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일전에 귀부인들에게 들은 대로 본문 아래에는 〈의견란〉이라는 작은 글자 아래로 빈칸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빈칸‘이었을’ 공간이었다.
그 표현이 과거형인 이유는 지금 그곳은 온갖 글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몇 초에 한 번씩 의견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거 정말인가요?
-직접 봤는데 진짜였어요. 글쎄 대공이 대공 부인 손등에 대놓고 입을 맞추던데요?
-에이… 말도 안 돼.
-진짜임. 나도 봤음.
-그보다 대공비가 입고 온 드레스 정보 아시는 분 계시나요? 황녀랑 뭐라고 얘기하던데 불똥 튈까 봐 떨어져 있었더니….
-관심 없는 척하더니 다들 보고 있었나 보죠?
-옷 별로 예쁘지도 않던데?
-저도요. 구렸음.
-어머, 혹시 방금 의견 쓰신 분 이사벨라 하워드 후작 영애와 그 친구분이신가요?
-그런 건 좀 모른 척해 주세요. 민망하겠다.
-시즌 파티에 다녀온 누이가 그러는데, 대공과 대공 부인이 원래부터 사이가 좋았다는 말이 있더군요. 대공이 워낙 싸고도느라 헛소문이 퍼진 거라고….
-우와, 그걸 믿는 사람이 있구나.
-아니었어요?
실시간으로 하나씩 올라오는 의견들을 보며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거 진짜 인터넷 댓글란이랑 별로 다를 게 없잖아?’
사교계의 우아한 말투도 미묘하게 사라진 데다가 한 가지 주제로 웅성거리는 걸 보니 정말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워낙 갑작스러운 글이라 그런지 의견란의 분위기는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곧이곧대로 소식지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과 반신반의하는 사람들.
간간이 내 소식 자체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 것까지도 인터넷의 댓글과 비슷했다.
사교계 귀족들도 익명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본성이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뭐, 고작 이번 한 번으로 여론이 바뀔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
사교계의 여론이라는 게 어디 보여 주기식으로 한번 등장했다고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것이던가.
‘오히려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아서 신기할 정도야.’
그도 그럴 게, 분명 아침에 발행된 소식지일 텐데 아직까지도 10초에 한 번씩 의견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표정하게 소식지를 내려놓자 비비가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물었다.
“저어, 마님. 괜찮으세요…? 혹시 상처받으신 건….”
“응? 아니. 상처는 무슨.”
나는 비비에게 휘휘 손을 저어 주었다.
오히려 지금 굉장히 흥미로운 상태라고.
“괜찮으니까 앞으로도 소식지가 오는 대로 나한테 전해 주렴. 일주일에 하나씩 발행된다고 했나?”
“네!”
주간 발행인데 이렇게 두꺼운 소식지라니.
“알았어, 나가 봐.”
“네, 마님. 금방 목욕물을 준비할게요.”
총총 돌아 나가는 비비를 쳐다보던 내가 한쪽에 놓아 둔 종이와 깃펜을 집어 들었다.
끈을 풀자 딱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가 펼쳐졌다.
“흠, 이번엔 가볍게 물타기만 해 볼까.”
지금은 전부 내 얘기니까, 이안 놈의 이야기를 해 놔야겠어.
내가 팔려는 건 내가 아니라 이안이니까.
나는 1면의 의견란을 펼쳐 두고 그 위에 사각사각 글씨를 써 내려갔다.
글을 모두 적고 펜을 떼자, 글자가 사라지더니 1면의 의견란이 새로 갱신되었다.
-원래 대공 같은 냉혈한이 자기 여자한테는 다정한 법이잖아요? 저는 좀 부럽던데.
그러자 그 아래에 동의한다는 의견이 하나둘씩 달리며 이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거지.’
내가 음험하게 웃었다.
“아주 잘 걸렸다.”
***
다음 날 오전, 용케 늦지 않고 제시간에 조찬을 들러 내려갔을 땐 언제나처럼 이안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간밤엔 잘 주무셨습니까. 날씨가 좋군요.”
음~ 오늘도 어김없이 틀에 박힌 인사해 주시고.
힐끗 다이닝 홀의 통창을 확인하고선 의자에 단정히 앉았다.
‘오늘은 날이 맑아서 봐준다.’
코웃음을 흥, 치고 방에서부터 가져온 소식지를 펼쳐 들었다.
‘어제 어디까지 읽었더라….’
열 페이지쯤 되는 아리아 소식지는 정말이지, 굉장했다.
나와 이안의 이야기가 실린 첫 페이지를 제외하고도 상당히 흥미롭고 비밀스러운 사교계의 이야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수도 귀족의 이야기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간간이 지방 영주나 귀족들에 관한 글이 실려 있기도 했다.
게다가 일반 신문처럼 객관적인 사실만을 쓰는 기사 형식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저자의 의견이 들어간 칼럼 형식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혔다.
게다가 이 필자의 입담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 글 쓴 사람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확신하건대 어디서 입 좀 털어 본 인간이 분명했다.
소식지를 찬찬히 읽다 보니 대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댓글, 아니, 의견란이 엄청 활발했었지.’
어제 잠깐 읽어 본 바로, 의견란에는 온갖 사람이 첨언을 한 덕에 본문에 미처 실리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했다.
‘잘만 이용하면 여론 형성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 같단 말이지.’
수도 귀족의 대부분이 보는 소식지라니, 이것보다 여론몰이에 좋은 수단이 없지 않은가.
한참 심각하게 고민하며 소식지를 뒤적거리고 있자 사용인이 조용히 내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계피와 허브, 크림소스를 곁들인 호박 수플레입니다.”
“음.”
접시 위에 작고 앙증맞은 호박 모양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이 집 주방장은 참 음식을 보기 좋게 만든다니까.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에 보던 소식지를 접고 스푼을 들었을 때였다.
옆쪽에서 뺨을 콕콕 찌르는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대공?”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아까부터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왜 사람을 저렇게 쳐다봐, 낯설게.
“…무슨 문제라도?”
“뭘 보십니까.”
얼핏 시비처럼 들릴 말이었으나, 나는 용케도 이안의 시선이 내가 내려놓은 소식지에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니까, 정말 말 그대로 ‘뭘 보고 있느냐’는 말이군.
‘이 앞뒤 잘라먹은 저세상 사회성을 어쩌면 좋지…?’
어제 헤이든 로저 공작의 잔상이 아직까지 남아서인지, 이안의 이런 모습이 더욱 아찔하게만 느껴졌다.
“소식지를 좀 보고 있었어요. 대공께서도 매일 아침 신문을 보시니까.”
“소식지요.”
“네. 몰랐는데, 정기적으로 사교계의 소식을 전해 주는 소식지가 있더군요. 관심이 생겨 어제부터 구독해서 보고 있어요.”
“그럼 그건 어제 발행된 소식지입니까?”
“네, 보다시피요.”
소식지를 살짝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그런 데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원래는 그랬죠.”
“…….”
“저에 대한 온갖 추문을 직접 듣기 전까지는요.”
내 뼈 있는 말에 이안이 멈칫했다.
‘찔리지, 인마.’
네가 사람이면 찔려야 할 거다.
“뭐, 그래도 이번 소식지 글은 나쁘지 않았어요. 여기 1면.”
보란 듯이 소식지를 들어 올리고 톡톡 두드렸다.
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곧 1면에 적힌 것이 나와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것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기울였다.
“내용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네.”
“잘됐군요.”
그가 심드렁하게 끄덕였다.
“반응이 그게 전부예요?”
“또 무슨 반응이 필요합니까?”
“좀 더 궁금해할 줄 알았죠.”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네가 그러니까 그 모양 그 꼴인 거란다.
“아쉽네요. 전 관심이 많아져서.”
속에서 은근한 열불이 올랐지만 애써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주말엔 저랑 같이 어딜 좀 가 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