얼핏 나에게 제안하는 것 같았지만, 황제의 의중에 담긴 건 내가 아닌 이안이었다.
단지 그에게 직접 제안했다가는 분명 단칼에 거절당할 테니 적당히 내 핑계를 댄 것일 테지.
‘그래야 이안이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오찬장에 잠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입을 연 건 이안이었다.
“황녀의 별궁행에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충분히 다른 귀부인들도 있을 텐데요. 대공비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브릴루즈 공작 부인 외에 누가 대공비만큼 황녀를 잘 다루겠나?”
“…정 그렇다면 사흘 정도만 대공비를 초대하시죠. 그리고 그때 저는 수도에 남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아서라, 어디 남편이 되어서 아내를 혼자 남부까지 보낼 생각을 하나? 너무 매정하군, 동생.”
이안의 말을 끊은 황제가 능글맞은 태로 웃었다.
“그것이 아니라.”
“아니긴. 이제 막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마당에, 대공비 혼자 남부로 보내 버리면 그림이 어떻겠나.”
“…….”
“그렇지 않은가, 대공비?”
황제가 나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동시에 이안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왜 나한테 그래!’
두 남매 사이에 끼어 버린 내가 식은땀을 흘렸다.
황제를 거들 수도, 그렇다고 이안의 편을 들어 반박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두 사람 다 동행해 주었으면 하네.”
말투만 부탁이었지, 사실상 거부가 불가능한 황명이었다.
이안의 표정이 조금 더 굳었다.
“…황가의 휴가에 초대를 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폐하.”
그가 쥐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이제 황가의 일원도 아닌 대공이 그 자리에 동행하는 건 여타 귀족들에게 좋지 않은….”
“이안.”
황제가 다시 한번 이안의 말허리를 잘랐다.
방금 전 장난스럽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한껏 진지한 눈빛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공의 성을 받았다고 해서 네가 황족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야.”
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진득하게 바라보던 황제가 다시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말게나. 황녀도 대공비의 동행을 기대하고 있고. 응?”
그녀가 나를 향해 찡긋 윙크했다.
“아하하… 네, 폐하.”
진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잔을 들어 올렸다.
능청스럽게 음료를 한 모금 넘긴 황제의 시선이 다시금 이안에게 향했다.
“그래서 대답은?”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래,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지.”
활짝 웃는 황제와, 우중충한 얼굴을 하는 이안을 보며 생각했다.
‘쉽지 않겠네….’
***
이후 식사는 애매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소고기를 숙성시킨 먹음직스러운 메인 요리가 나왔지만,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도 편하게 식사를 들지 못했다.
이안은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고, 황후는 그런 이안 때문에 황제가 기분이 상할까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으며 나는 세 사람 사이에 낀 샌드위치 햄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던 탓이다.
그렇게 열 시간 같은 한 시간이 흐른 뒤, 시종들이 디저트 접시를 수거해 가기 무섭게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대, 대공…?”
내가 황제와 이안을 번갈아 보며 속삭이듯 그를 불렀으나, 이안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벗어 두었던 재킷을 챙겼다.
맞은편에서 느른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가 씨익 웃었다.
“그럼, 내 아우께서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얼른 가 보셔야지. 한데 대공비?”
“…예?”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않겠나?”
나를 향한 물음에 이안이 멈췄다.
‘왜 또 내가 인질인 건데…!’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는… 무슨 일로…?”
“내가 오랜만에 만난 올케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결혼식 이후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올케라니.
원래부터 폐하와 엘로이즈가 대화 같은 걸 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그사이, 눈치 빠른 황후가 이안을 보며 웃었다.
“두 분께서 담소를 나누신다니, 그럼 대공께서는 귀가하시기 전 나와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죽이 척척 맞았다.
황후까지 합세하자 이안도 차마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던 건지,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라나섰다.
“잠시 후에 뵙죠, 부인.”
그러면서도 ‘잠시 후’라고 강조하며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오라는 압박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짜 치밀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