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내 말에 이안이 의아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에스코트요?”
“에스코트요.”
그럼에도 이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재차 물었다.
“브릴루즈 공작가의 시즌 파티에 함께 참석하자는 말입니까?”
“네.”
자신이 들은 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가 무심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유는요.”
“그것도 수업의 일종이니까요?”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으므로 의연하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저한테 필요한 건 ‘대외적인 이미지 쇄신’이에요. 추문을 덮는 데는 부부가 사이좋게 사교계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죠.”
“…….”
“약속하셨잖아요. 첫 번째, 제게 남편다운 태도를 보여 주시기로.”
너 벌써 잊은 건 아니지?
이안이 피곤한 듯 잠깐 이마를 짚었다.
표정으로 보건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짓에 동참하고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가 눈꺼풀을 내리깔다가, 이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렇게 하죠. 다만 이미 정해 둔 개인 일정을 변동할 수는 없으니 날짜와 일시를 먼저 전해 듣고 확답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무슨 거래처 미팅 잡냐고.’
하여간 한 번을 곱게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개인 일정보다 한참 뒤로 밀려 있는 부인의 존재라니.
‘물론 나한테 이러는 건 상관없지만, 다이아나에게 그랬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조용히 주먹을 뒤로 숨기고 서늘하게 웃었다.
“다행히도 일주일 뒤 일요일이에요. 주말에는 제게 시간을 내어 주기로 하셨으니, 내키지 않아도 에스코트는 해 주셔야 해요.”
“…그렇겠군요.”
“파티 전날엔 옷을 맞춰 보느라 바쁠 테고, 파티에 다녀와서 따로 시간을 가지긴 어려울 테니… 그 주는 파티 일정으로 만남을 대체하도록 하죠.”
그를 보며 으쓱였다.
“이 정도면 대공께도 충분히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하나의 행사로 시간을 아끼시는 거잖아요?”
내 부드러운 제안에 이안이 자청색 눈동자를 짧게 아래로 흘렸다가 유려하게 끌어 올렸다.
정말 재수 없는데, 이 와중에 잘생겨서 은근히 열이 받았다.
“그렇게 하시죠.”
보통의 사람이라면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서라도 ‘시간을 아낀다’는 말에 부정을 앞세울 텐데. 이 인간은 그런 법이 없었다. 예상했지만.
“알겠어요, 아… 맞다.”
“또 뭡니까.”
“그 전에, 평일에도 잠깐 시간을 내어 주셔야겠어요.”
“이유부터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파티의 연장선인데요. 보석상을 부를까 해서요.”
“얼마 전에 의상실에서 보석과 드레스를 여러 개 맞추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역시나 삐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그런데 그 보석 말고 다른 게 좀 필요해서요.”
“다른 것이라면 어떤.”
“대공과 브로치를 맞출까 해요.”
“이유가 있습니까?”
“유난 떨려고요.”
“예?”
얼떨떨한 반문에 내가 빙그레 웃었다.
“유난 떨 거라고요. 대공한테 에스코트 받으면서요.”
“그건 또 무슨.”
당연한 사실이지만 대공 부부는 결혼식 이후 결혼반지를 비롯한 커플 아이템을 착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안은 애초에 그런 증표를 나누어 착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엘로이즈는 귀찮아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사람의 결혼반지는 서랍 어딘가에 처박혀 먼지가 쌓이고 있을 것이다.
‘그건 끼리끼리니 아무래도 좋지만.’
진짜 문제는, 추후에 다이아나가 돌아온 후에도 이안이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원작 중반쯤의 내용이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이아나가 이안에게 선물이라며 자신의 것과 비슷한 브로치를 선물하는데, 이 망할 이안은 다이아나의 정성이 가득 담긴 브로치를 보고도 어김없이 무안을 준다.
이안은 정말로 그 브로치가 ‘쓸데없는’ 선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같은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다이아나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겠다.
‘그 부분만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단 말이지.’
심지어 작품이 완결 날 때까지도 이안은 단 한 번도 그 브로치를 착용해 주지 않았다.
참으로 대단한 인성이었다.
덕분에 한 줌짜리 다이아나의 팬덤 사이에서는 이안이 해 주지 않은 브로치를 우리라도 해 주어야 한다며 자체 제작을 해 달고 다니기도 했다.
참고로 나는 브로치 열 개 샀다.
‘하지만 내가 빙의한 이상,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그 꼴을 보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 기회에 미리 길들여 놓을 생각이었다.
브로치 나눠 가지는 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어?
“제 말대로 하시죠?”
“…제안이 아니라 통보였군요.”
“물론이죠.”
내가 뻔뻔하게 웃었다.
이안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 제가 보석상에게 기별을 넣어 회신받는 대로 말씀드릴게요. 목요일 즈음이 좋겠네요.”
인사와 함께 그를 스쳐 지나가려고 할 때였다.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 걸음을 붙잡았다.
“부인.”
“네?”
입술을 굳게 다물던 그가 말했다.
“잘 어울립니다, 드레스.”
…응?
멈칫한 내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방금 전 그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럴 땐 잘 어울린다거나, 아름답다고 말해 주시는 거랍니다.”
한편 나와 허공에서 시선을 맞대던 그가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원하시는 답, 해 드렸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그를 쳐다보던 내가 한 박자 늦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칭찬을 해야 해, 욕을 해야 해?’
***
비비를 시켜 수도의 유명한 보석상에게 기별을 넣었다. 답은 채 한나절이 되지 않아 돌아왔다.
목요일 오전 열한 시쯤 대공저를 찾겠다는 내용이었다.
약속한 열한 시가 조금 지난 시각, 방을 나섰을 땐 이안이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가 기계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간밤엔 잘 주무셨습니까. 날씨가 좋군요.”
그 말을 듣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는 오지 않지만 오전 치고는 우중충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
벌써부터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느껴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사소한 부분은 쿨하게 넘기고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네, 일 층의 보석상은 응접실에 와 있다고 하더군요.”
“…….”
“뭐 하세요? 손 안 잡아 주시고.”
내가 당연한 일을 권하듯이 손을 내밀자, 그가 잠깐의 간극 후 내 손을 받쳐 잡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나란히 응접실에 들어서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석상이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대공 전하, 그리고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되었으니 고개 들게.”
“예, 예!”
“일전에 전달한 대로, 남녀가 한 쌍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브로치를 보고 싶네. 준비해 두었는가?”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보석상이 허둥지둥 보석이 진열된 쪽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이쪽에 있는 장신구 전부가 남녀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브로치를 부탁하셨지만 혹시 몰라 목걸이, 팔찌, 커프스단추, 귀걸이, 반지까지 준비해 보았으니 편히 돌아보시죠.”
정말 보석 가게를 통째로 옮겨온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조용히 감탄한 내가 이안을 잡아끌었다.
“대공, 눈에 들어오시는 거 없으세요?”
“네.”
아, 이안 놈이 단답을 할 때마다 천장에서 쟁반 같은 게 내려와서 머리 한 대씩 쳐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