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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55)화 (55/91)

55화.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자 넋이 나갔다.

방금 전 태양궁을 둘러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입이 떡 벌어졌다.

레반트 제국의 17대 황제, 엘리시아 카를로테 헬리오스 레반트.

눈앞에 있는 건 틀림없는 바로 그 황제였다.

그녀가 짝다리를 짚으며 허리춤에 손을 얹고서 이안을 장난스럽게 훑었다.

“하여간 뻣뻣한 건 변하질 않아.”

“폐하께서 매번 지나치시다는 생각은.”

이 상황이 제법 익숙한 듯 무덤덤한 두 사람과 달리,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멍하니 굳은 채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시종인 척했어?’

멀쩡한 시종을 놔두고 직접 마중을 나온 것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모습까지 바꿔 가며 사람을 속이다니.

반면 이안은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취미는 이제 그만두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아직 십 년은 이른걸.”

“체통을 지키십시오.”

“뭘 모르는군? 여자는 나이 들어도 애야. 그리고 이런 장난으로 못 지킬 체통이면 없는 게 낫지.”

엘리시아 황제가 끌끌 웃으며 이안의 볼을 콕 찔렀다.

“그보다 내 아우께서는 그 뻣뻣한 태도를 어떻게 해 볼 생각 없는가? 물론 그거대로 귀엽긴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이안이 귀여워?

이안 클라우드와 귀엽다는 수식어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이었나?

그러나 정작 이안은 보란 듯이 인상을 구길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엘리시아 황제는 이안의 턱을 긁어 주며 웃었다.

‘이안을 정말 똥강아지 취급했어!’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 놀라운 건 이미 그게 익숙하다는 태도로 짜증스럽게 그녀를 보는 이안이었다.

“내 동생 부부가 처음으로 태양궁에 행차하신다는데,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폐하.”

“너무 나무라지 말아. 황성 마법사에게 부탁해 가벼운 장난 좀 친 거니까. 그래도 재미있지 않았나?”

“재미없습니다.”

“이런, 나는 재미있었는데.”

이안의 단호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배를 잡고 깔깔깔 웃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의미로 떡 벌어지는 입을 애써 닫아야 했다.

‘…내가 아는 황제가 맞나?’

원작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황제는 언제나 이안의 든든한 아군이자 제국의 현명한 통치자로 언급되었다.

지금처럼 저렇게 나잇값 못하는 모습은 듣도 보도 못했다고.

이안도 비슷한 감상을 느낀 건지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익숙한 저는 차치하고, 대공비가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만.”

“아.”

한 박자 느리게 그녀의 영롱한 자청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내가 퍼뜩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하마터면 충격에 빠져 인사도 생략할 뻔했다.

이어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가볍게 잡고 한 발을 뒤로 빼며 커트시를 올렸다.

“레반트 제국의 지고하신 첫 번째 태양, 엘리시아 카를로테 헬리오스 레반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내 깍듯한 인사에 눈을 껌뻑껌뻑 뜨던 황제가 웃으며 손사래 쳤다.

“우리 사이에 그런 딱딱한 인사는 되었네. 고개를 들지, 대공비.”

‘우리 사이는 굉장히 먼 사이 아닌가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꾹 삼키고 허리를 폈다.

“…예, 폐하.”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짓느라 입꼬리가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그대 생각을 하지 못했군. 장난이 조금 심했나? 당황했다면 미안하네, 대공비.”

“아닙니다, 폐하.”

“심하셨습니다.”

나는 곧장 부정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삐딱한 이안의 말투가 내 목소리를 덮었다.

그런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던 황제가 참지 못하고 빵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정말이지 들리는 소문을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히 둘 사이가 가까워지긴 했나 보군. 이안이 대공비를 대변하는 모습을 다 보다니.”

…이게 욕이야, 칭찬이야.

내가 속으로 중얼거리든 말든 황제는 어쩐지 흐뭇하게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궁금하군. 그새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폐하.”

이안의 한쪽 눈썹이 불만스럽게 올라갔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알겠어, 알겠어. 한 마디만 더 했다간 자리를 박차고 나갈 얼굴이군. 이래서야 무서워서 장난을 치겠나.”

하나도 안 무서운 얼굴로 너스레를 떤 황제가 다시 빙글 몸을 돌렸다.

“아무튼, 놀리는 건 이쯤 하고 곧장 식사하러 가지. 오찬장에서 황후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

황제의 황송한 안내를 받아 도착한 오찬장에는 늦봄의 햇살이 통창을 통해 눈부시게 들이치고 있었다.

황제의 옆자리에는 황후가 먼저 도착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레반트 제국의 찬란한 달, 라일리 헤레미아스 게리언 레반트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대공, 그리고 대공비.”

황후가 유순한 눈매를 접으며 인사에 화답했다.

“오는 길 고생 많았습니다. 폐하께서 짓궂은 장난을 치셨지요.”

“아닙니다.”

알면서 왜 말리지 않으셨나요….

“제대로 된 인사가 늦었군. 두 사람 다 와 주어 고맙네.”

황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엘리시아 황제가 우리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어쩐지 아까부터 잘 큰 자식을 보듯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히려 폐하께서 친히 불러 주심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런가? 이안이 대공 작위를 받아 황성을 나간 이후로 부르기가 조심스러워져서 말이야.”

“예, 그러셔야죠. 현명하십니다.”

이번에 대답한 건 내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내내 굳은 표정을 짓던 이안이 툭, 내뱉듯 한 말이었다.

‘황제 앞에서도 싸가지는 여전하구나.’

나는 내심 감탄했다.

아무리 이복 남매라고는 하지만 보통 깡이 아니야.

정작 황제는 기분 상한 티를 내기는커녕 못내 서운한 듯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이것 보게. 아주 선을 딱 그어 놓지 않나. 동생이 되어서 귀여운 맛이 없다니까.”

“그럴 시기는 한참 지났으니까요.”

…그럴수록 이안은 더 단호해질 뿐이었지만.

영양가 없는 담소를 나누고 있을 즈음 시종들이 음식을 내어 오기 시작했다.

금세 표정을 바꾼 황제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어쨌든 지금 초대했으니 됐지. 차린 게 많으니 많이들 들게.”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가 식기를 드는 것을 시작으로 식사가 이어졌다.

긴장한 것과 달리 식사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주로 황제와 이안이 제국에서 일어나는 일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간간이 황제나 황후가 묻는 말에 짧게 대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불현듯 황제가 나를 보며 짓궂게 물었다.

“대공비의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 역시 사랑의 힘인가?”

“콜록.”

“폐하.”

내 기침과 이안의 나무람이 동시에 오찬장을 울렸다.

한숨을 쉰 이안이 곧장 나에게 냅킨을 건네주었다.

“괜찮습니까? 닦으십시오.”

“…네, 고마워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오늘따라 행동이 빠르네.

황제 앞이라고 그래도 제법 챙겨 주는 건가.

한편 엘리시아 황제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의자에 기대어 턱까지 괸 채 흐뭇하게 보는 중이었다.

“보기 아주 좋다니까.”

“…폐하, 그쯤 하시죠. 이러다 대공비 체하겠습니다.”

“호오, 우리 이안이 걱정까지. 이거야말로 사랑의 힘이 아닌가?”

“폐하.

이번만큼은 나도 이안 네 편이다.

황제 좀 막아 봐.

내 애처로운 눈빛을 알아듣기라고 한 건지 이안이 한숨을 쉬며 그녀를 응시했다.

“자꾸 불편한 자리를 만드시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 알겠네, 알겠어. 무슨 말을 못 하겠군. 정말 동생 무서워서 원….”

아까부터 자꾸 무섭다고 하시는데, 무섭긴커녕 신나게 놀리는 얼굴이잖아요. 얼굴에 ‘나 신났소’가 적혀 있는데.

내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갈 즈음 황후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대공비, 황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두 사람이 꽤나 가까워졌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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