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안의 빤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런 지대한 관심을 주는 건데. 난 너한테 관심받고 싶지 않단 말이야.
당황스러움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글쎄요, 이걸 눈에 들어왔다고 해야 하나.”
“…….”
“정확히는 예전부터 만나고 싶었어요. 기회가 없어서 만나지 못했던 거지.”
당연하다.
그땐 빙의 전이었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이안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기회까지 노리고 있었다고….”
“네?”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뭐가 저렇게 심각해.’
황녀라고 직접 말을 해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따지고 보면 이안과 황녀는 이복 남매긴 해도 어쨌든 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닌가.
구태여 내가 황녀를 의식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 좋을 것이 없었다.
‘물론, 이안이 황녀에게 말을 전할 위인은 아니지만….’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가볍게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으나, 어쩐지 이안은 아까보다 표정이 찌그러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잡은 손은 놓지 않는 것이 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우리 두 사람은 유리 온실 앞에 다다랐다.
걸어오는 내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긴 했지만, 본 파티장의 입구에 서니 쏟아지는 시선의 양이 달랐다.
눈치를 보며 흘끗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놓고 나와 이안을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경악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에스코트는 여기까지 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윽고 그의 손을 놓으려던 차, 이안이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어 나를 살짝 당겼다.
“음?”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자,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본 이안이 내게로 몸을 돌렸다.
빛을 등진 그의 자청색 시선이 내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정중한 에스코트를 바란다고 하셨으니, 의무는 다하겠습니다.”
“네?”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그가 나와 마주 섰다.
그가 나의 손을 들어 올리고 허리를 숙이자, 손등에 부드러운 입술이 눅진하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응?
‘얘 지금 뭐, 뭐 하는 거야?’
내가 흠칫 놀라기도 전에 내 손등에 도작을 찍는 것처럼 꾹 누르던 입술을 떼어낸 이안이 투명한 시선으로 나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이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아 아롱거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감정을 지닌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무심하고 건조한 얼굴.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어쩐지 ‘좋은’에 은근한 강조가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그가 내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어머….”
“방금 보셨나요?”
나를 둘러싼 채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마치 한 겹 천 밖에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
‘뭐, 뭐야….’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황급히 반대 손으로 덮어 가렸다.
낯선 감각이 오래 사라지지 않고 진득하게 남아 있었다.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안 하던 짓을.’
뒤늦게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물론 손등 키스야 레이디에게 정중함을 표현하는 흔한 방식이긴 하지만, 상대는 이안이었다.
애초에 이런 걸 할 위인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왜 그렇게 입술을 꾹 눌러 대?
키스가 아니라 도장인 줄 알았잖아.
민망함에 손등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안의 돌발 행동 덕분인지 주변의 모두가 날 빤히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주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괜히 허리를 쭉 폈다.
“크흠.”
일단 조용히 분위기나 살펴볼까.
나는 하인에게서 샴페인 한 잔을 건네받고 꼿꼿한 걸음으로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이 정도로 이목을 끌어 놓았으니 누구 하나는 내게 다가올 것이다.
나는 가만히 서서 내게 접근하는 인간들의 카테고리만 분류하면 됐다.
아군의 여지가 있는지, 적군인지.
‘사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나한테 호의적인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겠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 자리를 잡기 무섭게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돌려 그들을 훑었다.
연령대를 보아하니 어린 영애들은 아니었다. 나와 같은 귀부인이거나, 혹은 혼기가 찬 영애거나.
“이렇게 뵐 줄은 몰랐네요. 하워드 후작가의 차녀 이사벨라입니다.”
가운데 서 있던 갈색 머리의 여자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기소개를 하자,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자신을 소개했다.
어디 후작가의 누구, 어디 자작가의 누구….
예상대로 귀부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이사벨라를 포함해 혼기가 찬 영애들이 소수 섞여 있었다.
‘근데 가만 보자… 뭔가 익숙한 이름들인데.’
그들을 유심히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딱히 주목할 만한 가문은 아닌데, 다들 하나같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한참 고민하던 내가 아, 하고 소리 없는 탄성을 흘렸다.
‘기억났다.’
나 얘네 안다.
원작에서 사교계 행사마다 다이아나의 앞에 나타나 별 같잖은 이유로 무안을 주던 오합지졸 모임이었다.
‘와, 얘넬 실제로 보네.’
그중 저 이사벨라 하워드라는 여자는 후작가의 막내 여식으로, 오랫동안 이안을 짝사랑했으나 갓 성인이 된 해에 고백을 했다가 대차게 차였다는 설정이 있었다.
이사벨라는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다이아나가 이안과의 묘한 기류를 만들자, 그 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이아나에게 온갖 꼬장을 부려 댔다.
내가 이걸 어떻게 기억하냐면, 저 여자 때문에 작품 초반부에서 다이아나의 드레스가 와인 범벅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다이아나는 모두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가슴 아픈 에피소드였다.
‘우리 다이아나가 고르고 고른 하늘색 드레스였는데! 그날 다이아나가 얼마나 속상해했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내 표정이 썩었다.
“큼, 흠. 저어. 대공비 전하?”
헛기침을 한 이사벨라가 다시 나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그들을 있는 힘껏 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미안하네.”
금세 표정을 풀고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닙니다, 대공비 전하.”
이사벨라가 눈매를 둥글게 접으며 으쓱였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뭐야, 왜 살갑게 인사하는데?’
이 인간이 다이아나에게 부린 꼬장을 생각하면 이렇게 경계하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친하게 굴어?
그러나 내 속을 알 리 없는 이사벨라는 사람 좋게 말을 건넸다.
“정말 놀랐답니다. 대공비 전하께서 여기까지 행차하실 줄은.”
“그랬던가?”
“그럼요. 평소에 워낙 얼굴 뵙기 어려우시니까.”
옆에 있던 영애가 재빨리 거들었다.
“맞아요, 거의… 1년 만이던가요?”
“네, 저번 황후 폐하 탄신연이 마지막이니까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군요.”
“알고는 있었지만 대공비 전하께서 많이 바쁘신 모양이에요.”
다들 나를 둘러싸고 한 마디씩 내뱉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하지만 곧 상황이 돌아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럼 그렇지.’
오합지졸이 어디 가나.
이것들 나 돌려 까려고 우르르 몰려온 거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부인과 영애들을 둘러본 이사벨라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피식거렸다.
“…그래서인가, 황족보다 대공비 전하를 만나는 게 더 어렵다고들 하시더군요.”
“어머….”
동시에 여러 사람들이 짠 듯이 숨을 들이켰다.
“저도 그 이야기 들어본 것 같아요.”
“어머나, 저도요.”
“정말 뵙기 어려운 분이었군요?”
“사실상 대공비 전하가 제국에서 가장 비싼 얼굴 아니신가요?”
“신비주의? 그런 걸지도 모르죠.”
“어머, 그런가요? 저는 하마터면 대공비 전하가 누군지 잊을 뻔했지 뭐예요.”
나를 둘러싼 인간들이 저마다 배배 꼬인 언사를 내뱉으며 키득거렸다.
말로만 듣던 귀족식 비꼬기 화법이 귀에 푹푹 박혔다.
그리고 내 감상은….
‘와… 이걸 진짜 하네.’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