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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26)화 (26/91)

26화.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공작 부인의 지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황녀의 허리를 타고 어깻죽지로 올라갔다.

“어깨는 펴시고 턱은 아래로 당기라고 말씀드렸사온데.”

온화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녀가 어깨를 쭈욱 내리고 턱을 단정하게 아래로 당겼다.

“손은 배꼽 바로 위에서 다소곳이 포개어 잡으시고.”

이번엔 황녀가 와인잔 든 손을 단정하게 포개어 잡았다.

그제야 공작 부인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시군요.”

“으윽….”

공작 부인의 만족스러운 반응과 황녀의 앓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수업 안 한다며!”

“기본적인 자세를 점검해 드렸을 뿐입니다.”

“이 씨이.”

황녀는 툴툴거리면서도 공작 부인이 코칭해 준 자세를 풀지 않은 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모두 목도한 나는 떡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조용히 가렸다.

‘이거 그거잖아, 파블로브의 개.’

그 이상의 적절한 비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속으로 감탄을 삼키고 있을 즈음, 공작 부인이 이번엔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관람자의 태도로 그들을 구경하던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내, 내 차례인가?’

바짝 긴장한 것과 달리, 정작 공작 부인은 나를 향해 정중한 예를 취해 보였다.

“대공비 전하,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까지 찾아와 주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한 발을 뒤로 뻗어 예를 갖추는 모습에 한 톨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야말로 정석적인 자세였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다른 연회도 아니고, 브릴루즈 공작 내외의 20주년 기념 파티가 아닌가.”

“세심하게 신경 써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선물이라도 챙겨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미안하네.”

“괘념치 마시지요, 이렇게 참석해 주신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대공비 전하.”

분명히 웃고 있음에도 눈앞의 공작 부인의 기개는 마치 범 같았다.

저렇게 온화한 얼굴로 호랑이의 눈빛을 지녀도 되는 거냐고.

“혹 황녀님과 나눌 말이 있다면 자리를 피해 주겠네. 나도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어야 하니….”

적당히 이 자리에서 피할 핑계를 대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은 황녀님이 아니라 대공비 전하께 말씀을 올리러 왔습니다.”

…나를?

갑자기? 여기서?

꼭 고등학교 때 학생부장 선생님이 이유도 없이 날 호출할 때보다 떨렸다.

“날… 말인가?”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나 자신을 가리키자 그녀가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이 내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

머뭇거리는 내 물음에 공작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차분히 대답했다.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이곳, 온실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소란? 아.”

이사벨라 하워드 무리와의 일이구나.

한 박자 천천히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이 좀 크긴 했지.’

그들이 내 등장 직후 우르르 주변으로 몰려온 탓에 여러모로 집중을 받았다.

덕분에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것도 사실이고.

오죽했으면 황녀까지 보고 웃었을까.

이곳에서 브릴루즈 공작 부인이 분기마다 열리는 자신의 파티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내게 한 소리 하려는 건가?’

이쯤 되니 황녀와 나란히 혼나는 기분이 들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나 대공비인데.

여기서 쫄면 지는 건데.

‘하지만 여기서 브릴루즈 공작 부인과 척을 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어.’

공작 부인은 이미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고, 난 이제 막 위태로운 사교계 입지를 다지기 위해 등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까 이사벨라 하워드 무리에게 둘러싸였을 때처럼 대놓고 인파가 몰리지는 않았지만, 이 파티의 주최자인 브릴루즈 공작 부인이 나와 황녀에게 다가온 순간부터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잔뜩 쏠려 있었다.

마찰을 일으켰다간 누구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지는 뻔했다.

무엇보다….

“…….”

저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난 지금 너무 무서웠다.

이사벨라 하워드 무리와는 완전히 다른 레벨이라고.

‘일단… 숙이고 들어가자.’

사과를 하기 위해 운을 띄웠다.

“미안하네, 소란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아뇨, 제가 사과를 드리고 싶어 찾아뵈었습니다.”

응?

돌연 브릴루즈 공작 부인은 양손을 모은 채 깍듯하게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대공비께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공작 부인?”

그 모습을 본 귀족 여럿이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저것 보세요.”

“공작 부인이 나설 줄은 몰랐네요.”

“하지만, 그럴 만했죠.”

그제야 한 줄기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일부러 이러는 거구나.’

방금 전 이사벨라 무리와의 설전은 내게 기울어진 방향으로 끝났다.

게다가 황녀까지 등장해 나에게 호의적으로 굴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주최자로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계산이 선 것이다.

개최자로서 자칫 사이가 좋지 않은 이사벨라 하워드와 나를 함께 초대했다는 논란에 오를 수도 있었던 일을, 모두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하면서 사전에 차단해 버렸다.

‘이야, 이쪽은 정말 머리 회전이 빠르네….’

왜 황녀의 교육을 맡고 있는지 단번에 납득이 가는 지점이었다.

“이럴 필요 없네, 공작 부인.”

내가 그녀의 몸을 바로 세웠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하워드 영애와는 그저 안부를 주고받았을 뿐일세. 그러니 괘념치 말아. 오히려 덕분에 내가 난감해지지 않았으니 감사 인사를 해야지.”

내 너그러운 태도에 공작 부인은 조금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어서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얼음꽃이 아닌 봄날의 꽃이셨군요.”

이거 보기보다 내 성격이 좋단 얘기를 고급스럽게 한 거지?

내 추측이 맞는다는 걸 증명하듯 공작 부인은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표정이었다.

“모쪼록 너그러운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대공비 전하.”

“아량은 무슨.”

“이것도 인연이니, 혹 추후에라도 제가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시지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녀가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어린 영애들을 흘끗 보며 난처한 듯 말했다.

“되었네, 바쁘면 가 보아야지. 자네가 주최자 아닌가.”

휘휘 손을 젓던 내가 멈칫했다.

‘잠깐.’

…필요하면 부르라고?

내 머릿속에 다이아나의 벚꽃색 머리카락이 스쳐 지나갔다.

브릴루즈 공작 부인 정도라면 나중에 다이아나의 사교계 복귀에 아주 큰 힘을 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일순 내 눈이 빛났다.

“…정말 필요할 때 자네를 불러도 되겠는가?”

말꼬리에 웃음기를 섞자, 공작 부인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이지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당장 꺼낼 이야기는 아닐세. 나중에 진득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데, 괜찮겠지?”

눈을 반짝이며 묻자 공작 부인이 고개를 기울이다가 선선히 대답했다.

“대공비 전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야,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아유, 제가 더 감사하죠.

우리 다이아나 등에 날개를 달아 주실 분인데.

“하면 연락 주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오늘 편하게 파티를 즐겨 주시지요.”

“신경 써 주어 고맙네. 기꺼이 그렇게 하지.”

훈훈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브릴루즈 공작 부인이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뜻밖의 수확인걸.’

씰룩씰룩 새어 나오는 미소를 꾸욱 참았다.

‘이래서 사교 행사에 얼굴을 자주 비추라는 거구나. 언제 어디서 귀인을 만날지 몰라서!’

다이아나, 나 한 건 했어!

“…대공비? 표정이 좀 이상한데.”

“제가 말입니까?”

“응. 엄청… 음침해. 꼭 권모술수를 꾸미는 악당처럼.”

으, 하며 진저리치는 황녀를 흘끗 보고선 매끈하게 웃었다.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태연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수상한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황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음험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순진무구한 미소를 띠었다.

한동안 찜찜하게 나를 훑어보던 황녀가 흥, 코웃음을 쳤다.

“아무튼, 약속 일자는 나와 가장 먼저 잡는 거야. 공작 부인은 그다음이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마담 제드에게도 언질해 두지요.”

“흐음, 마담 제드… 아주 마음에 들어. 이름도 쏙 마음에 드는군!”

“아마 마담 제드도 황녀님을 뵙는다고 하면 아주 기뻐할 겁니다.”

황녀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 마담 제드 생각을 하니 조금 안쓰러워졌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다 큰 그림을 위해서다.

‘미안, 마담 제드. 견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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