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황녀의 에메랄드궁, 그중에서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일 층의 드레스 룸이었다.
온통 황금으로 덧칠한 벽, 수십 개의 거울과 그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드레스와 장신구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서 있는 마네킹의 개수만 해도 대공저 사용인의 머릿수를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이건 드레스 룸이 아니라 거의 전시관 수준 아니야…?’
절로 떡 벌어지는 입을 애써 다물며 감탄하던 내가 슬쩍 마담 제드를 쳐다보았다.
“흐, 흐어어.”
저쪽은 이미 감탄을 하다 못해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확실히, 나도 이렇게 신기한데 마담 제드는 눈이 돌아가겠지.
황녀는 우리 두 사람의 반응이 꽤 흡족한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자아, 어떤가? 내 보물창고 같은 곳이라네!”
“정말 멋지네요, 황녀님.”
“천국 같네요… 헛.”
넋이 나간 마담 제드가 반사적으로 감탄하고선 입을 턱 틀어막았다.
황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알아, 다들 처음 보면 그렇게 감탄하거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돈 황녀가 마담 제드를 콕, 집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자네는 지금부터 이곳에서 내가 입을 옷을 만들어 주면 돼!”
“…예?”
이번엔 다른 이유로 마담 제드의 턱이 떠억 벌어졌다.
사고회로가 멈춘 듯 어벙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이내 튀어나오는 비명을 소리 없이 삼켰다.
그리고는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충 ‘대공비 전하,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같은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말했으면 자네, 마차에서 뛰어내렸을 것 아닌가….
“으음? 반응이 왜 그러지? 설마 싫은 건가?”
“아, 아뇨! 그럴 리가요!”
황녀의 의아한 물음에 마담 제드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마구마구 손사래를 쳤다.
“그, 그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해서….”
“원래 인생은 예상하지 못한 일의 연속이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그것도 몰라?”
꼴랑 14살짜리 황녀가 40살을 훌쩍 넘긴 중년 여인에게 인생 조언을 하는 장면이 참 볼만했다.
“죄, 죄송합니다!”
정작 마담 제드는 그런 걸 신경 쓸 정신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마담 제드가 슬쩍 고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황녀님. 원하시는 드레스의 디자인이라도….”
“흠!”
제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 눈을 한 바퀴 굴린 황녀가 배시시 웃었다.
“여러 벌을 만들 건데, 그중 하나는 곧 있을 내 탄신연에 입을 드레스이니 좀 특별했으면 좋겠어.”
“타, 탄신연….”
“그래! 잘 듣게.”
마담 제드가 허둥지둥 품 안에서 메모용 수첩을 꺼내 황녀의 말을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나는 말이지. 심플하면서 화려하고, 차분하면서도 강렬하고, 단조롭지만 파격적이고, 청순하지만 매혹적인 그런 드레스를 원한다네!”
…뭐라는 거야?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따뜻한 프라푸치노야? 그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빼고 얼음 빼서 주세요, 이거야?
얼빠진 표정으로 황녀를 쳐다보다, 걱정스럽게 마담 제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쯤 되니 황녀에게 마담 제드를 팔아먹은 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마담 제드를 보았을 땐….
“마, 맙소사…! 그런 천재적인 표현이라니! 영감이 마구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미 눈을 빛내며 수첩 위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사자 앞의 토끼처럼 벌벌 떨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음, 이쪽도 정상은 아니었지.’
나는 생각을 포기했다.
광기는 황녀가 아니라 마담 제드에게도 있었다는 걸 잠깐 잊었다.
“좋습니다, 완벽해요!”
그러는 사이 메모를 끝마친 마담 제드가 눈을 빛내며 수첩을 탁, 덮었다.
“지금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 될까요, 황녀님? 좋은 아이디어가 미친 듯이 샘솟고 있습니다!”
“후후, 좋아. 가라, 마담 제라늄!”
“예!”
마담 제드라니까….
***
황녀와 마담 제드의 광기 어린 드레스 디자인 대소동이 끝난 건 그로부터 대략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는 미친 사람과 미친 사람이 만나면 어떤 시너지를 발휘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황녀님! 이 장식을 여기에 달면 어떨까요?”
“마담 제키! 그대는 천재야!”
“별말씀을요!”
매번 황녀가 마담 제드를 부르는 이름이 달라졌지만 이미 뵈는 게 없는 마담 제드의 귀에는 제대로 닿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둘은 굉장한 열정적…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미쳐 있었다.
그 둘의 광기에 엄청난 규모의 드레스 룸이 활활 불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미친 사람 둘 사이에 샌드위치 햄처럼 끼인 정상인이란….
한바탕 열정을 불태운 마담 제드는 이 엄청난 아이디어를 잊기 전에 빨리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며 바로 의상실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 나는 에메랄드궁의 후원에서 황녀와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다.
“하아, 근래 가장 뿌듯한 시간이었어.”
뿌듯한 얼굴의 황녀가 자신의 구불구불한 백금발을 쓸어 넘겼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다니까? 대공비는 대체 어디서 저런 보석을 구한 거야?”
응, 너한테서 뺏었어.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황녀를 쳐다보며 선선한 미소를 띠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마담 제드가 황성에 오는 내내 걱정이 많았거든요.”
“걱정을 할 게 있었나?”
“떨려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걸요.”
“흐응, 황성이 뭐 별거라구.”
“황녀님을 뵙는 일이니, 아무리 걱정을 해도 모자라지 않죠.”
“걱정거리도 많군!”
황녀는 자기객관화라고는 조금도 되지 않는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꿀을 탄 밀크티를 한 번에 들이켠 황녀가 어깨를 들썩였다.
“흠, 역시 탐이 난단 말이야. 대공비, 저 재단사 정말 나한테 넘길 생각 없나?”
“그, 송구하오나 황녀님.”
내가 난감한 얼굴로 거절 의사를 비치려 들자 황녀가 와학학! 소리 내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어, 됐어. 알아! 이미 대공비가 점찍어 놓은 재단사인데 내가 빼앗을 수는 없지. 농담이었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아, 그래도 이번에 내 의상을 작업하는 김에 다른 걸 하나 더 부탁하려고 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지?”
“다른 거요?”
“응, 가족들 선물을 하나 준비할까 하거든!”
그런 게 있어, 하며 황녀가 작게 키득거렸다.
“으음~ 그리고 다른 의미로 저 재단사가 탐이 나긴 하는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해.”
씨익 웃은 황녀가 3단 트레이 위에 담긴 타르트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쏘옥 넣었다.
‘둘이 아주 쿵짝이 잘 맞긴 했지.’
의욕이 넘치는 건 두 사람인데 기가 빨리는 건 옆에서 차를 마시며 보던 나였으니까.
이쯤 되니 원작에서 황녀가 마담 제드를 발굴한 건 비단 실력 때문은 아닌 듯했다.
“흠, 그보다 말이야.”
“네, 말씀하시지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황녀가 인심 쓴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대공비는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없어?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나도 대공비의 부탁을 하나 들어줄까 하는데.”
‘걸려들었군.’
이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