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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36)화 (36/91)

36화.

난생처음 보는 남자의 정중한 호의에 잠깐 넋이 나가 있던 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대공비 전하?”

“올라가지.”

애써 무덤덤하게 대답하고선 도망치듯 마차에 올랐다.

그 와중에 로저 공작은 내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는 것까지 도와주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대공저로 돌아가십니까?”

서글서글한 눈매를 둥글게 휘며 말하는데, 내가 아주 조금의 도끼병만 가지고 있었어도 내게 작업을 건다 착각할 정도 황홀했다.

애당초 이런 사람을 두고 왜, 이안이 수도 영애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는군요. 아쉽지만 이쯤에서 보내 드려야겠습니다.”

나지막이 말한 로저 공작이 노을 속에서 환하게 웃었다.

“또 뵙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

“그때까지 평온한 나날 되시길.”

“…그래. 기회가 되면 또 보지, 로저 공작.”

내 말을 끝으로 문이 닫히고 천천히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저 공작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나는 의자에 기대어 입을 틀어막았다.

“…뭐야?”

원래 이쪽 남자들은 이렇게 아무한테나 막 끼를 부리고, 그러나?

내내 이안만 상대하느라 몰랐던 걸까?

나는 심장이 벌렁벌렁한 것을 가라앉히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원작에 꼴랑 몇 줄 등장하는 조연도 저렇게 사람을 꼬시는데, 남자 주인공이라는 놈은….’

마차 너머로 지는 노을을 보며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돌아가면 특훈을 해야겠어.”

대공저에서 조연보다 못한 남자 주인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대공저에 돌아왔을 땐 해가 완전히 넘어간 저녁이었다.

본관 로비에 들어선 나는 마침 다이닝 홀에서 나오던 이안과 마주쳤다.

그가 나를 향해 까딱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 늦으셨군요.”

“어쩌다 보니까요. 대공은 저녁 식사를 들고 오시는 길인가 봐요.”

“보다시피요.”

“…….”

“…….”

다시 침묵이었다.

아니, 사람이 물어봤으면 같은 질문을 돌려줘야 할 것 아냐.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몰라?

어째 방금 전 로저 공작을 보고 와서 그런지,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이안이 오늘따라 그렇게 깡통 로봇 같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운을 떼었다.

“저한텐 저녁 먹었냐고 안 물어보시나요?”

“아.”

“…….”

“저녁은 드셨습니까?”

이 와중에 또 말은 잘 들었다.

“아뇨, 근데 황녀님이랑 디저트를 거하게 들고 와서 이따 가볍게 수프 정도만 먹으려고요.”

“그렇군요.”

내가 수프를 먹든 밥에 물을 말아 먹든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 같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대공.”

“예.”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또 무엇을요.”

“역시 남자는 조신하고 다정한 게 최고인 것 같아요.”

“예…?”

당연하게도,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뭘 알겠니.

착잡한 기분에 그를 위아래로 훑다가 탄식했다.

“노력이라도 좀… 해 보시면 좋을 텐데.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겠죠?”

“…….”

“그럼 이만.”

어휴, 내 팔자야.

얼이 나가 있는 이안을 그대로 두고 이 층 계단을 올랐다.

침실에 들어서자 기다리던 비비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마님! 오셨네요. 즐거운 시간 보내셨어요?”

“…즐거운 시간?”

서늘하게 되묻자 비비가 입을 합, 말아 물었다. 상대가 황녀였다는 걸 잠깐 잊은 얼굴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비비를 빤히 쳐다보다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장난이야. 즐거운 시간이었단다. 나한텐 조금 벅차긴 했지만….”

“으아, 다행이에요. 전 제가 또 말실수를 한 줄 알았지 뭐예요.”

능숙하게 내 시중을 들며 안으로 들어가는 비비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황성은 어떠셨어요? 개인적으로 초대받아 가시는 건 처음이셨잖아요.”

“뭐, 특별한 게 있겠니.”

겉옷을 벗으며 으쓱였다.

황녀의 드레스 룸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휘황찬란했지만.

내가 나서서 호들갑 떨 생각은 없었으므로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고선 방을 가로질러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기가 쪽쪽 빨리는 게, 당분간 외출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나는 집 안에 콕 박혀서 빈둥거리는 게 체질이다.

‘흠, 그래도 로저 공작과의 만남은 좀 괜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

온미남 최고.

“비비, 목욕물을 준비하렴.”

“네! 아, 맞다.”

내 말에 대답하던 비비가 무언가 생각난 듯 양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맞부딪혔다.

“마님, 말씀하신 아리아 소식지를 구독해 뒀어요! 집사 어른께서 오늘 자 소식지도 구해 주셨고요.”

“어, 그래?”

침대에 파묻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지금 줄래?”

“네!”

비비가 냉큼 방 한쪽에 놓아두었던 은쟁반을 들고 왔다.

트레이 위에는 두툼한 종이봉투 하나와, 그 옆에 끈으로 돌돌 말린 손바닥 반만 한 작은 쪽지, 그리고 일회용 깃펜이 하나 놓여 있었다.

비비가 먼저 주섬주섬 봉투를 내밀었다.

“설명을 들었는데… 이게 본 소식지구요.”

이어서 그녀가 끈으로 말린 쪽지와 깃펜을 들어 올렸다.

“이게 구독자의 의견을 쓰는 종이라고 해요. 사용법은 간단한데, 원하는 페이지를 펼쳐 두고 이 종이 위에 글을 쓰면, 소식지에 바로 글씨가 나타난대요!”

“호오, 그래?”

내가 눈을 반짝이며 종이와 깃펜을 받아 들고 요리조리 살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데.’

이런 마법이 있단 말이지.

“앗, 저어, 근데….”

방금까지 발랄하게 쫑알거리던 비비가 큼, 헛기침을 하며 봉투를 가리켰다.

“제가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구요, 소식지를 받아 확인하자마자 1면에 대공비 전하의 소식이 적혀 있어서….”

“응?”

눈을 깜빡이며 종이봉투에서 소식지를 꺼냈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곧장 왜 비비가 그런 표정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 자 소식지의 첫 장, 대문짝만한 크기로 나와 대공에 관한 글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가의 이름뿐인 유령의 반란!〉

이야, 제목 어그로 장난 없고.

‘이쪽이나 저쪽이나 제목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건 똑같군.’

사실 내가 그동안 보아 온 연예계 기사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귀여웠다.

제목은 가볍게 넘기고 그 아래 적힌 내용을 훑었다.

예상대로 어제의 내가 브릴루즈 공장 부인의 시즌 파티에 이안의 에스코트를 받아 입장했으며, 이안이 내 손등에 입을 맞췄고, 우리 두 사람이 상당히 다정한 모습이었다는 내용이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드레스 얘기라든가, 이사벨라 무리와 있었던 일도 짤막하게 거론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뭐 이렇게 자세해?’

얼핏 들은 것과 같이 정말 바로 옆 1열에서 구경을 한 것 같은 생생함이 느껴졌다.

‘진짜 옆에 있었던 거 아냐?’

의심의 눈초리로 소식지를 훑어 내리고 있을 때, 마지막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두 달 후 있을 황녀의 탄신연을 필자를 포함하여 사교계의 고명한 인사들이 모두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쯤에서 우리는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대공가의 유령은 과연 또 무엇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인가? 아니면 유령의 반란은 단 한 번에 그치고 말 것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다음 행보에 따라 대공 부부에게 붙은 수식어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살벌하네….’

이번은 워밍업이고 다음에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겠다 이거지.

마지막에 적힌 ‘그럼 필자는 유령 강령술을 하러 이만!’이라는 대목을 읽고 시선을 내린 나는, 그제야 소식지의 의견란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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