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서류를 뒤적이던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네. 황녀님 탄신일이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여러모로 두 분한테 궁금한 게 많으신 모양입니다.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브릴루즈 공작저 방문 이후로 귀족들 사이에서 떠돈다던 이야기가 벌써 황성으로 들어갔나.’
황제야 언제나 제 이복동생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던 데다가, 이번엔 황녀까지 엘로이즈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귀찮아지겠군.’
미간을 매만진 이안이 끄덕였다.
“알겠다, 기억해 두지.”
“그럼 서류는 돌아오는 주말까지 처리해 주십시오.”
꾸벅 인사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던 카일이 우뚝 멈춰서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전하, 한 마디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언제부터 네가 내 허락을 맡고 말을 올렸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도 별 타격이 없는 듯 실실 웃은 카일이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좀 솔직해지십쇼. 자꾸 뻗대지 마시고요.”
“무슨 소리지.”
“으이그, 아시면서 또 그러신다. 아무튼 전 요즘 두 분 보기 좋습니다.”
“카일 엘제이어.”
“어이쿠, 표정 살벌하시네. 그럼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진짜 가 보겠습니다아.”
이안이 말을 하기도 전에 껄렁하게 인사한 카일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작은 마찰음과 함께 닫히는 문을 허망하게 쳐다보던 이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날이 갈수록 방자해지는군.”
남들은 눈만 마주쳐도 덜덜 떤다는 대공에게 매번 저런 태도를 고수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는 내내 손으로 덮고 있던 책상 위의 큐빅을 쳐다보았다.
‘솔직하라니. 대체 뭘….’
속으로 읊조리던 그가 멈칫했다.
예고 없이 엘로이즈의 얼굴이 불쑥 떠오른 탓이었다.
“…….”
근래 들어 엘로이즈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다.
대부분은 그녀의 괴상한 행동이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의중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었지만.
이혼이니, 새 사람이니 하는 소리를 하다가도 자신을 좋아한다며 울먹이는 대공비도, 그런 대공비에게 신경이 쏠리는 자신도 도통 어떻게 규정지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대공께서 신겨 주세요.”
“나들이는, 나쁘지 않았나.”
오묘한 표정으로 큐빅을 쳐다보던 이안이 그것을 집어 들어 두 번째 서랍에 넣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했군.”
한동안 집무실엔 종이 팔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
외출로 어수선했던 주말이 지나고, 한 주의 시작이 밝았다.
드디어 내 앞으로도 아리아 소식지가 도착했다.
“마님!”
비비가 한 손에 소식지를 들고 방 안으로 팔랑팔랑 걸어 들어왔다.
늘 서신이나 종이는 은쟁반에 담아 오더니, 오늘은 소식지 한 장만 달랑 들려 있었다.
‘가만 보면 신날 때마다 뭐 하나씩 꼭 빼 먹는단 말이야.’
귀여워서 그냥 두기로 했다.
그사이 침대 앞까지 다가온 비비가 배실배실 웃었다.
“여기요!”
“오늘 자 소식지니?”
“네, 마님께 빨리 드리고 싶어서 제가 정문까지 다녀왔어요.”
“저런,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지만, 이번 주에도 주인어른과 마님에 관한 글이 실려 있을 것 같아서요.”
저번 주말 외출에 동행했던 비비는 부쩍 나와 이안의 사이에 관심이 많아진 눈치였다.
뭘 그렇게 관심을 가질까 싶다가도, 2년 내내 생판 남처럼 지내던 인간들이 갑자기 에스코트니, 나들이니 하며 함께 붙어 다니는 꼴을 보면 나 같아도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남의 연애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는 법 아닌가.
물론 이안과 나는 연애 중이 아니지만.
예의 웃음과 함께 비비에게서 소식지를 받아 들었다.
“그럼 볼까.”
이번 주 소식지의 1면에는 다른 기사가 실려 있었다.
〈메리 후작가와 올슨 백작가의 보석 전쟁!〉
“음? 이건 또 무슨 소리래.”
강렬한 타이틀 아래 적힌 내용은, 수도의 유명한 두 귀족가가 하나의 광산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싸움이 길어지자 황실에서는 두 가문이 각각 광산의 일부를 소유할 것을 제안했으나, 어느 한쪽도 광산을 포기할 수 없다며 지지부진한 기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 역시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이래서 부자들이란.
소식지가 발간된 아침이라 그런지, 그 아래의 의견란은 아주 빠른 속도로 갱신되고 있었다.
-세상에, 이걸 아직도 두고 싸우고 있는 건가요?
-우와, 징글징글하네요….
-황제 폐하께서 적당히 합의를 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올슨 백작가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던데요.
-사실 저 광산은 보기만 하면 영혼을 빼앗기는 어마무시한 저주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 퇴치를 원하시는 분은 일디즈 거리 1번지….
-의견란에 광고 거는 거 어떻게 처리 못 하나요?
오늘도 와글와글한 게 꼭 활자로 만든 광장 같았다.
그중에서는 유독 ‘올슨 백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어쩐지 이 가문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아 보였다.
“올슨 백작가라,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으쓱였다.
“바로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가문이겠군.”
그렇담 관심 없지.
귀족들의 밥그릇 싸움 이야기는 젖혀 두고 가볍게 소식지를 넘겼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안과 내 기사도 있을 텐데….”
중얼거리며 소식지를 쭉 읽어 내리다가 3면에 적힌 메인 기사에 시선이 멈췄다.
“역시, 여기 있네.”
소식지 3면의 정중앙, 가장 큰 글씨로 대공 부부에 관한 타이틀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대공가의 유령? 혹은 신데렐라?〉
‘제목을 참 요란하게 짓는구나.’
모든 제목에서 어그로를 끄는 걸 보니 왜 이 소식지가 귀족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처럼 회자되는지 알 것 같았다.
원래 신선함과 오바스러움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것이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그 아래의 본문에는 내가 예상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안과 내가 릴튼 거리에 유달리 다정한 모습으로 나타나, 온갖 상점을 싹쓸이하고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서점에 방문한 대공 내외는 책 한 권을 가지고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여 줬다느니, 대공이 자진해서 대공비의 짐을 들어 주었다느니….
‘전부 내 계획대로야.’
씨익 웃으며 만족스럽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특히, 마지막 문단에는 구둣가게에서 있었던 일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이안이 내 손을 잡고 등장한 것부터, 직접 신발을 신겨 주던 일까지.
〈…마지막으로, 펠로 구두점에서 대공비에게 구두를 신겨 주던 대공의 모습은 얼음 대공이 아니라 설탕절임 대공 같았다! 새 신발을 신은 두 사람의 사랑의 행방은?〉
“설탕절임 대공은 무슨….”
마지막 한 문장을 읽은 내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묘하게 촌스러운데 은근히 다음 글이 궁금하게 글을 쓴단 말이야.’
이런 필력으로 소설을 썼으면 대박이 났을 텐데.
- 제가 뭐랬어요? 시즌 파티에서 있었던 일이 진짜라니까요.
- 그럼 대공 부부가 정말 원래부터 사이가 좋기라도 헸다는 말이에요?
- 그럴 수도 있죠.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 그나저나 부럽네요. 저런 남자 어디 없나….
- 있어도 내 건 아닐 듯.
- 이쯤 되니 황녀의 탄신연이 기다려지긴 하네요.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요.
-좋은 구경거리겠네요~
의견란을 확인하고 흡족하게 웃었다.
나의 사교계 복귀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저번 글과 달리, 이번에는 이안의 다정함과 매력을 한껏 강조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의견란에서도 순조롭게 다들 이안의 이야기를 하며 떠드는 분위기였다.
‘이 정도면 뭐 더 말을 얹을 것도 없겠는걸?’
최소한 일회성으로 쑥덕거리고 끝날 수준의 화젯거리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황녀의 탄신연에서 우릴 지켜보겠다는 사람도 꽤 있고….’
무엇보다 이안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본디 찬 바람이 쌩쌩 불던 차가운 남자가 돌연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면 사람들은 거기에 열광하는 법이다.
왜, 한때 ‘나쁜 남자가 끌리는 100가지 이유’ 같은 인터넷 게시글도 있지 않았나.
계속해서 이런 분위기만 유지한다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안에 대한 여론이 바뀔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당장 나부터도….’
“그래서, 이 구두를 선물 받은 부인께선 ‘좋은 곳’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좋은 곳으로 가실 생각인지 물었습니다. 좋은 집이든, 좋은 사람이든.”
‘미친, 지금 그 장면이 왜 떠오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