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런 건 시기가 중요하니까, 적당히 모레 새벽 즈음 릴튼 거리의 중앙 광장에 대자보를 걸지. 그곳이라면 이목을 끌기는 충분할 테니까.”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수도의 번화가, 그것도 중앙 광장만큼 소문이 빠른 속도로 퍼지는 곳도 없었다.
아마 그곳이라면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수도 전역에 올슨 백작 내외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다.
‘가만, 그럼 대자보를 붙이는 건 길드를 고용해야 하나?’
얕은 생각에 감겨 있을 즈음, 맞은편의 백작 부인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대공비 전하.”
“응?”
“왜 이렇게 저를 도와주십니까? 저에게는 감사한 일입니다만, 사실 대공비 전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잖습니까.”
“아, 그거.”
뒤늦게 탄성을 뱉었다.
이어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감동적인 건 감동적인 거고.
내 목적은 목적이지.
“…미래를 위한 투자?”
“예?”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선선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람 좋다는 게 뭔가. 다 돕고 사는 거지. 그래도 정 고마우면 일이 끝난 뒤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제가 도움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당연하지.
정확히 3년 후 당신이 발견해서 투자받아 개발할 그 광산이 바로 노다지랍니다.
음흉한 미소가 삐쭉 새어 나올 것 같아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일단은 이 일에 집중하는 게 좋겠군. 추억을 지킬 준비는 되었는가?”
***
대공저로 돌아온 나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바쁘게 계단을 타고 올라가던 차에 일 층으로 내려오던 이안과 마주쳤다.
그는 잰걸음으로 걷는 나를 의아하게 보다가, 먼저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아침 일찍부터 나가시더니,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군요.”
“네, 볼일이 빨리 끝나서요.”
그런 것치고는 벌써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지만.
내 쪽에서 짧게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이안의 목소리가 다시금 나를 붙잡았다.
“돌아오셨으니, 주말 저녁은 함께 보내십니까?”
“아.”
맞다, 오늘 주말이지.
올슨 백작가의 일에 몰두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눈을 한 바퀴 굴린 뒤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듯 아래쪽에서 삐딱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 오늘따라 더 눈꼬리에 심술이 그득그득한 것 같지?’
혼자 일하다가 또 심보 꼬이는 일이 있었나.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예의 얼굴로 웃었다.
“아뇨, 바쁘니까 나중에 봐요.”
“아니, 부인….”
더 이야기가 길어질세라 나는 까딱 고개를 숙여 주고 몸을 돌려 다시 계단을 올랐다.
어쩐지 이안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뒤에서 또다시 허망한 시선이 느껴졌다.
***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빠르게 집사를 불렀다.
“마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집사. 공작저 지류 보관실 열쇠를 자네가 가지고 있지? 전에 쓰던 노트가 낡아서 필기용 종이를 새로 하나 만들까 하는데.”
“예, 필요하시다면 아랫것들을 시켜 준비해 둘까요?”
“아니, 내가 직접 확인하려고. 자르지 않은 종이도 있겠지?”
“물론 있습니다만… 아이들을 시키지 않으시고.”
대형 종이에 대자보 써 붙일 거라는 말을 어떻게 하니.
“저번 종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번엔 재질을 살펴볼 생각이야. 필요하다면 자르는 건 부탁하도록 하지. 해서 열쇠 좀 줄 수 있겠나?”
집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길드에서 심부름꾼 하나를 불러 줬으면 좋겠군. 며칠 전에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데 찾지를 못해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길드는 제가 임의로 찾아도 되겠습니까?”
“집사가 알아서 잘하겠지.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마님.”
미안. 이건 거짓말이다.
길드원을 불러 주면 요긴하게 써먹긴 하겠지.
내가 태연하게 미소 짓자 꾸벅, 인사한 집사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 뒤 깃펜을 고쳐 잡았다.
‘그럼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좀 해 볼까.’
이제 와 고백하지만, 나는 제법 글 쓰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아, 물론 소설이나 수필 같은 글들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런 걸 잘 썼으면 그 작가 소설을 보고 분개하는 대신 내 취향에 맞는 썼겠지.’
잠깐의 탄식이 스쳤다.
내가 잘 쓰는 글은, 조금 다른 종류였다.
굳이 말로 하자면 전직 키보드 워리어답게 온갖 이유를 든 공론화와 그에 관한 피드백, 구구절절한 사연을 곁들인 해명문이랄까.
원래 좀 오래 인터넷 생활을 하다 보면, 한 번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서로 문서를 주고받는 일이 생기지 않는가?
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정적 호소와 피해자 코스프레를 적당히 섞은 글로 늘 동정표를 사곤 했었다.
‘이런 걸 여기서 써먹을 줄 누가 알았겠어?’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자신 있다고.
씨익 웃은 내가 깃펜을 고쳐 들었다.
다이아나, 딱 기다려.
네 아군 하나 더 대기시켜 놓을 테니까!
***
올슨 백작 부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내가 양념을 칠 것도 별로 없었다.
있는 그대로 감동받지 않고는 못 배길 스토리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최대한 생생하고 자세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저는 과거 올슨 백작가에 몸담고 있던 사용인입니다. 비록 이름을 밝힐 순 없으나, 올슨 백작 부부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결코 모른 척 넘길 수 없어 이 글을 적습니다.
바야흐로 20년 전, 언덕 위의 비자나무 아래에서 운명 같은 첫 만남을 가진 한 소녀와 소년이….〉
몇 시간 후, 나는 종이를 빼곡히 채운 글씨를 보며 펜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마치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를 옆에서 보고 들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이 상황에 처한 올슨 백작 부인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한 스푼 넣어 곁들이니 그야말로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명문이 탄생했다.
종이를 들어 내용을 훑은 나는 절로 터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크으… 찢었다.”
이 글을 보고 누가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시, 내 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니까.’
뿌듯함이 마구 솟아났다.
“이제 이걸 옮기기만 하면 돼.”
이어서 큰 종이를 꺼내 그 내용을 다른 필적으로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완벽하게 옮겨 적고, 길드의 심부름꾼을 불렀다.
창문을 통해 신호를 보낸 지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어두운 복장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종이를 릴튼 거리의 중앙 광장, 그것도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걸어놓게. 사람들이 이 대자보를 바로 발견할 수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네. 비밀은 완벽하게 지키겠지?”
“그럼요,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천으로 꽁꽁 감춘 하관 부분이 씰룩거렸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그럼 부탁함세.”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길드의 심부름꾼이 소리 없이 사라진 뒤에야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응접실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좋았어.’
덫은 쳐 놓았으니, 이제 먹이가 잡히기만을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