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잠시 후, 이마의 혹을 매만지던 카일이 울상을 지으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픕니다… 너무 세게 때리신 거 아닙니까? 주군은 모르시겠지만 소드마스터의 한 방은 저 같은 연약한 민간인에게 치명적이라고요.”
“아직도 혀가 길군.”
쯧, 혀를 찬 이안이 서류를 펼쳐 들었다.
“…근데 정말 뭡니까? 진짜 보석입니까? 장신구?”
“맞아.”
“네에?!”
이번엔 진심으로 놀란 듯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안이 감정 하나 떠오르지 않은 건조한 얼굴로 깃펜을 집어 들었다.
“뭐지? 그 반응은.”
“주군께서 집무실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보석을 들여다보고 계시는데 그럼 제가 안 놀라겠습니까? 진짜 대공비 전하 드리려고 사신 겁니까? 저 혹시 주군의 정곡을 찌른 죄로 맞은 건가요? 미치겠네, 이놈의 감!”
시끄러운 반응에 이안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카일 엘제이어.”
“시정하겠습니다.”
이마를 가리며 똑바로 선 카일이 쓰읍,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진짜 선물하시게요?”
이안이 눈꺼풀만 끌어 올려 그를 쳐다보다 그대로 내렸다.
“따지자면 선물 받은 쪽이겠군. 대공비가 떠넘겼으니.”
“맙소사….”
카일이 급기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이안과 보석 케이스를 번갈아 보던 카일이 물었다.
“…며칠간 두 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무 일 없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대공비 전하께서 보석을 선물하신다고요?”
“불만이 있나 보지?”
이안의 성가시다는 눈빛에 카일이 깨갱거리며 입을 슬쩍 다물었다.
큼, 헛기침을 한 카일이 눈을 굴렸다.
“제가 한 조언이 아주 쓸데없는 건 아니었군요?”
“자의식이 지나치군.”
이안의 단호한 대답에도 카일은 아랑곳 않고 음흉하게 웃었다.
“신경 안 쓴다고 하시더니, 역시 이혼은 두려우신 거죠? 하긴, 주군께서 어딜 가서 대공비 전하처럼 유능한….”
서늘한 이안의 눈동자에 카일이 능청스럽게 브로치로 시선을 돌렸다.
“으흠…. 아무튼요. 그 브로치는 언제 하실 생각입니까? 설마 받기만 하고 넣어 두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오늘따라 질문이 많군.”
“안 물어보게 생겼습니까?”
카일은 자신을 서늘하게 훑어보던 이안의 눈길에도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굳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이안이 한숨과 함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브릴루즈 공작가에서 열리는 파티에 에스코트를 해 달라더군.”
카일이 입을 쩍 벌렸다.
“어디까지 놀라야 할지 모르겠네요. 혹시 두 분 저 모르는 사이에 뭐 약이라도 잘못 드신 건.”
“카일 엘제….”
“옙, 죄송합니다.”
카일이 입을 꾹 다물고 큭, 헛기침을 했다.
한 번만 더 풀네임을 불리면 죽는다.
그가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참 마음이 넓으십니다. 그런 일을 겪고도 노력해 보시려는 것 아닙니까?”
“노력으로 보이나, 이게?”
“예, 노력이죠! 이참에 주군도 노력해 보십쇼. 혹시 압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두 분께서 정말 가까워지실지.”
팔자 좋은 말에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이안의 펜대가 멈추었다.
“…….”
이번엔 카일을 훑어보는 대신 한쪽에 밀어둔 보석 케이스로 시선을 짧게 두었다.
“대공과 저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이안은 예의 건조한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일 없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브릴루즈 공작가의 시즌 파티 날이 밝았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눈을 뜰 새도 없이 하녀들에게 이끌려 목욕과 치장이라는 이름의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향유는 어떤 걸 바를까요?”
“앗, 릴리! 오늘은 장미 향으로!”
“손톱은 어떻게 할까요?”
“자르지 말고 끝만 다듬어!”
“네에!”
응… 신났구나.
내 몸을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지난 며칠은 제법 정신없는 일정의 연속이었다.
완벽한 드레스를 만들어 보이겠다며 호언장담한 마담 제드는 며칠 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드레스를 가져와 선보였고, 구두 장인은 그에 맞는 신발을 만들겠다며 몇 번이나 저택을 들락거렸다.
솔직히 말해 딱 죽을 맛이었다.
왜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파티며 연회를 질색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진짜 중노동이었다.
“마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늦은 오전, 드레스 룸에서 나를 열심히 치장하던 비비와 하녀들이 한 걸음 물러서 일제히 감탄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치장한 탓인지 거울 속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반을 틀어 올리고 반을 내려 손질한 머리라든가, 치맛단이 비대칭으로 겹겹이 떨어져 꼭 장미처럼 보이는 새붉은 드레스라든가, 허리 쪽에 포인트로 장식된 브로치라든가, 걸을 때마다 반짝반짝한 빛을 내는 마법 빛 가루라든가.
이렇게 보니 내 사랑스러운 다이아나만큼은 아니어도 꽤 얼굴값을 했다.
“와….”
치장이 아니라 변장 수준 아냐?
솔직히 말해 지난 몇 시간이 중노동이 한 번에 납득 가는 비주얼이었다.
뭐, 엘로이즈도 원래부터 사교계의 꽃이니 어쩌니 하는 인물이었으니.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비비가 눈을 빛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꼭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아요! 이 세상에 마님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아닐걸?”
제일 아름다운 건 다이아나란다.
미의 여신 그 자체. 나의 다이아나.
“정말이에요. 세상에 마님보다 아름다운 분을 뵙지 못했어요!”
응, 1년 후에 네 새로운 마님이 그 역할 할 거야. 걱정 마.
파티에 참석하는 건 난데 어찌 된 게 하녀들이 더 신난 얼굴이었다.
“…아무튼, 잘 다녀오마.”
“네, 마님!”
비비가 향수를 뿌려 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드레스룸을 나섰다.
계단을 타고 로비 쪽으로 향하자, 저 끝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내게서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이안이었다.
‘와, 뭐야.’
나는 반사적으로 감탄이 터질 뻔한 것을 꾹 참았다.
그는 몸에 딱 맞는 새하얀 연회용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늘 황제를 알현할 때 입는 정복이나 평상복 모습만 보아서인지 풍기는 느낌이 평소와는 달랐다.
뒤를 돈 채 서 있어 얼굴은 아주 일부만 보였는데도 단정하게 떨어지는 태가 감탄이 나올 만큼 수려했다.
‘하얀색이 저렇게 잘 받아도 되는 거야?’
여전히 재수 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비주얼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 되니 왜 수많은 인간들이 저 성격 파탄자에게 죽고 못 살았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정답은 얼굴이었다.
저 인간은 얼굴이 전부다.
“거기 덩그러니 서서 하루 종일 계실 겁니까.”
…정말 얼굴이 전부다.
그러니까 입도 다물면 좋을 텐데.
반쯤 나갔던 정신이 공.주의 재수 없는 목소리에 퍼뜩 돌아왔다.
“지금 가요.
도도하게 계단을 내려가 그의 앞에 섰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내 물음에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낸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정확히 사십삼 분 기다렸습니다. 늦으셨군요.”
나 이거 안다.
인터넷에서만 보던 ‘아싸 화법’이다.
누가 그걸 진짜 일 분 단위로 세어서 대답하는데, 이 인간아.
‘넌 진짜 얼굴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독거노인 확정이었을 거다.’
“…대공?”
“예.”
“이럴 땐 ‘아니요, 얼마 기다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거랍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반을 넘긴 머리카락이 결을 따라 흐드러졌다.
“부인께는 사십삼 분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입니까?”
“대공께선 혹시 하얀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아세요? 배려라든가.”
내 물음에 이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음, 그래. 알았다.’
알고 싶은 생각도 이해할 생각도 없구나.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앞으로는 얼마나 기다렸든, ‘방금 왔습니다.’ 같은 대답을 해 주시길 바라요. 여자들한텐 가끔 그런 배려가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이안은 내 말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용케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볼 때 이 인간도 나랑 벌이는 설전을 피곤해하는 게 분명했다.
“그보다, 브로치 잘 하고 오셨네요.”
그의 크라바트 위에는 목요일에 맞춘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
“협조하기로 약속했으니까요.”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안이 덧붙였다.
“착용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파티에 가기 위해 구매한 장신구니까요.”
“아, 예.”
되게 뭐라고 하네.
피차 커플 아이템이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라고.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이안을 훑어보다가 에스코트해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럼, 오늘 잘 부탁드릴게요.”
빨리 치우고 끝내 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