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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54)화 (54/91)

54화.

내 연락을 받은 마담 제드는 총알처럼 대공저로 달려왔다.

내가 황녀도 아니고 황제를 알현하러 간다는 사실에 그녀의 눈이 얼마큼 튀어나왔는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겠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원단부터 공수해 오겠습니다!”

“아니, 진정하게….”

“이건 이 마담 제드의 자존심이자 긍지입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시는데 아무 드레스나 입으시게 할 수는 없지요!”

“자네는 뭘 만들어도 훌륭하다니까….”

“크흑, 대공비 전하! 어쩜 말도 그렇게 아름답게 하시는지! 그 아름다운 마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어째 진정시키려고 한 말이 도리어 연료가 된 것 같았다.

결국 어디선가 엄청난 원단을 한아름 구해 온 마담 제드에 의해 내가 며칠 내내 시달린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괴롭고 힘든 나날이었지….’

다음부턴 결코 내가 먼저 알현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 다짐했다.

돌아온 주말.

잔뜩 힘을 준 마담 제드의 역작을 입고 로비로 내려가니 이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성 월례 회의 때마다 입고 가는 흰 정복 차림에, 머리를 넘긴 모습이었다.

나는 나직이 감탄했다.

‘훤칠하긴 해….’

그의 외모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굴복되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넘겼네요.”

내 음성에 몸을 돌린 이안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네.”

“잘 어울려요.”

가벼운 칭찬을 건네자 이안이 눈에 띄게 멈칫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부인께서도 드레스가 잘 어울리십니다.”

오, 이젠 제법 알아서 칭찬하는 눈치도 생기고.

“네, 마담 제드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간다고 했더니 유달리 신경을 써 줘서요.”

나는 치맛단에 반투명한 망사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연녹색 드레스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것을 가만 보던 이안은 입을 달싹이다가, 말을 삼키는 듯 목울대를 넘기고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

황제를 알현하는 일이라 그런지, 마차도 평소보다 휘황찬란했다.

저번에 나 혼자 황녀의 부름을 받아 방문한 적이 있긴 있지만, 이번엔 부부가 정식으로 황제의 호출을 받은 만큼 모두가 신경을 쓴 느낌이었다.

‘영 내키지 않는 건 이안뿐인 것 같네.’

그 증거로 이안은 내내 평소보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하긴, 사적인 용무로 황성에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이안의 태도에도 마차는 막힘없이 달려 황성의 정문까지 다다랐다.

“대공가의 마차입니다!”

정문 앞에서 근위병들이 마차를 확인하고 소리치자, 몇몇 기사들이 나와 마차를 동쪽으로 안내했다.

이어서 기사들끼리 신호를 하고 기둥을 조작했다.

그러자 그 뒤에 숨겨져 있던 길이 곧게 펼쳐졌다.

“여기도 길이 있었네요?”

“황제한테 직접 초대받은 귀빈만 출입하는 곳입니다.”

“오….”

이안의 말대로 길은 마차 한 대가 무리 없이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고, 양옆으로는 울창한 가로수가 빽빽이 드리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오 분쯤 달리자 황제와 황후가 머무는 태양궁의 후문이 드러났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이안이 이제 제법 익숙해진 폼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리시죠.”

“고마워요.”

나까지 마차에서 하차하자,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를 반백의 시종이 우리 앞으로 다가와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안 클라우드 대공 전하와 엘로이즈 클라우드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반갑네.”

선선히 인사를 건네는 나와 달리 이안은 내 손을 잡은 채로 시종을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또 왜 이래.’

내가 툭, 그의 옆구리를 쳤다.

대충 인사를 받아 주라는 뜻이었으나, 시종이 조금 더 빨랐다.

“괜찮습니다. 오랜만이군요, 황자… 아니, 이안 클라우드 대공 전하.”

그가 잔잔하게 웃으며 이안을 쳐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던 이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아는 사이인가 보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반응이 저게 뭐냐고.

마음 같아서는 한 소리를 하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있었으므로 꾹 참았다.

집에 가서 보자, 이안 클라우드.

“그럼 두 분 다 이쪽으로 오시죠.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는 사이 시종이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보통 황제의 알현은 정무를 보는 태양궁의 응접실에서 이루어지지만, 오늘은 개인적인 만남이라 그런지 곧장 황제와 황후의 침전이 있는 곳으로 초대받은 듯했다.

시종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눈부시게 화려한 내부가 펼쳐졌다.

거대한 샹들리에는 다이아와 금으로 만들어져 반짝반짝 빛이 났으며, 조명이 닿는 천장과 벽에는 화려한 그림과 무늬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화려함에 대응이라도 하듯, 곳곳에 새하얀 상아 조각상이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와….’

황녀가 기거하는 에메랄드궁도 상상 이상으로 화려했지만, 역시 황제가 머무는 곳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휘황찬란한 모습에 떡하니 입을 벌리자 이안의 시선이 짧게 내게 닿았다.

“부인, 입을 좀 작게 벌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

너무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나.

황급히 집 나간 체통을 찾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와중에 다물라고는 안 하는군.’

지적마저도 참 공.주다웠다.

“새삼 복도가 아름다워서요.”

“황제 폐하께서 기거하는 곳이니까요. 부인께서는 태양궁에 처음 와 보시겠군요.”

“네. 후작 영애일 적에는 방문할 일이 없었고 결혼한 후에는 공식 행사만 참석했으니까요. 대공께서는 황자 시절에 종종 오셨었죠?”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이안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한편 서너 걸음 앞서 걸으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종이 짧게 우리를 돌아보고선 말했다.

“두 분이 참 다정하십니다.”

내뱉는 말에 은근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고개를 기울이던 내가 말했다.

“…그래 보이는가?”

“예. 이 늙은이가 보기에 아주 좋습니다.”

그가 흐뭇한 어조로 말하고선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고정했다.

대수롭지 않게 시종의 말을 받아친 나와 달리, 이안은 어쩐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시종이 윗사람이 말하는 데 끼어드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황성이면 더 철저하게 태도를 관리할 텐데. 이 시종은 이안과 안면이 있어서 그런가.

얕은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시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했는데, 정말이었나 보군요.”

‘…음?’

“최근에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다는 소문 말입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발언에 덩달아 내 걸음까지 느려졌다.

아무리 이안과 구면인 시종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간 것 아닌가?

슬쩍 보니 이안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굳어 있었다.

“…이보게.”

결국 내가 그를 자제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이안이 조금 더 빨랐다.

“이제 그쯤 하시지요.”

“…….”

“폐하.”

‘…폐하?’

이안의 입에서 튀어나온 공대에 놀라기도 전에 시종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서 그가 빙글 몸을 돌리고 웃었다.

방금 전까지 예를 차리던 모습과는 상반된, 어딘가 여유로움이 담긴 표정이었다.

“이것 참, 이번엔 제법 자연스러웠던 것 같은데.”

“…….”

“내 아우는 눈치도 빠르지.”

작게 웃은 그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반백의 시종은 사라지고 낯선 여자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우뚝 솟은 키와, 허리까지 드리워진 태양을 고스란히 가져온 것처럼 찬란한 금발이었다.

그 아래로 황족의 특징인 오묘한 자청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또렷하게 솟은 콧대, 입 동굴을 보이며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매까지 꼭 그린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냥 속아 주는 척이라도 하면 어디 덧나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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