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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18)화 (18/91)

18화.

보석상이 돌아간 후, 차를 마시겠다며 이안에게 에스코트를 받아 티 룸까지 향했다.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하인이 차를 내어오기 전, 흡족하게 보석 케이스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나를 보며 이안이 말했다.

“네, 마음에 드네요.”

정확히는 브로치보다 잘 풀리고 있는 내 계획이 마음에 드는 거지만.

“그러는 대공께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신데요.”

내내 시큰둥했던 그의 태도를 상기하며 예의상 물었다.

그는 굳이 숨길 생각도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선 다시 환장할 말이 흘러나왔다.

“부인 말을 빌려, 장신구를 나누어 착용하면서까지 ‘유난’을 떨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영 탐탁잖은 얼굴이었다.

“같은 장신구의 착용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작 장신구로 인해 관계가 재정립된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이안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에 앉아 있었다면 충격으로 쓰러질 법한 대국민 인성 발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대로 뒀다간 다이아나한테 가서도 똑같은 헛소리를 하겠지.

옆에 내려놓아 둔 벨벳 케이스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의미라. 그래서 결혼반지도 착용하지 않으시는 거군요?”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런 합의를 한 적도 없고요.”

아니, 그냥 브로치 끼는 것도 계약서 작성해서 지장을 찍지 그래? 응?

“그럼 대공께서 생각해 보시는 건 어때요? 사람들이 의미 없는 장신구나 증표들을 왜 나누어 가지는지.”

이안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불만스럽게 쳐다볼 뿐이었다.

관심은커녕 스스로 생각해 보려는 의지마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안에게 떨리는 손으로 브로치를 건네던 다이아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라 가슴이 저려 왔다.

‘내 가여운 다이아나, 모든 걸 갖췄지만 남자 보는 눈은 발바닥에 달린 내 사랑스러운 다이아나.’

본능적으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겨우 내리눌렀다.

“대공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왜 연인들끼리 반지를 주고받고, 친한 벗들끼리 같은 장신구를 나누어 끼겠어요?”

“…….”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거예요.”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과 내가 특별한 사이고, 우리 사이에 결속력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데 정작 마음도, 사랑도, 관계도. 눈에 보이지 않아 불안정하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대신하는 거죠.”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그와 나를 손으로 번갈아 가리켰다.

“쉽게 말해 이 사람과 나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뭐 이런 의미를 지닌 거랄까.”

이해가 되었느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이안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려 브로치 케이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부인께서도 그런 의미로 제게 제안하신 겁니까?”

그렇겠냐.

“저희는 사정이 조금 다르죠. 대공과 저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

“말씀드렸지만 우리 같은 경우는… 남들에게 보여 줄 의도인 거죠.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이든 남들 눈에는 그런 의미의 증표처럼 보일 테니까.”

명쾌한 대답을 하고선 보란 듯이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이래도 납득이 안 되세요?”

잠깐의 침묵 후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이해했습니다.”

“이해가 가신다니 다행이네요.”

빙긋 웃고선 덧붙였다.

“뭐, 나중에 대공께서 정말로 마음에 둔 사람이 생긴다면… 그땐 제 말을 참고하시면 좋겠네요.”

이안이 당치도 않다는 듯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가정을 하시네요.”

“글쎄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미안하지만 나는 알고 있단다.

넌 결국 다이아나에게 빠져서 허우적거릴 거라는 사실을.

내 흐뭇한 얼굴을 본 이안이 떨떠름한 얼굴로 상체를 슬그머니 뒤로 뺐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몰라도, 그럴 일 없습니다.”

으이그, 한 치 앞을 모르고 앙칼지기는.

가끔 보면 까칠한 게 아니라 성난 고양이처럼 새침하다니까.

“네, 일단은 그런 걸로 치죠.”

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건성으로 대답하자 이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 다시 입을 달싹였을 때였다.

하인 여럿이 트롤리를 끌고 다과와 차를 내어왔다.

우리 앞에 놓이는 찻잔을 보던 나는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생각하던 말을 덧붙였다.

“참, 그리고 파티 동행 건 말인데요.”

“말씀하시죠.”

“생각해 보니 파티 내내 같이 있어 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뻔뻔하게 방긋 웃자 이안이 한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에스코트를 해 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죠?”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계획은 시즌 파티 장소에서 황녀를 포함해 나에게 득이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가늠하는 것이다.

이안과 함께 있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 말하냐고?

문 앞까지만 에스코트하고 썩 돌아가라고 했다면 이 자식이 순순히 브로치까지 맞출 리가 없잖은가.

이참에 이안 놈 엿도 먹이고. 얼마나 좋아?

“생각해 보니 대공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시잖아요. 저도 개인적으로 좀 알아보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파티장 앞까지만 에스코트를 부탁드리려고요. 괜찮죠?”

상큼한 내 제안에 이안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죠.”

달그락,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 한 잔 드시고 가시겠어요?”

“일어나겠습니다.”

“그럼 그러세요.”

미련 없이 일어서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찻잔을 집어 들었다.

잘 말린 꽃차의 향이 유달리 향긋했다.

***

엘로이즈와 헤어져 곧장 집무실로 복귀한 이안이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엔 엘로이즈와 같은 브로치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

무표정한 낯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가 남색 벨벳으로 덮인 브로치 케이스를 들어 올렸다.

아직도 왜 제 손에 이게 들어와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신경이 쏠리는 건 엘로이즈의 태도였다.

이안은 조금 전 마주 앉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뭐, 나중에 대공께서 정말로 마음에 둔 사람이 생긴다면… 그땐 제 말을 참고하시면 좋겠네요.”

답지 않게 환하게 웃던 표정.

‘대체 언제부터 사람이 그렇게 바뀐 거지?’

원래의 엘로이즈는 이안만큼이나 버석하고, 자신의 속내를 잘 비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고 이안의 속을 살살 긁는 성격은 결코 못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안은 엘로이즈가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사람이 한순간에 변한 것뿐만 아니라, 근래 엘로이즈의 행동은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부부관계니, 개선이니, 노력이니 하다가도 결정적일 땐 꼭 남인 것처럼 선을 그었다.

구태여 브로치를 맞추니 어쩌니 하더니, 바로 다음 순간에 다른 사람을 논하는 꼴이나, 에스코트를 해 달랄 땐 언제고 곧바로 함께 파티를 즐길 필요는 없다며 태도를 바꾸는 꼴도 그랬다.

정말 대공비의 직위를 이용해 재가라도 들 생각인 건가.

그렇다기에 그녀는 엘로이즈 본인뿐만 아니라 이안의 평판에도 꽤나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엘로이즈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긴 하지만, 지금 그녀를 파악할 수 없는 게 비단 성격이 바뀐 탓만은 아닐 터였다.

“…….”

엘로이즈의 모호한 태도가 묘하게 신경을 긁는 이유는 무엇일까.

케이스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이안이 달칵, 뚜껑을 열었다.

안에 단정하게 놓여 있던 브로치가 영롱한 보랏빛으로 빛났다.

엘로이즈의 말대로 이안의 눈동자와 비슷한 빛을 띠는 보석이었다.

탄자나이트라고 했던가.

그 주변을 반쪽의 하트가 화려하게 감싸고 있었다.

‘연인의 마음이라니.’

보석상이 구구절절하던 말을 떠올리곤 이안이 얼굴을 구겼다.

그런 게 엘로이즈와 이안 사이에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니, 엘로이즈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의 마음의 반을 나눠 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연인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만큼 이안에게 무의미한 것이 있을까.

적어도 그가 평생 느낄 리 없는 감정인 것만은 분명했다.

감흥 없는 눈으로 그것을 훑어보고 있을 무렵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카일이었다.

“주군, 요청하신 문건… 음? 뭐 하십니까?”

“10분 늦었다.”

탁, 이안이 소리 나게 브로치 케이스를 덮으며 쏘아붙였다. 그러나 정작 카일의 시선은 케이스에 고정된 지 오래였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던 카일이 한 박자 느리게 입을 틀어막았다.

“…헉. 주군께서 서류가 아닌 다른 물건을 들여다보고 계시다니….”

“…….”

“그거 보석이죠? 딱 봤습니다. 저 다 봤다구요!”

경악에 찬 카일의 중얼거림에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까불지 마라.”

“티 났습니까?”

카일이 장난스럽게 으쓱였다.

“아니이~ 일 분이라도 시간 낭비를 하면 죽을 것처럼 구시는 분이 딴청을 부리시니까. 핫, 설마.”

“…….”

“혹시 이제 와서 꼴랑 그런 보석으로 대공비 전하 마음을 돌려보시려는 건…?”

펜을 쥔 이안의 손에 힘줄이 섰다.

“카일 엘제이어.”

“잘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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