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날 붙잡은 건 낯선 남자였다.
어찌나 다급하게 잡았는지 그의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지척에서 이마를 간질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놀란 얼굴을 하던 남자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물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그 물음이 들리고 나서야 나는 내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물었던 입술에 힘을 풀고 끄덕였다.
“…아, 네. 괜찮습니다.”
내 대답이 돌아오자 남자는 그제야 안심한 듯 깊은숨을 토하고 나를 일으켜 주었다.
허리에 감았던 손을 거둔 뒤 물러서는 일련의 행동이 부드럽고 정중했다.
“레이디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덕분에 살았군요.”
‘진짜 하마터면 어디 한 곳 부러질 뻔했으니까….’
심장이 마치 목에서 뛰는 것처럼 벌렁거렸다.
통깁스도 없는 세계관에서 골절상을 당하는 건 사절이라고.
겨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내가 정식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즈음이 되어서야 날 붙잡은 상대의 머리칼이 붉은색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호수 위에서 부는 바람을 따라 잘게 나부끼는 곱슬머리는, 붉은 노을에 비쳐 그렇게 보였을 뿐 자세히 보니 금발에 가까운 브루넷이었다.
드리워진 앞머리 아래로 곧게 뻗은 코와, 유순하게 휘어지는 암녹색 눈동자까지.
짧은 시간 훑어보았을 뿐임에도 상당한 미인인 걸 알 수 있었다.
웃음기 어린 서글서글한 낯은 마치 다정을 사람으로 빚어 놓은 것처럼 단정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쉽게 말해….
‘와, 완전 서브 남주 상.’
그랬다.
로맨스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갈색 머리에 녹안인 서브남주를 똑 떼어다 세워 놓은 것처럼 생긴 남자였다.
‘겁나 잘생겼어….’
자고로 나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자는 순하고 예쁘게 생겨야 한다’는 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남자는, 너무 내 스타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헙, 다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엘로이즈!’
여기서 이름도 모르는 외간 남자의 얼굴에 넋이 나가면 어쩌자는 거야!
크흠, 헛기침을 하고 다시 남자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외모라면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는 아닐 것 같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 이 얼굴과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
‘진짜 서브 남주 상인데. 서브 남주일 리는 없으니까’
당연하게도, 이 소설은 이안과 다이아나의 러브라인을 그리는 것만으로 바빴다.
그게 러브라인이냐 싶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다 보니 이 정도 외모의 서브 남주가 등장할 틈 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작가가 남주 악개라서 남주 외의 등장인물은 아주 오징어로 묘사하기 바빴지.’
새삼스러운 작가의 만행에 속으로 조용히 탄식했다.
그런 내 반응을 난감함으로 받아들인 건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남자가 아차, 하는 중얼거림과 함께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고 살짝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클라우드 대공비 전하. 헤이든 로저 공작이라고 합니다.”
“헤이든 로저… 아.”
뒤늦게 떠오른 이름에 내가 탄성을 뱉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유명한 현 황제는, 본인을 지지하는 탄탄한 귀족 세력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개국 공신으로 불리는 로저 공작가는 황제파의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공작 위를 이어받은 헤이든 로저 공작은 현 황제의 소꿉친구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작중에서도 몇 번이나 황제를 도와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는 인물로 언급되기도 했다.
‘어쩐지, 황제의 측근이었군.’
그럼 이 외모가 납득이 가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박자 느리게 웃었다.
“로저 공작, 미안하네. 내가 사람 얼굴에 어두워 자네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군.”
“아닙니다, 대공비 전하.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건 오늘이 처음이니까요. 오히려 불쑥 나타나 대공비 전하를 놀라게 한 제 불찰이 큽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가 능숙했다.
“그러는 로저 공작은 나를 단번에 알아보지 않았나?”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대공비 전하를요.”
부드럽게 휘어 접는 눈매가 유달리 선해 보였다.
덕분에 나는 다시 입을 벌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 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어제 브릴루즈 공작 부인의 시즌 파티에 참석하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황성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정말 그사이에 소식이 다 퍼진 모양이네.’
예상대로 하루 사이에 내 이야기가 수도 곳곳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태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끄덕였다.
“그래. 그곳에서 만났다면 훨씬 이상적인 첫 만남이었을 텐데. 로저 공작은 참석하지 않았나?”
“그날 급한 일이 생겨서요. 한데 대공비 전하께서 오실 줄 알았더라면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참석할 걸 그랬습니다.”
그가 눈을 반으로 접으며 선선하게 동조했다.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꼬리 틈으로 보이는 입 동굴이 아주 근사했다.
‘…이안이 이 남자의 반의반만 따라갔어도 다이아나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졌을 거다.’
나는 절로 새어 나오는 탄식을 꾹 참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한편 로저 공작이 짧게 내 주변을 살피곤 물었다.
“오늘은 대공 전하와 동행하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 오늘은 나 혼자 입궁했네.”
“어쩌다 예까지 홀로 입궁을….”
“황녀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말이야.”
“아, 그렇군요.”
의아하게 날 쳐다보던 로저 공작은 내 입에서 나온 황녀의 이름에 단번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도 막무가내 황녀의 이름은 일종의 프리패스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대공께서 에스코트를 안 해 주셨단 말이죠….”
중얼거린 그가 금세 방긋 웃었다.
이어서 내게 흰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오늘은 제가 마차까지 에스코트를 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이쪽 길은 울퉁불퉁한 돌이 깔려 있어 구두를 신고 홀로 걸으시기엔 어려울 겁니다.”
“아….”
헤이든 로저의 말에 나는 그제야 돌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평평한 돌이 깔려 있던 황성의 다른 길과 달리, 울퉁불퉁한 돌이 흙바닥 위에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자연스러운 정원 연출을 위해 일부러 이렇게 돌을 깔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곳에서 생각 없이 걸으니까 그렇게 넘어지지.’
이제 보니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부탁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살짝 웃은 그가 능숙한 태도로 나를 이끌고 수국 정원에서 벗어났다.
“발아래를 조심하십시오.”
“고맙네.”
간간이 나의 걸음 속도를 신경 써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은 이안의 뻣뻣한 에스코트만 받아서 미처 자각하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의 에스코트를 받아 보니 확실히 비교가 됐다.
‘아직 이안은 갈 길이 멀군….’
이래서 비교군이 중요하다니까.
내가 내심 통탄스러움을 느낄 동안 로저 공작은 아주 편안하게 마차가 세워진 곳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내 손을 놓아주고 한 발자국 물러선 그가 다시금 허리를 숙였다.
“에스코트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내가 인사를 해야겠는걸.”
“사교계의 꽃 되시는 대공비 전하를 모실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니까요.”
잘생긴 인간이 입에 발린 말도 잘하네.
정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안과 이렇게 비교될 수가 없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내가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과분한 칭찬이군.”
“전혀 과분하지 않습니다.”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들고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짙은 녹안이 반으로 접히며 근사한 미소가 드러났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뭐야?’
지금 이거 끼 부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