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평온하게 차를 들이켜던 내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부탁은요, 괜찮습니다.”
내 거절에 황녀가 눈을 크게 떴다.
“거절할 필요 없어! 정말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황녀씩이나 되어서 대공비에게 받기만 할 수는 없잖아.”
“아니, 뭐… 그렇게까지.”
“정말이야, 대공비.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툭 터놓고 말해 봐. 응?”
나라고 속절없이 황녀에게 휘둘리기만 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다.
이 망나니 황녀의 장점은, 뭐든지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점이었다.
자신에게 엿을 먹인 상대는 똑같이 엿으로 돌려주고,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 준 상대에게는 똑같이 호의로 돌려준다.
그리고 작품 후반부의 다이아나는 이 점을 깨닫고 황녀를 살살 달래어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역시, 내 다이아나는 머리도 좋았다.
대체 다이아나는 못하는 게 뭐지?
역시 다이아나 인생의 유일한 오점은 이안 클라우드인 게 분명하다.
하… 그래도 다이아나를 위해 그 오점, 조금이라도 닦아 봐야지.
빼고 광내서 예쁘고 조신한 키링으로 만들어 줄 수밖에.
큼, 헛기침한 내가 고상하게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또 이런 걸 바로 물어 버리면 없어 보인다고.
“음,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런 기회 흔치 않은데, 정말 없어?”
황녀가 입을 비죽 내밀며 물었다.
그제야 나는 음흉한 미소를 꾹 삼키며 차분히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뭔데?”
“일단 구두로 약속을 해 두고, 나중에 이유 불문하고 황녀님께서 저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는 겁니다.”
황녀가 턱을 매만졌다.
“호오… 요컨대 소원권 같은 건가?”
“쉽게 말하면 그렇겠군요.”
황녀의 자청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그거 재미있겠는걸!”
“그런가요?”
“응! 꼭 소원 들어주는 요정이 된 기분이잖아!”
기대감에 잔뜩 부푼 표정이 딱 14살 소녀처럼 보였다.
내가 흐뭇하게 웃었다.
‘계획대로야.’
이 소원권은 1년 뒤, 다이아나가 돌아오면 사용할 계획이었다.
정확히는, 다이아나가 직접 만든 구두를 황녀가 신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황녀만큼 확실한 모델은 없다고.’
다이아나는 아카데미를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돌아오지만, 3년간 수도를 비운 탓에 사교계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황녀가 다이아나의 구두를 신으면 엄청난 유행을 일으킬 것이고, 다이아나는 자연스럽게 사교계의 슈퍼스타 자리를 꿰차겠지.
‘원작 속 황녀는 다이아나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내가 중간에 낀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거기에 이제 브릴루즈 공작 부인을 곁들여 푸시까지 해 주면 금상첨화.
그리고 다이아나가 모두의 관심을 받을 때쯤 나는 이안과 이혼하고 조용히 퇴장하면 된다.
이보다 완벽한 계획이 있을까?
나를 위아래로 훑은 황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대공비, 또 표정이 음흉한데. 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제가 웃는 얼굴이 조금 독특하다는 소리를 듣는답니다.”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황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그럼 소원은 천천히 말하도록 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려는 뭐얼.”
큼, 목을 가다듬은 황녀가 테이블에 상체를 당겨 앉았다.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보다,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이지.”
“하문하시지요.”
“둘째 오라버… 아니, 대공과 어떻게 된 거야?”
이 눈빛 익숙한데.
내가 중학교 때 교생 선생님의 첫사랑을 물어볼 때가 딱 이런 눈빛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차를 한 모금 넘겼다.
“하문하신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어어, 모른 척하기야? 둘이 갑자기 사이가 좋아졌잖아! 나까지 속일 생각 하지 말라구.”
황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듯 물었다.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표정이 아니었다.
“대공이 직접 파티 장소까지 에스코트한 걸로도 모자라 손등에 입을 맞추고, 둘이 브로치까지 나눠 가졌다며! 내가 아는 오라버니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음.”
다른 사람이라면 이안은 원래 다정한 성정이라며 소프트한 사기를 쳐 보겠지만, 상대가 놈의 가족이다 보니 쉽지 않았다.
은근히 시선을 피하던 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부부 사이야, 나쁘다가도 좋아지는 법이죠.”
황녀가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야, 재미없게에.”
“정말이에요. 황녀님도 나중에 결혼을 하시면 알게 되실 거랍니다.”
“이씨이. 재미없어!”
내가 순순히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황녀가 입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렸다.
“황녀님께는 만족스러운 답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뭐….”
꿍얼거리던 황녀가 금세 반색하고선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 얘기는 나중에 하고! 아무튼, 나 이번에 대공비를 다시 봤어. 대공 내외 둘이서 맨날 이렇게, 똑같은 표정으로 ‘그렇습니다.’ 아니면 ‘아닙니다.’ 하는 것만 보다가.”
양 눈을 쭉 찢으며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설마 저게 나랑 이안이야?
“…그런가요?”
“응.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대공비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거든.”
“아.”
지나친 솔직함에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다.
황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해하지 마,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난 대공비가 아주 마음에 들어.”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근데 있지, 나보다는 다이아나가 더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난 1년짜리 계약직이고 거긴 정규직일 예정이거든.
차마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때 조심스럽게 우리 쪽으로 다가온 시종이 황녀의 곁에 서서 속삭였다.
“황녀님, 브릴루즈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뭐, 벌써?”
방금 전까지 방실방실 웃고 있던 황녀의 표정이 한순간에 썩어들어 갔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는 모습이, ‘브릴루즈 공작 부인’이라는 말만 나오면 반응하는 강아지 같았다.
“하아… 대공비, 나 이만 수업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더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네, 황녀님.”
다음에는 좀 이른 시간에 초대를 해야겠군. 중얼거린 황녀가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갔다.
“참, 시간이 남으면 황성 구경 좀 하고 가. 이즈음 제4 정원의 수국이 참 예쁘거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녀를 따라 일어서 다소곳하게 인사하자, 만족스러운 듯 손을 붕방붕방 흔든 그녀가 총총 멀어졌다.
“그럼 다음에 봐!”
***
어느새 해는 뉘엿하게 성 저편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이끌고 황성의 서쪽에 있는 제4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황녀의 말대로 만발한 수국이 바람에 흐드러지는 모습이 절경이었다.
가까운 곳에 펼쳐진 호수는 노을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는데, 그게 마치 수면 위에 보석을 뿌려놓은 것 같았다.
나는 나직한 감탄을 터뜨렸다.
“안 보고 가면 서운할 뻔했네.”
대공저의 정원도 아름답지만, 역시 황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앞에 있던 돌부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밟고 말았다.
“엇…!”
한순간에 시야가 뒤집히고 몸이 중심을 잃은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