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걸렸다.’
나는 스멀스멀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내린 채 시선을 깔아 그녀를 쳐다보았다.
“뭔가?”
“…정말, 제게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까? 광산 개발을 막을 수 있다고요.”
조금 전 퀭한 눈으로 나를 쫓아내려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내가 씨익 웃었다.
“황제 폐하께선 백성들의 의견에 언제나, 귀 기울이는 분이라고만 말해 두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 치맛자락에서 떼어 놓았다.
“그럼, 생각해 보고 연락 주게.”
***
백작 부인이 완전히 마음을 돌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튿날 오전, 긍정의 의미가 담긴 서신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빨리 결론이 났군.”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번째 방문한 백작저의 응접실에서 백작 부인은 따뜻한 차와 담백한 다과를 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던 그녀는 이내, 자신만 간직하고 있던 남편과의 이야기를 내게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올슨 백작, 그러니까 필릭스와 만난 건 20년 전이었습니다. 제가 열세 살, 필릭스가 열 살 때였으니 아주 어렸군요.”
두 사람, 연상연하였어?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도망간 곳이 그 비자나무 아래였는데, 하필이면 필릭스도 그곳을 자기 아지트 삼고 있었지 뭡니까.”
올슨 백작 부인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올슨 백작 부인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처음엔 이곳은 자기 구역이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에, 뭔 놈의 꼬맹이가 이렇게 경우도 없이 숙녀를 대하나 생각했죠. 나중에 들어 보니 필릭스도 제가 아주 밉상이었다더군요.”
그녀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에는 영역 다툼을 하다시피 했어요. 보통 그런 식의 첫 만남이면 마주치기 싫어서 피할 만도 한데, 필릭스도 저도 그렇게 하지 않았죠.”
“어떤 의미로는 그때부터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군.”
“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역시 서로를 향한 관심이었던 것 같지만, 그때는 몰랐죠. 어렸으니까요.”
올슨 백작 부인이 으쓱였다.
“지겹게 다투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약속처럼 그 비자나무 아래에서 만났답니다. 어느 날은 제가 쿠키를 구워 갔고, 다른 날은 필릭스가 저에게 주겠다며 꽃을 꺾어 오기도 했어요.”
“…….”
“그렇게 꼬박 십 년을 만났죠, 그 나무 아래에서.”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오랜 시간을 꾸준히 지켜 온 두 사람이 새삼스럽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아버지인 다우닝 자작이 그러시더군요. 제 혼처가 정해졌다고요.”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번듯한 백작가 자제인 필릭스와 달리 저는 가난한 자작가의 막내딸이었어요. 아버지는 저를 부유한 상인에게 시집보냄으로써 기울어가는 가세를 바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딸 가지고 장사하는 건 엘로이즈의 부친이나 이쪽 부친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군.
속으로만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저는 그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여인의 미덕은 좋은 혼처를 찾아 남편과 가문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고작 스무 살을 넘긴 저를 마흔이 넘는 상단주에게 보내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흔?”
정정한다.
엘로이즈의 부친인 알피어스 후작은 양반이었다.
이안은 황족에 잘생긴 또래이기라도 했지.
나는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나라도 스무 살 많은 노친네한테 시집가라고 하면 그러겠다.
연신 공감 어린 끄덕임을 보냈다.
“한데 고작 스물을 넘은 자작가 막내 여식이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참을 방황하다 해가 진 뒤에는 그 비자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었죠.”
“…….”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밤이 깊도록 울고만 있는데, 필릭스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한참을 뛰어다녀 흐트러진 모습으로요.”
잠깐 과거를 회상하듯 입을 다물었던 그녀가 한 박자 쉬고 말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제 손을 잡고 말하더군요.”
“…….”
“자기와 결혼하자고요.”
“이야, 죽이는데.”
나도 모르게 걸쭉한 감탄이 터졌다.
“…대공비 전하?”
나의 경박한 추임새에 올슨 백작 부인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흠, 별거 아닐세.”
뒤늦게 헛기침을 하고서 계속하라는 듯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흥미진진하잖아.’
남의, 그것도 사별한 사람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저 건조하게 듣기엔 둘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흥미로웠다.
“누군가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아주 황홀하다던데,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필릭스가 그 비자나무 아래에서 제 손을 잡은 순간 깨달았죠. 아주 오래전부터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하고.”
꼬박 10년을 붙어 다녔는데 그걸 몰랐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합리적인 의문이 솟았지만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필릭스가 그러더군요. 제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결코 그 상인에게 보낼 수 없으니 자기와 결혼하자고.”
이번에도 걸쭉한 추임새가 터질 것 같아 입을 꾹 말았다.
“어려웠지만 결국 제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우리는 그 비자나무 아래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나는 생각했다.
내가 백작 부인이었어도 결코 그 비자나무를 포기할 수 없었을 거라고.
“…결혼 이후에도 우리는 종종 그 비자나무 아래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필릭스와 내가 오롯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필릭스의 몸이 나빠진 이후로는 자주 가지 못했지만.”
내가 알기로 백작은 몇 년 전, 그의 영지를 휩쓸고 지나간 전염병의 후유증으로 오랜 시간 앓다가 명을 달리했다.
이 세계에 현대의 의술이 존재했다면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았기에 백작 부인은 그가 죽어 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둘 사이에는 후사도 없었지.’
그게 백작의 문제였는지, 백작 부인의 문제였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가 후사도 없이, 너무 이른 나이에 남편을 잃은 건 애도할 일이었다.
“…자네도 많이 괴로웠겠군.”
“아니요.”
내 안타까운 어조에 백작 부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10년이었습니다.”
그녀의 마른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드리웠다.
그건 필시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필릭스는 눈을 감기 전 그 비자나무 아래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가신들 모두가 말렸지만 저만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럼….”
“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 비자나무 아래에서 그를 보내 주었습니다. 필릭스는 꼭 잠이 든 것 같은 얼굴로 눈을 감았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
“별거 아닌 이야기지요.”
“아니!”
내가 그녀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듯 버럭 소리쳤다.
백작 부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공비… 전하?”
그녀는 ‘어째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같은 표정으로 나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네, 대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숨기고 살았단 말인가?”
“숨긴 게 아니라 구태여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갖겠습니까.”
“틀렸대도!”
“대, 대공비 전하…?”
당황한 올슨 백작 부인을 보며 생각했다.
이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 로맨스 소설로 썼으면 대박 났을 거다. 헤비 독자의 감이 말하고 있다고.’
살짝 젖은 눈가를 닦은 후에야 손수건을 접어 내려놓은 난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자네의 마음은 백번 이해했네.”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네는 걱정일랑 말게, 이런 이야기라면 누구든 마음이 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걸세.”
“…정말 이걸로 괜찮은 겁니까?”
정작 백작 부인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나는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확신했다.
“충분하다네.”
충분하다 뿐인가.
지금 나도 눈물이 줄줄 흐를 것 같은 걸 참느라 목이 멜 지경인데.
“대자보의 내용은 내가 쓸 테니, 자네는 이제 지켜보고 있게.”
그녀를 바라보며 보란 듯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