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울컥 솟아나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 보석을 하나하나 유심하게 관찰했다.
“이 목걸이는 참 생긴 게 독특하네요. 이런 커팅은 처음 봐요.”
“제가 알기로 1년 전쯤 유행하던 커팅입니다. 그간 관심이 없어서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그럼 이 팔찌는 어떤가요? 물방울 모양으로 커팅된 보석을 모아 붙여 꽃처럼 연출했네요.”
“꽃이 아니라 빛인 것 같은데요.”
…참자, 참아.
마지못해 함께 응접실까지 내려온 이안은 내가 장신구를 고르는 족족 태클을 넣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참을 인 세 개를 그리며 이안에게 최선을 다해 치근거렸다.
“그냥 같이 즘 고르즈그으.”
그리고 보석상은 그런 우리를 아닌 척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중간에 헛기침을 큼큼, 하는 게 용케 이 대화가 사이좋은 부부의 담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억지로 들러붙어서 애쓴 보람이 있었어.
나는 보석상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보란 듯이 이안의 손을 꼭 잡았다.
“…뭡니까?”
“가만히 계세요.”
질색하는 이안의 입을 단속시키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남 앞에서 이놈과 다정한 연기를 하려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보석상을 부른 건 비단 브로치를 맞추기 위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담 제드가 나만을 위한 소식통이라면, 불특정 다수의 귀족들을 자주 만나는 보석상은 확성기였다.
쉽게 말해, 나에 관한 이야기들을 남들에게 흘리는 역할이라는 뜻이다.
‘파티 전에 우리 사이좋다고 밑밥 좀 깔아 놔라, 보석상아.’
지금 이안과 엘로이즈의 평판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제 부인마저 외면하는 냉혈한 대공 이안 클라우드, 그리고 그런 이안과 결혼해 유령 같은 삶을 사는 엘로이즈 클라우드.
이대로는 안 됐다.
적어도 다이아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안을 최고의 신랑감까진 아니어도, 많은 이들이 탐을 내는 남자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졌을 때 다이아나의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부인한테 개차반처럼 굴다가 이혼당하고 다이아나와 썸 아닌 썸을 타는 남자로 만들 순 없다고.’
이안은 내 알 바가 아니지만, 이안과 엮일 다이아나는 내 소중한 여주인공이었다.
다이아나를 위해서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자고로 이미지 쇄신과 정치질의 핵심은 ‘카더라 통신’이다.
왜, 그런 연구 결과도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당사자가 직접 말을 전하는 것보다, 제삼자가 ‘그랬다더라~’ 하는 말을 더 잘 믿는다는.
보석상이 전한 믿기 어려운 소식에 귀족들이 반신반의할 때쯤 시즌 파티에 동행함으로써 그 추측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이 브로치는 어떠세요?”
눈에 띄는 브로치 하나를 들어 이안에게 보여 주었다.
중앙에 보라색 보석이 박힌, 하트가 반으로 나뉜 듯한 모양의 브로치였다.
“이게 마음에 드십니까?”
“이 중에서는요. 제 붉은 드레스와도 어울릴 것 같고, 대공의 눈동자와도 어울릴 것 같네요.”
“그럼 이걸로 하죠.”
‘성의 봐라.’
장신구고 나발이고 빨리 끝내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한 반응이었다.
집 나간 영혼 좀 데려오라고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잠깐 절 보시겠어요?”
시큰둥한 태도를 무시하며 그의 크라바트 위에 브로치를 대 보았다.
그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내 손길에 놀란 듯 움찔했지만,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얌전히 내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
“음, 잘 어울리네요. 예뻐요.”
브로치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훑어보고선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얼굴이 다 하는군.’
나는 여전히 우릴 살피고 있는 보석상에게 브로치를 흔들어 보였다.
“이걸로 주게.”
“역시 대공비 전하께서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안 그래도 이 브로치가 근래 들어온 장신구 중 가장 상급입니다. 특히 이 하트 모양은 연인이 마음의 반을 나누어 갖는다는 의미가 있어….”
기다렸다는 듯이 구구절절한 보석상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웃었다.
‘마음의 반은 무슨.’
마음 같아선 이안을 반으로 쪼개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만.
“자, 여기요.”
내가 손에 든 브로치를 이안에게 내밀었다.
이안은 내 의중을 알 수 없다는 듯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덩달아 눈을 깜빡인 내가 말했다.
“직접 달아 주셔야죠.”
“제가요.”
“그럼 제가 여기 주인장한테 이걸 달아 달라고 하겠어요?”
뻔뻔하게 내뱉고선 그의 손에 브로치를 넘겼다.
이어서 옆에 있는 보석상을 의식하며 그의 귀에 대고 다정한 척, 조곤조곤 덧붙였다.
“…저번에 나눴던 대화 기억하시죠? 입발림도 해 가면서 달아 주세요.”
내 속삭임에 브로치를 건네받던 이안이 멈칫했다.
그가 자청색 눈동자만을 굴려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
‘그걸 정말 여기서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나 역시 눈빛으로 대답했다.
‘안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단호하고 상큼한 눈짓에 이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드물게 보이는 아연한 얼굴이었다.
“…….”
마지못해 눈을 뜬 그가 내 카라 중앙에 아주 천천히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반쪽짜리 하트가 똑딱, 소리와 함께 내 옷 위에 고정되었다.
“어때요?”
그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물론, 순수한 미소는 아니었고 재촉의 의미가 담긴 웃음이었다.
반면 이안은 말을 뱉기까지 제법 결심이 필요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수 초의 침묵을 유지했다.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망설임 끝에 그가 마지못해 말했다.
“브로치보다… 아름다우시군요.”
…장난하나.
“대공?”
“예.”
“그건 입발림이 아니라 사실적시예요.”
당연히 내가 더 예쁘지.
이 얼굴을 봐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안의 뚝딱거리는 표정을 보니 이게 최선인 것 같았다.
‘그래, 노력했다.’
무엇보다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보석상의 눈이 반들거리는 걸 보면 어찌어찌 이 뻘짓이 먹힌 것 같긴 했다.
보석상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듯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크흠, 나머지 하나는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 되었네. 케이스에만 잘 넣어 주면 돼.”
“넵, 알겠습니다. 아, 혹시 이 옵션은 어떠십니까? 추가금을 내시면 아티팩트를 이용해 브로치에 향기를 곁들일 수 있는데. 요새 아주 인기가 많은 가공법입죠.”
“그런가?”
“예, 원래 사랑하는 연인들에게서는 같은 향기가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 쌍의 브로치를 착용한 것만으로도 특별한 향기를 풍기게 되는 것이지요.”
보석상이 내 눈치를 살살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보아하니 옵션 추가 비용이 꽤 짭짤한 모양이었다.
내가 픽 웃고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넣어 주게.”
이왕 사는 거 옵션을 추가해도 나쁘지 않지.
내 목표는 한 쌍의 브로치를 나누어 착용했다고 귀족들 앞에서 광고하듯 요란을 떠는 거니까.
“아이고, 알겠습니다! 그럼 작업하는 동안 여기 케이스와 보증서부터 받으시죠.”
보석상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공손하게 케이스와 보증서를 건넸다.
“그럼 착용한 브로치도 잠깐 주시겠습니까?”
“아, 그러지.”
착용했던 브로치를 그에게 건네자, 나머지 한쪽과 함께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넣고 가공을 하기 시작했다.
오 분쯤 지나고 그가 브로치를 꺼냈을 때, 보석에서는 정말 은은한 꽃향기 같은 것이 났다.
향기를 맡은 내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 보세요, 대공.”
이안에게 브로치를 내밀자 멈칫하던 그가 살짝 고개를 내밀어 향기를 맡았다.
한쪽 눈썹을 들썩인 그가 잠깐의 침묵 후 말했다.
“…나쁘지 않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 정도면 어그로 끌기에는 충분하겠다.
브로치를 케이스에 넣으며 보석상에게 준비해 두었던 값을 지불했다.
“음, 향기 좋다. 그죠?”
뿌듯한 웃음을 내비치던 나는, 가까운 곳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