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브릴루즈 공작저는 대공저로부터 마차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안과 나 사이에 대화가 오갈 리 없었으므로 마차 안에는 아주 익숙한 정적이 흘렀다.
‘이런 것도 다이아나가 올 때 즈음엔 뜯어 고쳐놔야 하는데.’
이 틈에 먼저 말문을 트는 법을 가르쳐 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오전의 설전으로도 충분히 피곤했다.
이안은 무시해 버리고 곧 도착할 파티에 대해서나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사실상 내 사교계 재데뷔가 되겠군.’
아마 이 행사로 나의 첫인상이 결정될 것이다.
이번 파티에서 처신을 잘해야 입지가 튼튼해지고, 그래야 돌아올 다이아나의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잘하자, 응?’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맞은편에 앉은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 와중에 자냐.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그가 스르르 눈을 떴다.
“…또 무슨 일입니까.”
“대공께서도 브릴루즈 공작가의 파티에 참석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 해서요.”
“황자 시절에 참석한 적 있습니다.”
“아하.”
맞다, 이 인간 황자 출신이었지.
큼,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평소엔 보기 어려운 귀족들도 얼굴을 비추는 자리라 좀 긴장이 되네요. 대공비로서 특별히 주의할 점이라도 있으면 말해 주세요. 기억하고 행동할 테니.”
어차피 도움 안 될 거면 꿀팁이나 좀 줘 봐라, 라는 뜻이었다.
이안의 자청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질문하시는 의도를 모르겠군요. 저보다 부인께서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공녀 시절에는 사교계의 이목을 한눈에 끄시는 분이셨으니까요.”
그걸 아는 인간이 엘로이즈 평판을 바닥으로 패대기쳐 놨니?
“…공녀 시절과 지금은 위치가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결혼 이후로는 개인적으로 사교 행사에 참석한 적이 없기도 하고요.”
“하던 대로만 하십시오. 어차피 목적이 있으시잖습니까.”
돌아오는 대답 한번 삐딱했다.
‘딱 부탁한 것 이상은 협조할 생각이 없다 이거냐?’
투명한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 예. 그러시겠죠. 아무튼 모쪼록 입구까지 최대한 정중하고 다정하게 에스코트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날 물끄러미 보던 이안이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파티는 혼자 즐기실 테고요.”
“네, 그러는 편이 피차 번거롭지 않고 좋잖아요?”
이안은 번거롭게 내내 파티에 붙어 있지 않아도 되고, 난 눈치 보지 않고 이리저리 찔러볼 수 있어서 좋고.
상큼한 내 답과 달리 이안의 시선은 유달리 진득하게 나에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근데 저 자식 왜 아까부터 은근히 나한테 시비 거는 것 같지.
“…알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 거잖아요? 굳이 내내 함께하지 않더라도 에스코트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반응이 있을 거예요.”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아, 귀가는 알아서 할 테니 마중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바쁘시겠지만.”
“그렇게 하죠.”
‘빈말이라도 마중 나오겠다는 얘긴 안 하는군.’
더 이야기했다간 내 속만 타들어 갈 것 같아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성실하게 달려 브릴루즈 공작저 앞까지 당도했다.
대공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가 정문을 통과하자 경비를 서던 기사단이 잔뜩 기합이 든 모습으로 경례하는 것이 보였다.
‘마차만 봐도 저렇게 공손하다니.’
처음에 내 앞에 납작 엎드리는 마담 제드를 보았을 땐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겪어 보니 비단 마담 제드만의 문제만이 아닌 것 같았다.
‘원래 이런 대우도 전부 다이아나가 받아야 하는 건데 말이야.’
새삼 내가 여태껏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게 애석했다.
저 미련하고 둔한 이안 놈만 아니었어도 다이아나는 지금쯤 대공비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보십니까?”
불타는 내 시선을 의식한 이안이 찝찝하게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한 대 치고 싶다.
이혼하는 순간 꼭 한 대 쳐야지.
소드마스터라도 급습을 피할 수는 없을 거야.
여차하면 그냥 한 대 맞아 달라고 하지 뭐.
결연한 다짐을 하는 동안 마차가 멈춰 섰다.
시즌 파티가 열리는 유리 온실로 이어지는 입구 앞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한 듯, 입구 너머에서 잔잔한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사이, 먼저 일어난 이안이 마차에서 내려 나를 쳐다보았다.
“내리십시오.”
흰 장갑을 낀 손이 내밀어졌다.
차를 타기 전에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던 것이 무색하게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자세였다.
“고마워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훈훈한 봄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유리 온실 때문인지, 혹은 주변 가득히 피어 있는 꽃들 때문인지 코밑까지 꽃향기가 자욱하게 밀려왔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몇몇 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나….”
“지금 마차에서 내린 게, 대공비 전하와… 대공 전하가 맞으신가요?”
“…지금 제가 잘못 본 게 아니죠?”
“같은 브로치네요? 어머머….”
저마다 수군거리는 음성이 귓가에 아주 감미롭게 들려왔다.
속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계획대로군.’
그들을 둘러보다가 소리 낮춰 속삭였다.
“…제가 한 말 기억하시죠? 정중하고 다정하게. 남들 눈 좀 의식하시면서 에스코트해 주시기 바라요. 유리 온실까지는 멀지 않으니까.”
이안은 대답을 하는 대신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나를 부드럽게 잡아 이끌었다.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향하자, 따라붙는 시선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대부분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고, 몇몇은 우리를 보며 쑥덕거리기도 했다.
가까스로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나와 달리 이안은 술렁이는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이 정도 관심은 익숙하신가 봐요?”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닙니다.”
과연 남자 주인공다운 대답이었다.
‘이게 아무렇지 않으려면 대체 평소에 얼마만큼의 관심을 받고 살아야 하는 걸까?’
조용히 혀를 내두르던 나는 저 멀리서 흐릿하게 보이는 유리 온실을 입구를 향해 턱짓했다.
“저기까지만 데려다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저 정도만 가도 봐야 할 사람은 다 볼 테니까.”
“예.”
짧게 대답한 이안이 유리 온실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불현듯 이안이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 사교 모임에 나가시는 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라고 하셨죠.”
“네, 그랬죠?”
“하면 이런 파티로 되겠습니까.”
물음을 던지는 말투가 모호했다.
이안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귀부인과 영애, 그들의 에스코터가 주로 참석하는 자리지 않습니까.”
“그렇죠…?”
“부인의 목적과 좀 상이하지 않은가 싶어.”
나를 쳐다보지 않는 이안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가시가 돋쳐 있었다.
반면 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여전히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뭔 소리야?’
앞뒤를 너무 심하게 잘라먹은 거 아냐?
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재촉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이런 파티는 개인적인 친목을 다지기 위한 자리인지라, 공사가 다망한 제국 내 주요 인사들보단 귀부인과 영애들이 주로 참석했다.
비스니스적인 만남을 위해서는 이런 시즌 파티보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나, 그에 준하는 대형 행사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 더 알맞긴 했다.
이안은 아마 그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사람들을 포섭하겠다는 뉘앙스로 말을 했으니까.
그를 흘끗 바라보다가 눈썹을 들어 올리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는 좀 다른 비즈니스거든.’
이놈이 내 큰 뜻을 알 리 없었다.
“대공 전하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오늘은 꼭 만나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그가 멈칫했다.
“…만나고 싶은 분이요?”
“네, 사실 그분 때문에 온 것이나 다름없답니다.”
원작이 진행되는 내내 다이아나 앞에 성가신 압정을 뿌려 대던 황녀.
사사건건 시비를 걸다 못해 꼬투리란 꼬투리는 전부 잡고 늘어지던 그 황녀.
그런 주제에 보는 눈은 있어서 마담 제드를 발굴해 낸 황녀.
오늘 반드시 그 얼굴을 보고 갈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다이아나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회유를 할 수 있다면 더 좋고.
“…….”
유리 온실로 향하는 내내 정면을 향하던 그의 고개가, 그제야 내 쪽을 바라보았다.
위에서 쏟아지는 태양 빛이 그의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번엔 점찍어 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음? 네. 그랬었죠.”
“그사이에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네?”
‘얘가 또 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