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마담 제드를 쳐다보다 드레스 룸 안을 둘러보았다.
룸 중앙에 마담 제드가 준비해 온 드레스 수십 벌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천장에 달린 눈부신 샹들리에 덕분인지, 의상실에서 보던 것보다 배로 반짝반짝한 것처럼 느껴졌다.
만면에 미소를 건 채 시선으로 나를 좇던 마담 제드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전하의 치수에 맞게 수선해 왔습니다. 아, 수선하는 김에 몇 가지 드레스 포인트를 손봤는데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네요.”
그녀가 드레스 몇 벌을 내밀며 조잘거렸다.
“여기엔 대공비 전하의 눈 색과 어울리는 블루 사파이어와 에메랄드를 섞어서 장식했습니다. 이 드레스는 전하의 체형을 살리기 위해 좀 더 풍성한 페티코트를 달았고….”
신난 얼굴로 무어라 이야기하는데 사실 무슨 말인지 반 이상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게 제 역작입니다.”
기나긴 수다 끝에 마담 제드가 옷 한 벌을 보여 주었다.
온통 붉은색의, 마치 화려한 장미를 연상시키는 풍성한 드레스였다.
마담 제드의 쉼 없는 조잘거림에 빛을 잃어가던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오… 이건.”
진짜 예쁜데?
“독특하군. 마음에 들어.”
내 긍정적인 반응에 마담 제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요? 정말로 심혈을 기울인 옷입니다.”
마담 제드가 치맛자락을 차르르 들어 보이며 뽐내듯이 말했다.
“물론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비장의 무기는 따로 있지요. 기다려 보세요.”
검지를 하나 들어 보이고 어딘가로 향했던 그녀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손바닥 반만 한 우윳빛 돌멩이가 작은 케이스 안에 들어 있었다.
“이건….”
“마력이 담긴 아티팩트입니다. 이걸로 마지막 장식을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치맛자락에 돌멩이를 가져다 대고 흔들자, 그 안에서 빛나는 별 가루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세상에, 이게 뭔가?”
“제 역작의 하이라이트라고나 할까요?”
원작 소설을 읽을 때 종종 재단사들이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해 옷을 장식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직접 보니 더욱 신기했다.
“자, 그럼 입어 보시죠.”
내가 감탄하는 사이 마담 제드는 재빠른 손길로 환복을 도왔다.
내 몸에 정확히 맞추어 수선했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한 치의 오차 없이 딱 맞았다.
거울 앞에 선 내가 치맛자락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엘로이즈의 잿빛 머리와 청록안, 그리고 붉은 드레스가 어우러져 시선을 잡아끌었다.
제자리에서 치맛자락을 살랑살랑 움직일 때마다 마법석으로부터 나온 반짝이들이 마치 이슬처럼, 혹은 별빛처럼 빛났다.
“이 정도 화려한 드레스라면 황실 연회에 입고 가도 되겠어.”
내 중얼거림에 마담 제드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십니까, 이건 기성복이니 가벼운 연회나 파티에서 입으셔야죠. 황실 연회에서 입으실 옷은 제가 사활을 걸고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마담 제드의 눈이 너무 초롱초롱 빛나는 탓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살펴보던 마담 제드가 손뼉을 짝, 쳤다.
“브릴루즈 공작 부인의 시즌 파티에 이걸 입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브릴루즈 공작 부인? 아.”
한 박자 느리게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브릴루즈 공작 부인의 시즌 파티가 이 무렵인가.’
브릴루즈 공작 부인은 지난 몇십 년간 사교계를 꽉 잡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데뷔탕트를 앞둔 영애들이 공작 부인의 조언을 듣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그녀는 분기별로 귀족 여성들을 초대해 사교 파티를 열었는데, 성대한 연회나 다름없는 규모였다.
수도와 주변 도시의 다양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기회라 대부분의 이들이 기대하는 행사였다.
‘물론 엘로이즈는 초대장을 받고도 참석하는 날이 더 드물었지만.’
“이번엔 결혼 30주년을 겸하시느라 평소보다 큰 규모의 파티를 여실 모양입니다.”
“정말로 인산인해겠군.”
대충 예상이 가는 그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황녀님도 참석하신다고 하던데요.”
“황녀님이?”
내내 무덤덤하던 내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황녀라면….’
내 좋지 않은 기억력으로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적통, 즉 황제의 친동생이자 이안의 이복동생으로, 자신의 손위 형제들이 각각 황제와 대공이 되면서 현재는 1순위 황위 계승자가 된 인물이었다.
‘황비 태생인 이안을 견제하는 황제파가 차기 황제로 추대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쉽게 말해 집안싸움의 태풍의 눈 같은 존재랄까.
그녀는 원작에서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마담 제드의 드레스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유행을 이끈 사람임과 동시에, 다이아나가 돌아온 이후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악역 아닌 악역이기도 했으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이아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온갖 트집을 잡았었지.’
쉽게 말해 이안 외에 큰 시련이 없던 다이아나의 앞길에 압정 같은 것을 뿌리는 거슬리는 존재였다.
“대공비 전하께서도 당연히 참석하실 거죠?”
마담 제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본래의 엘로이즈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겠지만….’
그 심보 나쁜 황녀가 참석한다니 흥미가 동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정도 규모의 행사라면 내 편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놓기도 좋겠지.’
내게 호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 볼 기회였으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큰 이변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
매 대답에 마담 제드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역시! 그럼 이 드레스는 제가 더 수선해서 최고의 드레스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여기서 더 말인가?”
“제 작품을 입고 참석하시는 첫 행사이니, 누구보다 돋보이게 만들어 드려야지요!”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하지만 마담 제드의 반짝이는 눈을 본 이상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차피 마담 제드를 유명하게 만드는 것도 목적 중 하나니까… 그냥 내버려 두자.’
솔직히 말해서 말린다고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내 허락 아닌 허락에 마담 제드는 신난 얼굴로 붉은 장미 드레스를 챙기고, 일상에서 입을 만한 것이라며 비교적 심플한 녹색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물론, 그마저도 엘로이즈가 평소에 입던 것에 비하면 휘황찬란했지만.
‘왜 엘로이즈가 편한 옷을 고집했는지 알 것도 같고.’
마담 제드에게 한참을 시달리고 나니 온몸에 힘이 쪽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조심히 가게.”
마담 제드가 떠나간 후, 나는 곧장 내 집무실로 향했다.
그간 내 앞으로 오는 초대장은 전부 전용 집무실에 밀어 넣고 있던 탓에, 한쪽 협탁 위에 편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난 어렵지 않게 브릴루즈 공작 부인의 초대장을 찾았다.
“어디 보자…. 일주일 뒤 주말이군.”
생각보다 이르긴 하지만, 시기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적당히 얼굴을 비칠 때도 되었으니.’
그럼 이제 문제는 이안인가.
곧장 초대장을 들고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나 집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침 계단을 오르던 이안과 마주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대공 전하, 좋은 오후네요.”
“예.”
그가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내 드레스로 향했다.
“또 외출을 하십니까?”
그제야 나는 아직 마담 제드의 일상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뇨, 이번에 새로 맞춘 평상복이에요. 어떤가요?”
내 물음에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뭘 어쩌라고.’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저번에 가르친 건 대체 어디로 들은 걸까.
스윗한 눈빛을 발사하지는 못해도 배워 먹은 걸 응용은 해야 할 거 아냐.
“감상평 좀 말해 보시겠어요?”
내 은근한 압박에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차분한 녹색이군요.”
생각해서 말한다는 게 그거니.
억지로 입매를 둥글게 말며 말했다.
“이럴 땐 잘 어울린다거나, 아름답다고 말해 주시는 거랍니다.”
환장할 대화는 끊어 버리고 다시 방긋 웃어 주었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어서 찾아뵈려고 했어요.”
“뭡니까.”
“별건 아니고, 브릴루즈 공작 부인의 시즌 파티에 갈까 해요. 올해가 결혼 30주년이라 크고 성대하게 여신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래서요.”
이안은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파티 초대받은 거 자랑하려고 불렀겠니?
“그래서 말인데요, 직접 공작저까지 에스코트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