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을 양팔로 허공을 휘휘 저었다.
“마님…? 괜찮으세요?”
“응? 아무것도 아니란다.”
걱정스럽게 묻는 비비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신 차려!’
이안 그놈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고 미인계를 펼쳐서 잠깐 당황했을 뿐이지. 난 미인에 약하니까.
절대로 그 순간에 이안한테 설렌 게 아니다. 응.
수도의 모든 여자들이 이안에게 홀딱 반한다고 해도 나만은 절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안은 누가 뭐래도 다이아나의 소유니까!
얼굴 따위에 홀려서는 안 된다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들리니, 다이아나? 이안이 수도 최고의 인기 신랑감이 되는 소리!’
진달래 꽃길은 내가 깔아 놓을 테니까 우리 다이아나는 고상하게 즈려밟고 가.
‘마음 같아선 꽃 대신 이안을 사뿐히 즈려밟으라고 하고 싶지만.’
그게 안 된다면 너한테 목매는 조신한 남자로 만들어 줄게.
뿌듯한 상상을 마친 내가 상쾌하게 쭉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비비, 준비를 도와주렴. 조찬을 들어야겠으니.”
***
1층 다이닝 홀로 내려갔을 때는 언제나처럼 이안이 먼저 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다이닝 홀 입구 바깥쪽에 있는 괘종시계를 흘끗 확인했다.
9시를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시간도 맞춰서 내려왔는데,’
대체 저 인간은 얼마나 일찍 내려오는 거야?
혹시 출근 시간처럼 9시 10분 전 다이닝 홀 입장, 뭐 그런 거 해?
속으로 빈정거리던 나는 순간 이안이면 정말 그럴 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대공.”
“간밤엔 잘 주무셨습니까, 날씨가 좋군요.”
그래, 이거지. 고장 난 AI 같은 대답을 들어야 하루를 시작하는 맛이 나지.
저 말을 듣고 어김없이 힘이 빠지는 걸 보면 어젠 잠깐 내가 들떴던 게 확실하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종이 빼어 주는 의자에 앉았다.
“이제 인사 패턴은 좀 바꿔 보시는 게 어때요?”
그러자 선심 쓰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듣고 싶은 인사가 있으면 말씀해 보십쇼.”
“…됐어요. 하던 대로 하세요.”
이거지, 이 인간은 그냥 갱생이 필요한 깡통 로봇일 뿐이다.
내가 냅킨을 무릎 위에 펴자 사용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접시를 내어 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시금치 퓌레를 곁들인 차가운 닭가슴살 요리입니다.”
“고마워.”
평소처럼 인사하던 나는 묘한 기류를 느끼고 멈칫했다.
평소라면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접시를 둔 채 사라졌을 사용인이 오늘따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둘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헛기침을 하고서 샤샥 사라졌다.
‘뭐지, 이 분위기?’
그러고 보니 오늘 다이닝 홀 입구에 서 있던 하녀들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은데.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땐 저마다 촉촉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용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나 저 표정 안다.
팬덤 내에서 자기들이 엮는 커플링이 사이좋게 붙어 있을 때 짓는 표정이다.
‘부쩍 관심이 많아진 건 비단 귀족들만이 아니었군.’
애써 피하던 시선을 돌려 이안 쪽을 흘끗 곁눈질했다.
금방 눈치챈 나와 달리 이안은 이쪽으로 쏟아지는 눈길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둔한 것도 능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이안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안 드십니까?”
“아, 아뇨, 먹을 거예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스푼을 들었다.
며칠 전 조찬을 기점으로 이안은 나와 속도를 맞춰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나보다 먼저 접시를 비우면 디저트를 받는 대신 식기를 내려놓고 신문 따위를 보며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이제 제법 적응이 된 줄 알았는데, 이 순간만큼은 그게 견딜 수 없이 신경 쓰였다.
‘미치겠네,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건데.’
꿋꿋하게 첫 번째 요리를 비우고서 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색함을 대화로 승화시켜 보기 위해서였다.
“오늘 받은 소식지에 또 이야기가 실렸더라고요.”
테이블 위 물잔을 흔들던 이안이 내 옆에 놓인 소식지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그 소식지입니까.”
“네, 대공과 제 주말 나들이에 대해 글을 썼던데요.”
이제 이안한테 돌아올 대답은 ‘그렇군요’, ‘그렇습니까’, ‘네’ 셋 중 하나겠지.
초연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의 정적 후 이안이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었습니까?”
“네?”
“내용이요.”
그가 재차 묻듯 나를 쳐다보았다.
예상을 한참 벗어난 반응에 잠깐 멍해져 있던 내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야, 그건 왜 묻는데?’
“그게… 궁금하세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자 이안이 도리어 물었다.
“안 됩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남 시선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던 인간이 갑자기 소식지 내용 같은 걸 물어보니까 그렇지.
내가 당황하는 동안에도 이안은 돌아올 답을 기다리듯 꼿꼿하게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답을 듣지 않고서는 떨어지지 않을 눈길이었다.
‘듣고 싶은 대답이 있을 때만 집요하게 구네.’
결국 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음… 뭐, 대단한 건 아니고요. 대공 내외의 사이가 꽤 다정해 보였다. 특히 구둣가게에서 제게 구두를 신겨 주시던 대공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 정도였던 것 같네요.”
답지 않게 가만히 귀 기울여 듣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 ‘예행연습’한 보람이 있었겠군요.”
어째 이번에도 연습에 강조가 들어간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소식지가 제법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네, 읽어 보니 꽤 재밌더라고요. 필자의 입담도 그렇고. 늘 추잡스러운 소문만 듣다가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들으니 어찌 좋지 않겠어요?”
마지막 말에는 나 역시 무게를 실었다.
좀 찔려 보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정작 이안은 아무런 타격조차 없는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다가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읽어 봐야겠군요.”
“…네?”
“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읽어 보겠다 말씀드렸습니다.”
“…대공께서… 소식지를요?”
이안 클라우드가 신문이 아니라 사교계 가십거리를 읽는다고?
내겐 다이아나가 아카데미 수석을 놓치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소리처럼 들렸다.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죠?”
근데 넌 저번 주만 해도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엔 관심 없다며.
소식지 1면에 난 기사를 보여 줬는데도 시큰둥하던 이안의 반응을 떠올리고선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혹시 시금치 퓌레가 상했나?’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미심쩍은 눈으로 식탁 위를 훑어보았으나, 오늘도 주방장이 한껏 솜씨를 낸 접시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도, 이안은 또다시 자청색 눈동자를 내게 고정시킨 채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주 쳐다봐?’
시선을 견디다 못한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네, 뭐… 저희 이야기뿐 아니라 사교계 대부분의 가십이 실려 있으니 읽어서 나쁠 건 없겠죠.”
“소식지는 익명 발간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네. 여자인지 남자인지,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고 하더군요. 사교계 이야기를 낱낱이 알고 있는 걸 보면 신분은 귀족일 확률이 높지만.”
“그렇습니까.”
이안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지가 나오는 주기는 어떻습니까.”
“바로 챙겨 보시게요?”
구독해도 바빠서 방치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 사람이.
“안 됩니까?”
아니 안 될 건 없다니까….
정말 허락이라도 구하는 것처럼 날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혼란스러워졌다.
혹시 AI 고장 난 거 아냐? 버그? 뭐 그런 건가?
그러는 동안에도 이안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날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주기는 일주일 정도고, 대충 살펴보니 열 개에서 열다섯 개 정도의 글이 실리는 것 같아요. 이전 소식지에서 이어지는 후속 칼럼도 몇 개 있고요.”
이걸 내가 왜 이안에게 설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어색한 건 이게 뭐라고 정말 내 말을 경청하고 있는 이안이었다.
내게서 시선을 거둔 그가 다시 식기를 집어 들었다.
“알겠습니다.”
“…….”
“제 몫의 구독은, 집사에게 말해 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