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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47)화 (47/91)

47화.

“…저와 백작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요?”

“그래.”

내 확답에 올슨 백작 부인이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내 작전은 간단했다.

명분이야 만들어 주면 그만 아닌가.

백작 부인이 꾸역꾸역 광산 개발을 훼방 놓고 있는 명분 말이다.

“…필요 없습니다. 백작과 저 사이의 개인적인 일을 얼굴도 모르는 다수에게 알리고 싶지는….”

“그럼 이대로 땅을 뺏길 건가?”

내 물음에 그녀가 입을 꾹 물었다.

‘하여간, 고집은 더럽게 세서.’

뭐, 이해는 간다.

열렬히 사랑한 사람과의 추억이 불특정 다수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큼 꺼려지는 일도 없을 테니까.

가벼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자네가 그 땅과,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는 설득력이 필요해. 말했다시피 지금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버티는 건 그저 아집처럼 보일 뿐이라네.”

“백작과 저 사이의 이야기가 후작가의 광산 개발을 막을 만큼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따지자면 그렇지. 근데 자네, 그거 알고 있는가?”

야살스럽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스토리텔링에 약하다네.”

“…예?”

백작 부인의 표정이 다시 어정쩡해졌다.

나 이 표정 안다.

‘내가 너한테 별로 유감은 없지만 너 아까부터 계속 헛소리한다.’ 같은 얼굴이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사람들이 현실성 없는 소설에 열광하고, 허황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전설이나 신화가 몇 세기에 걸쳐 이어지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

“사람들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하나 백작이 타계한 후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 않은 지도 1년이 넘었고, 귀족들 사이에서 제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것 역시 압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누가 이제 와서, 백작과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어주겠습니까?”

그 버석한 눈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자기객관화가 너무 잘 되어 있는데…?’

그녀의 말이 맞았다.

얼핏 엘로이즈와 비슷해 보이는 상황이긴 하나, 올슨 백작 부인은 사정이 많이 달랐다.

나는 이안과의 관계 변화를 보여 줌으로써 이목을 끌 수 있었지만, 백작 부인은 당장 사교 행사에 얼굴을 비춘다고 해도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메리 후작가는 사교계 입지가 단단한 가문입니다. 저와는 다르게요. 그런 후작가를 상대로 이제 와 여론을 돌려 보겠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지.”

“잘 아시는군요.”

그걸 모를 리가 있나.

그런 헛수고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귀족들을 직접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겪어 보지 않았는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거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꼼수도 전략이라고.

내가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 혹시 대자보라고 들어는 보았나?”

“대자보요?”

“그래. 원래는 정치나 사회 흐름에 대한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벽에 거는 벽보지만….”

내가 의뭉스러운 얼굴로 테이블을 탁, 쳤다.

“우리는 그걸로 여론을 움직일 거라네.”

내가 마이너 팬덤으로 다년간의 SNS 생활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있다.

대중은 ‘사실’에 관심이 없다.

이슈가 하나 터지면 다들 공정하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척하기 바쁘지만, 실상을 보면 그저 더욱 흥미롭고 자극적인 요소를 좇아 반응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자극적인 것에 심취한 나머지 진짜 사실을 외면하기도 한다.

‘인간의 본능이지, 본능.’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는 이 세계에 객관적 사실을 담은 신문보다 진실의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익명의 소식지에 더 열광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걸 이용하는 게 뭐가 나빠?’

“저… 대공비 전하?”

“응?”

“표정이….”

올슨 백작 부인의 떨떠름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 별거 아닐세.”

저번에 황녀 앞에서도 그렇고. 이럴 때마다 비열한 표정 짓는 거 그만둬야 하는데.

큼, 헛기침을 하고 예의 선선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봐야 이미 나를 반쯤 꺼림직하게 보고 있는 올슨 부인의 눈빛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백작 부인의 눈빛이 더 탐탁잖아지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말인데, 지난 1년간 이 저택을 나간 사용인이 몇이나 되지?”

“사용인 말씀이십니까?”

“그래, 정확히는 백작이 타계하고 일을 그만둔 사용인 말일세.”

백작이 죽고 백작 부인이 반쯤 폐인이 되어 가문을 방치하자, 견디다 못한 사용인들은 하나둘씩 백작저를 떠났을 것이다.

응접실까지 들어오면서 본 음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내 질문에 잠깐 눈을 굴리던 백작 부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기존에 있던 사용인 중 팔 할은 떠났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의연하게 끄덕이고선 응접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백작저 안에서만 비밀스럽게 돌던 사실이 새어 나가도 누군지 추적을 하기가 어렵겠군.”

“…실례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 바퀴 시선을 굴린 내가 백작 부인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쓸 대자보는, 이 저택에서 일하던 사용인이 쓴 것이 될 걸세.”

“…예?”

당연하게도, 황당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대공비 전하와 제가 쓰는 대자보가 어찌 전 사용인이 쓴 대자보가 됩니까?”

하이고, 이 고지식한 귀부인을 어쩌면 좋을까.

새어 나오는 한숨을 틀어막고 말했다.

“자네, 혹시 제삼자 효과라는 말을 아는가?”

대답을 하는 대신 즐거운 목소리로 반문하자, 올슨 백작 부인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정보가 있을 때, 당사자가 직접 그 사실을 전달하는 것보다 그 사람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제3의 인물이 전달하는 것을 사람들은 더욱 신뢰한다는 용어라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기 어렵겠지?

찡긋 눈짓한 내가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했다.

“자네 말대로, 사교계 안에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 자네가 직접 대자보를 써 붙여 봐야 귀족들은 올슨 백작 부인이 땅을 빼앗기기 싫으니 별 이상한 짓을 다 한다고 여길 걸세.”

내 가감 없는 직설적인 표현에 올슨 백작 부인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 대자보를 쓴 게 자네가 아니라, 이 저택을 떠난 사용인 중 하나라면 얘기가 다르지.”

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일을 그만둔 사용인이 붙인 대자보라면 확실히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겠군요.”

“바로 그거라네. 아주 잘 아는군?”

검지를 쭉 펴서 빵, 총알을 쏘는 시늉을 했다.

자신을 향한 내 손가락을 물끄러미 보던 백작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 아닙니까?”

“자네는 이 와중에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있나?”

혀를 쯧쯧, 찼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어쭙잖으면 거짓말이고 잘 치면 사기’라는 말이 있다.

여론 싸움에서 결정적인 순간 아주 소프트한 사기를 곁들이는 것만큼 잘 먹히는 방법도 없다는 뜻이다.

팔짱을 낀 채 그녀를 훑어보던 내가 비스듬하게 물었다.

“익명의 사용인 신분을 빌려 세간에 알린다고 해서, 백작과 자네 사이에 있던 일이 거짓이 되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누가’ 이 사실을 알렸는가는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네.”

말허리를 자르고 으쓱이자 백작 부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여간, 아주 대쪽 같은 것도 문제야.’

당장 광산이고 나무고 다 거덜 나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한가?

개탄스럽게 그녀를 보다가 요란하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늉을 했다.

“뭐,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네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그냥 이참에 메리 후작가에게 광산을 넘기고….”

“자, 잠깐.”

올슨 백작 부인이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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