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53)화 (53/91)

53화.

“음? 자네가?”

굳이?

내가 눈썹을 들썩였다.

차를 마시던 곳은 백작저의 정원이라, 채 오 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방금 도착했으니 두 사람은 인사 나누시게.”

내 말에 로저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대공비 전하와 올슨 백작 부인의 시간을 빼앗았으니, 이 정도는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공비 전하를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한 번 더 누리고 싶은 건 욕심일까요?”

…이제 막 얼굴 공격을 대놓고 하네.

황제의 소꿉친구로 지낸 짬이 있다 이거지.

관록이 느껴지는 노련함에 이번에도 역시 거절이 안 나왔다.

“그럼 부탁하지, 로저 공작.”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까지 가는 길은 짧았지만, 로저 공작은 황성에서처럼 아주 정중하고 능숙하게 나를 데려다주었다.

내가 마차에 완전히 오르자 그는 내 손을 놓아주며 아쉽다는 듯이 웃었다.

“이번엔 길이 유독 짧군요.”

“가까운 정원에서 차를 들고 있었으니.”

“그래도 클라우드 대공비 전하를 두 번이나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얻다니, 저는 운이 좋은 모양입니다.”

“자네가 청해 놓고. 혹시 아부에 소질이 있던가?”

“그럴 리가요. 실은….”

짧게 숨을 들이쉬고 그가 말했다.

“다시 대공비 전하를 뵐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네, 대공비 전하께서 기회가 되면 보자고 하셨으니까요.”

“의례적인 인사를 진심으로 여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픽 미소를 흘리며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지자 그가 푸스스 웃었다.

“말씀드렸던가요? 전 대공비 전하의 그런 직설적인 면모를 좋아합니다.”

“취향이 독특하군.”

“전하께서 그만큼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으신 거겠죠.”

“흐음.”

“사실, 그래서 대공비 전하와 가까워지고 싶기도 하고요.”

오묘한 어조였다.

“안 됩니까?”

이어서 로저 공작은 호의인지 버릇인지 모를 얼굴로 야살스럽게 눈을 접어 내렸다.

내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하면서도 태연자약한 게, 이안과는 영 딴판이었다.

‘여자 여럿 울렸겠네.’

내가 이안 클라우드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 시점에서 도끼병에 열 번은 걸렸을 것이다.

이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로저 공작은 나를 향해 말간 얼굴을 해 보였다.

“내가 이미 결혼한 사람인 걸 잊은 건 아니겠지?”

“하하, 설마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은 로저 공작이 나를 조심스럽게 놓아 주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자네도 백작 부인과 즐거운 시간 보내게.”

“예.”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헤이든 로저 공작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빠른 시일 내에 또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해가 비스듬히 저물어가는 저녁이었다.

홀을 가로질러 방으로 올라가려던 나는 계단에서 다시금 이안을 마주쳤다.

‘저번부터 너무 자주 마주치는 거 아냐…?’

어떻게 매번 일 층의 로비, 혹은 계단, 그것도 아니면 이 층의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는 건지.

애당초 이안의 집무실은 삼 층이고, 침실은 이 층 동쪽 날개 끝이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야 정상이었다.

‘…설마 날 기다리기라도 한 건가?’

의문이 찰나 스쳐 갔지만 그럴 리 없었으므로 잽싸게 갈무리했다.

‘요새 도끼병이 좀 생긴 것 같아.’

깡통 로봇 이안이 누군가를 기다린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만약 그렇다고 해도 넌 내가 아니라 다이아나를 기다려야지.

내 속내를 알 리 없는 이안은 나를 빤히 응시하다 인사를 건넸다.

“외출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네, 볼일이 생각보다 금방 끝나서요.”

“…금방이요.”

이안이 흘끗 홀의 통창 너머로 지는 해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그의 눈길이 다시 나에게 고정되었다.

“요즘은 주말에 더 바빠 보이시는군요.”

“공교롭게도 그렇네요.”

사실, 오늘도 원래라면 이안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벌써 몇 주째더라? 이 주?’

수업을 좀 오래 안 하긴 했군.

하지만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매주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이안보다야 당장 올슨 백작 부인과의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어쩐지 이안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조금 일그러진 것 같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몇 주 연속 미뤄 둔 건 조금 그랬나?’

어느덧 서쪽으로 넘어가며 붉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해를 쳐다보다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다음 주에는 함께 일정을 잡아 봐요. 당장 급한 일은 없으니까 돌아오는 주말에는….”

“그건 조금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이안이 내 말허리를 자르고 고저 없이 말했다.

졸지에 말문이 막힌 내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내가 이 주 연속 펑크 냈다고 본인도 그러겠다고 하는 거야?’

심보 한번 치졸하고 고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그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황금색 인장이 박힌 편지 봉투였다.

“황성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부인과 제 앞으로요.”

…응?

***

나는 지금 책상 앞에 앉아 낯선 초대장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샹들리에 빛에 비추어 보고 램프 아래서도 확인해 보고 창문에 대어 보기도 했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이건 정말 황실에서 온 게 맞았다.

그것도 여러 귀족에게 공문처럼 배포되는 서신이 아니라, 황제가 손수 찍은 인장이 박힌 개인 초대장.

‘갑자기 이렇게 뜬금없이…?’

양손을 엮어 턱을 받친 채 심각하게 고민했다.

‘가만 보자, 황제가 어떤 인물이었더라.’

당연하게도 다이아나를 제외한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내 관심 밖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떠올리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소설 속 황제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완벽한 성군이었다.

언제나 백성을 우선시하는 통치자임과 동시에, 말 한마디로 신하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인가.

자신의 황위 계승을 위협할 수도 있었던 이복동생인 이안을 언제나 친동생처럼 아끼고, 친동생인 막내 황녀와는 20살 넘게 차이가 나서인지 마냥 예뻐하며 귀애했다.

황후와의 금슬 역시 좋아 후궁 역시 두지 않았고.

‘그야말로 이상적인 지도자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그건 남자 주인공 이안의 옆에 완벽한 조연만을 두고 싶어 했던 작가의 욕망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치만 엘로이즈와는 딱히 접점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안을 유달리 아끼는 황제와 달리, 이안 본인은 황제와 강박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했다.

월례 회의나, 업무차 대공 신분으로 황성을 찾는 날이 아니면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거의 만들지 않았다.

‘모친이 다른 대공이 황제 옆에서 알짱거리는 게 좋게 보일 리 없으니까.’

이안이 그런 태도를 고수하니 자연스럽게 엘로이즈도 대공비로 참석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 외에는 황제를 알현한 적이 없었다.

‘황제가 가끔 이안을 불러들인 적은 있었지만, 엘로이즈까지 공식적으로 초대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이것도 브릴루즈 공작가 시즌 파티의 연장선인 걸까?

워낙 수도 귀족들의 관심을 받고 있으니 그게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썩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흐음.”

콧소리를 흘리며 봉투를 열어 초대장을 확인했다.

이안의 말대로 초대장에는 다음 주 주말, 대공 내외가 황성을 방문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래도 황녀처럼 다짜고짜 호출을 하지는 않아서 다행인가.’

그랬으면 이번에야말로 꾀병이라도 부려 드러누웠을 것이다.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설렁줄을 흔들어 비비를 불렀다.

“마님, 부르셨어요?”

“그래, 비비. 빠른 시일 내로 마담 제드를 불러 줄래? 황성 입궁할 때 입을 옷을 맞춰야겠다.”

“네, 그렇게 할게요.”

꾸벅 인사하고 나가는 비비를 보다가 초대장을 다시 봉투에 넣어 서랍 아래에 넣었다.

뭐, 가 보면 알겠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