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어머, 그러셨군요! 몰랐네요.”
그래, 그래. 안다.
다이아나를 붙잡아 두고 장장 세 페이지 동안 그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니까.
우리 불쌍한 다이아나는 30분 넘게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황녀의 끝없는 수다와 꼬장을 들어주어야 했고.
날 보며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던 황녀가 불현듯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떴다.
“…대공비, 정말 다른 사람 아냐? 내가 아는 대공비는 이런 데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닌데.”
아, 쓸데없이 정확하네. 진짜.
“사람의 관심 분야는 언제든 바뀌는 법이죠.”
보란 듯이 웃으며 내 드레스를 가리켜 보였다.
마담 제드가 엄청나게 공을 들인 붉은색 장미 드레스.
그제야 내 옷차림을 인식한 건지 물끄러미 날 훑던 황녀가 놀라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건… 처음 보는 형식의 드레스군?”
“네, 특이하죠.”
마담 제드의 야심작인 이 드레스는, 치맛단이 왼쪽 허리에서부터 비대칭으로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황녀로 인해 마담 제드의 드레스가 사교계에 등판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드레스의 기본 디자인은 완벽한 대칭이었다.
치맛단이나 소매, 레이스는 물론이고 손으로 만든 세밀한 자수들이 얼마나 똑같이, 대칭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 면에서 처음부터 비대칭을 노리고 만든 마담 제드의 드레스는 이 시대엔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결정적으로 치맛단 아래에서 깨알처럼 촘촘히 반짝이는 빛 효과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황녀의 예리한 눈썰미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캐치했다.
“여기, 밑단에 장식된 건 보석이 아닌 것 같은데.”
“네, 이건 마법석으로 가공한 것이라, 어두운 곳에서는 더욱 밝게 빛난다고 합니다.”
“호오….”
그녀의 눈은 이제 다른 의미로 번들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대공비가 직접 디자인을 하진 않았을 테고. 재단사가 누구인가?”
번뜩 고개를 든 황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이 표정 안다.
마담 제드가 내 치수를 잴 때 꼭 이런 표정을 지었다.
어느 하나에 미친 사람의 눈빛이다.
‘뭐, 원래 마담 제드를 발굴하는 건 황녀의 역할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열정적이다 못해 광기가 슬쩍 보이는 시선에 티 나지 않게 소름 돋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제단사는 제드 살롱의 마담 제드랍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가 디자인을 지시한 건 아니고, 마담 제드의 기성복을 수선했지요.”
“마담 제드…?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
아리송한 듯 고개를 기울이는 황녀에게 선선히 끄덕여 주었다.
“번화가에서 유명한 재단사는 아니니까요. 게다가 얼마 전엔 제 전속 재단사가 되었고요.”
“전속으로 고용을 했다고?”
“네. 어쩌다 보니.”
내 말에 황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아쉬운 티를 풀풀 풍기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이런 재단사를 대공비 그대만 알고 있으면 어떡하나? 이상하다, 이 정도 실력자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녀는 마담 제드의 존재를 자신이 먼저 알아내지 못한 게 제법 아쉬운 듯했다.
응, 안 돼.
다이아나 거야.
“어머, 그러게요. 황녀님이 관심을 가지실 줄 알았다면 말씀이라도 드려 볼 걸 그랬군요.”
나의 태연한 맞장구에 황녀는 입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그 외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내 건데, 자기가 뭘 어쩌겠는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마담 제드를 황녀님께 소개시켜 드려도 괜찮을까요? 제 전속이라 꾸준히 황녀님의 드레스를 제작하기는 어렵겠지만, 원하신다면 몇 벌 정도는 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인가?”
황녀가 슬쩍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표정은 뾰로통한 주제에 눈에 생기가 도는 걸 보니 이 모습은 영락없는 14살이었다.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황녀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마담 제드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거예요. 저도 기쁠 거고요.”
“…그래애?”
황녀의 심보가 조금만 꼬여 있었다면 감히 나한테 적선을 하는 거냐며 역정을 냈겠지만, 방금 전의 이사벨라 소동과 드레스를 알아본 것까지 합쳐져서인지 태도가 유했다.
내 얼굴과 내 드레스를 흘끗 번갈아 본 황녀가 큼, 헛기침을 하곤 끄덕였다.
“그러엄… 그렇게 할까?”
“그럼요. 영광이에요, 황녀님.”
“아니, 뭐. 대공비가 그렇게까지 제안을 하니까 내가 거절할 수는 없지!”
금세 신나서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니 내 제안이 꽤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뭐야, 괜히 긴장했잖아?’
쉽다, 쉬워.
황녀 앞에서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술술 풀리는 상황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대로라면 돌아올 다이아나 앞에 뿌려질 고난과 역경을 반쯤은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황녀님이 괜찮으신 일자에 연락을 주시면….”
그때였다.
온실 저편에서 걸어온 중년 여인이 우리를 향해 예를 갖췄다.
“레반트 제국의 고귀하신 두 번째 달, 루이사 에브게니아 셀리스 레반트 황녀님과 엘로이즈 클라우드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를 본 황녀가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으쓱였다.
“이게 누군가, 브릴루즈 공작 부인 아닌가?”
응?
브릴루즈 공작 부인라면 이 파티의 주최자잖아.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내 앞에 선 중년 부인을 쳐다보았다.
‘공작 부인이 직접 인사를 하러 올 줄은 몰랐는데.’
브릴루즈 공작가의 사교 행사는 워낙에 규모가 크고, 공작 부인을 만나고자 하는 어린 영애들이 줄을 서는 탓에 용건이 없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가 쉽지 않았다.
황녀랑 같이 있으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브릴루즈 공작 부인이 우리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황녀님.”
“일주일 전에도 봐 좋고 새삼스럽게 안부를 묻기는.”
툴툴거리는 황녀의 말에도 브릴루즈 공작 부인은 별 동요 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안부야 자주 물어도 나쁠 것이 없지요.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움찔, 떤 황녀가 헛기침을 했다.
“또 잔소리를 할 생각이면 그만둬. 지금은 수업 시간이 아니란 말이야.”
“그럴 리가요, 황녀님의 여흥을 망칠 생각은 없습니다.”
브릴루즈 공작 부인은 사교계의 대모답게 황녀의 예법을 도맡아 가르치고 있었다.
황녀가 워낙 이리저리 튀는 시한폭탄, 아니, 탱탱볼 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보니 현 황제는 친히 브릴루즈 공작 부인에게 황녀의 교육을 맡아 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른 의미로 브릴루즈 공작 부인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저 황녀를 가르치다니….’
“황녀님, 음식은 입맛에 맞으시는지 모르겠네요.”
“음, 아주 괜찮았어. 파티시에 실력이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더군?”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황녀의 만족스러운 반응에 공작 부인이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나는 봤다.
그 부드러운 표정 틈으로 재빠르게 황녀를 훑는 공작 부인의 황금빛 눈동자를.
황녀의 자세 중 흐트러진 부분이 있는지, 차림새가 헝클어지진 않았는지, 입이나 손에 음식이 묻거나 남아 있는 건 아닌지.
그 모든 것을 스캔하듯이 철저하게 훑는 교육자의 눈길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작 황녀는 그런 공작 부인의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아무튼, 공작 부인은 깐깐함만 버리면 참 사람이 괜찮은데 말이야. 유능하고.”
황녀가 제 손안에서 무알콜 주스가 든 와인 잔을 기울이며 느물느물 웃었다.
‘14살 맞아…?’
조용히 기함했으나, 나를 놀라게 한 건 바로 뒤에 이어진 브릴루즈 공작 부인의 말이었다.
“그렇군요. 시정하겠습니다. 한데 황녀님.”
“으응?”
“외람되오나… 허리.”
그러자 방금 전까지 껄렁한 자세로 서 있던 황녀가 흠칫 떨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