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고백?”
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 확실한 건 아니구요.”
응, 제발 아니라고 말해.
잠깐 내 눈치를 보던 비비가 크흠, 목을 다시 가다듬고선 마치 어제의 나를 모방하듯이 소리쳤다.
“외로우니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고….”
맙소사.
나는 그대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어쩐지 같이 있는 시간이 어쩌고 하더니!’
그냥 아까 다이닝 홀에서 혀 깨물고 기절할걸.
물론 나는 이 모든 발언이 어제 거하게 취한 내가 다이아나와 이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째서인지 거하게 소통 오류가 발생했다는 사실 역시 직감했다.
어떻게 하필 주어가 다이아나가 아닌 나로 쏙 바뀌어 버린 걸까.
이것도 취한 내 탓이겠지.
“술이 웬수다….”
혼이 반쯤 나가 있는 날 본 비비가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 그래도 분위기는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고 그랬어요! 그 이후에 주인어른께서 마님을 안고 침실까지 데려다주신 거거든요!”
아니, 혀 깨물기 전에 첫 번째로 나온 수프에 코 박고 죽을 걸 그랬다.
비비의 말이 더해질수록 내 영혼은 육체를 떠나 허공을 둥둥 배회하고 있었다.
“마님께서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잖아요. 사용인들은 전부 마님을 이해한다는 분위기예요.”
“그러니….”
“네! 주인어른도 오늘 마님이 다이닝 홀에 내려올 때까지 조찬을 들지 않고 기다리셨다면서요?”
비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정신을 반쯤 잃은 상태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 놈한테, 아니,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설마 엘로이즈가 이안을 정말 짝사랑이라도 한 건가?
그래서 내가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고 그렇게 싸지른 거야?
그 와중에 깨끗하게 지워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내 기억이 원망스러워졌다.
나는 머리를 조용히 부여잡았다.
‘미안해, 다이아나…!’
내 아기 요정, 미의 여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깜찍하고 귀여운 나의 다이아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제로 돌아가 대차게 내 머리를 쥐어박아 주고 싶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순식간에 허름해진 내가 비비를 향해 손을 휘휘 저어 주었다.
“…일단, 나가 보렴.”
나 지금부터 회개 기도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마님.”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 나가려던 비비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저어, 마님.”
“응?”
“저는 부부는 사랑싸움을 하면서 가까워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파이팅!”
그거 아니야….
정말 울고 싶어졌다.
***
다음 날, 내 서신을 받은 마담 제드는 아침 일찍부터 대공저로 찾아왔다.
안 그래도 핏기 없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말이다.
“대, 대공비 전하.”
“아, 마담 제드. 왔는가?”
비비가 내어 준 차를 마시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자 마담 제드의 얼굴에 허망함이 들어찼다.
그녀가 자신의 손에 든 서신을 힘없이 흔들었다.
“이, 이런 서신을 받았는데요….”
“내가 보낸 게 맞네.”
“흐아아악.”
마담 제드가 기함과 함께 바르르 떨며 서신을 놓쳤다.
“저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공포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닥에 떨어진 서신을 보던 마담 제드가 더듬더듬 도로 주웠다.
“그, 그러니까… 화, 화, 황성.”
“맞아, 황성으로 갈 것이라 했네.”
“오, 오, 오….”
“그래, 오늘.”
“으, 으아아아아.”
나는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마담 제드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담 제드는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손님 하나 없는 뒷골목 살롱에 처박혀 있던 신세였으니까.
대공비의 전속 재단사가 된 것만으로도 마담 제드에겐 실로 놀랄 일일 텐데, 이젠 급기야 황녀까지 만나게 생겼으니 어떻게 제정신을 붙들고 있겠는가.
애당초 보통의 평민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황족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수도의 최대 규모라는 베로니카 살롱도 그곳의 수석 디자이너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황족을 알현한 적이 없었다.
찻잔을 끝까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담 제드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대가 고생이 많겠군.”
“…대, 대공비 전하?”
원래 이 대목에선 별일 아니니 긴장 풀라는 위로를 건네주어야 하는데.
빈말이라도 별일 아니라는 소리는 못 해 주겠다.
상대가 무려 황녀만 아니었어도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을 해 줬겠지만….
“저, 전하아아….”
내 근엄한 격려에 마담 제드는 거의 울 지경이 되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서 뛰어내려서 다리를 부러뜨리….”
“황녀님의 화를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보게.”
나는 마담 제드에게 발코니까지 가는 길을 내어 주며 빙그레 웃었다.
굳이 말리지 않겠다는 내 태도에 마담 제드가 제자리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흐, 흐어.”
저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망나니 황녀의 악명은 평민들에게도 자자하니 말이다.
영혼이 거의 탈곡되고 있는 마담 제드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전하….”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마담 제드의 얼굴에 절망감이 드리웠다.
***
이윽고 황성으로 향하는 마차 안, 초조한 듯 이빨을 딱딱 부딪히던 마담 제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대, 대공비 전하.”
“말하게.”
“그래서 도대체 황녀님이 저를 왜 보자고 하시는 걸까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 음.”
그러고 보니 그걸 설명 안 했구나.
나까지 황녀의 막무가내에 동화된 건지 마담 제드에게 자세한 설명을 생략해 버렸다.
아직도 얼굴이 희게 질린 마담 제드를 살펴보다 대답을 하는 대신 부드러운 미소만 지었다.
‘황녀의 옷을 만들러 간다고 했다간 이 마차에서 뛰어내릴지도 모르잖아.’
“대, 대공비 전하…?”
“가 보면 알게 될걸세.”
마담 제드가 숨을 흡 들이쉬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성실히 달려 황성의 정문을 통과했다.
덜덜 떠는 마담 제드와 함께 마차에서 내리자 저 멀리서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인영이 보였다.
“대공비!!!”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손을 휘젓는 황녀였다.
그 뒤로 사색이 된 하녀들이 그녀를 좇는 것이 보였다.
‘브릴루즈 공작 부인이 봤다면 엄청난 잔소리가 이어졌겠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순식간에 내 앞에 당도한 황녀가 씨익 웃었다.
“왔는가?”
“황녀님, 이렇게 또 뵙는군요.”
“그러게. 잘 지냈어?”
“하루 사이의 안부를 물으시는 거라면 아주 잘 지냈습니다.”
세상에 만난 지 하루 만에 사람을 황성으로 호출하는 게 어디 있나요.
뼈 있는 대답을 내놓자 눈을 크게 껌뻑이던 황녀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 참, 우리 어제도 봤었지? 대공비를 목 빠지게 기다렸더니 하루가 1년 같지 뭔가!”
“감읍합니다.”
내가 황녀와 안부 인사 아닌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동안 한 걸음 뒤에서 벌벌 떨던 마담 제드가 치맛자락을 들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레, 레반트 제국의 두 번째 태양, 고귀하신 루이사 에브게니아 셀리스 레반트 황녀님을 뵈, 뵙습니다.”
동시에 황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자네가 바로 그 제레미군!”
“…예?”
당당하게 이름을 틀리는 모습에 내가 헛기침을 하며 속삭였다.
“마담 제드입니다, 황녀님.”
“아하.”
상큼하게 한쪽 눈을 찡긋, 감은 황녀가 마담 제드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붕방붕방 흔들었다.
“실수했네! 자네가 그 마담 제드라는 말이지?”
“예, 예. 그렇습니다.”
“흐음, 생각보다 평범하네.”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황녀가 다시 방긋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떼었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