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번화가를 떠나기 전, 비비와 함께 서점에 들러 책을 샀다.
당연하게도 전부 로맨스와 관련된 책들이었다.
연애백서부터 시작해서 각종 소설들까지.
연애는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지만, 이안을 어떻게든 갱생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안을 ‘다이아나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으니까.
‘사실 다이아나에게 어울리려면 중고차는 무슨, 벤츠가 아니라 롤스로이스라도 부족한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분명 처음엔 몇 권만 사려고 했는데, 어느새 책이 계산대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번에도 전부 들고 올 수가 없어서, 나머지는 배송을 부탁하고 당장 읽을 몇 가지 책만 챙겨 집으로 향했다.
뒷정리를 하고 따라가겠다는 비비를 남겨두고 본관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어라.’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귀가를 한 건지, 로비를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가던 이안과 맞닥뜨렸다.
“…….”
“…….”
보통의 부부라면 인사라도 할 법하건만, 이안과 나는 눈만 마주칠 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서로 인사할 사이는 아니다 이거지.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이안이었다.
“이제 오시는 겁니까.”
“네, 보다시피 외출을 좀.”
“시간이 늦었는데요.”
그제야 로비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열두 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네, 그러네요.”
“조찬도 거르고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돌아오실 정도로 바쁜 일이셨나 봅니다.”
“음?”
어딘지 모르게 뼈가 있는 물음에 고개를 기울이다, 뒤늦게 탄성을 삼켰다.
아, 맞다.
나 오늘 이안 놈 조찬도 쌩까고 나갔지.
‘호오, 신경이 쓰이긴 쓰였나 봐?’
비죽 새어 나오는 삐딱한 웃음을 감추며 선선히 미소 지었다.
“네, 바빴답니다.”
“…….”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묘하게 썩은 표정이었다.
‘표정 한번 재수 없네.’
이쯤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이라면 그의 눈치를 살살 보았겠지만, 나에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조찬 시간 외엔 보지 말자고 했던 게 누군데. 조찬 시간에도 안 보여 주면 서로 땡큐 아닌가?’
내 사색은 낮게 깔린 이안의 목소리에 의해 끝이 났다.
“이 시간까지 무슨 일로 돌아다니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만 나를 훑었다.
“부인께서 무엇을 계획하고 있든 아직은 대공비이십니다. 그러니 그간 지켜 왔던 ‘대공비의 의무’는 그대로 이어 주셨으면 합니다. 게다가 조찬 시간은 대공저 운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니 웬만하면….”
“싫은데요?”
그의 말을 끊은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상큼하게 웃었다.
“…예?”
“제가 왜요.”
뻔뻔하게 되묻자 이안의 얼굴에 황당함이 들어찼다.
지금 누가 지어야 할 표정을.
“아니, 그렇잖아요. 대공께서도 저한테 별로 관심이 없으신걸요? 최소한의 관심조차 주지 않으셔서 제 평판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저만 의무니 약속이니 하는 걸 지키라는 법 있나요?”
해맑은 미소와 함께 되묻자 이안이 입을 벌렸다.
파리 들어가겠다, 얘.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요. 대공께서 저를 그렇게 홀대할 동안 저는 ‘대공비의 의무’를 충실히 해 왔거든요.”
이안이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동안에도, 엘로이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한 적 없었다.
2년간 대공저 내부의 일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껍데기 부인이니, 유령이니, 대공저의 가구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자기 할 일은 다 했다고.
“근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너무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요.”
“…….”
“그래서, 대공께서 하시는 만큼 저도 똑같이 돌려드리기로 했어요.”
내가 그를 약 올리듯이 상큼하게 눈매를 휘었다.
“보아하니 제가 없는 아침이 제법 쓸쓸하셨던 모양인데, 전 이제부터 대공의 태도만큼 똑같이 돌려드릴 예정이랍니다.”
본 교관은 네 태도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알겠냐, 이 자식아.
“그러니 제게 무언가를 요구하시려거든 성의 먼저 보여 주세요. 최소한 노력이라도 하시든가. 아님 뭐… 계속 혼자 식사하시든가요. 대공이 대공저의 재정 보고서를 확인하기 위해 제 집무실까지 오시는 것도 꽤 재미있겠네요.”
보고 못 받으면 곤란한 건 너지, 나겠냐.
“…….”
“기브 앤 테이크. 간단하죠?”
뻔뻔하게 으쓱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입을 달싹이던 그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
시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이안이 몸을 홱 돌렸다.
“…이만 들어가 보십시오.”
쌩하니 들어가는 모습에 찬 바람이 휭휭 불었다.
‘얼씨구. 아주 시위를 해라, 시위를.’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흥, 코웃음을 치며 그가 사라진 쪽으로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엎어져서 코나 깨지소서, 재수 없는 이안 놈아.’
***
그날 새벽.
“흐아암.”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까 이안과 한바탕 한 덕분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갱생이고 뭐고 다 때려치울까 했지만, 내 최애, 다이아나를 위해선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가져온 책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해, 벌써 세 권을 완독한 차였다.
시큰둥하게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책을 툭, 쳤다.
“역시, 도움은 안 되네.”
내가 골라온 책들은, 하나같이 설탕에 절인 것처럼 달달한 내용이었다.
“이런 걸 이안이 할 수 있을 리가.”
그래, 너무 훌륭해서 문제였다.
책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다 하나같이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이안과는 아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이런 건 타고나는 거라고.’
이안에게 이런 것을 들이밀어 봐야 하등 쓸모없을 게 뻔했다.
‘역시 주입식 교육뿐인가….’
과거 중고등 교육을 받을 때에는 천편일률적인 대한민국의 교육에 유감이 많았지만, 사실 답 없는 인간에게 주입식 교육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내 역할은 다이아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저 냉혈한 망나니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거니까.
“으, 어깨 쑤셔.”
한 자세로 책을 오래 읽었더니 어깨에 담이 걸린 것처럼 콕콕 쑤셨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어?”
다시 아까 로비에서의 일이 떠올라 열이 올랐다.
“하, 아니지. 진정하자.”
열 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한숨을 쉬며 문득 창밖을 바라본 내가 중얼거렸다.
“이럴 게 아니라 산책이나 갈까.”
아무래도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는 곧장 안락의자에 걸쳐 두었던 숄을 두르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라 그런지, 정원에는 야간 경비를 서는 경비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나는 숄을 단단하게 여미며 가운데 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세밀하게 조각된 동상, 작은 분수와 잘 정리된 관상목들까지.
고요한 저택의 아름다운 광경에 새삼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거 꼭 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밤 산책을 할 수 있다니.
어차피 이 년 뒤에는 다이아나에게 곱게 보내 줘야 하는 저택이니, 지금이라도 마음껏 즐겨 둬야지.
이윽고 좀 더 깊은 정원으로 들어간 내가 황홀한 탄성을 뱉었다.
“와….”
분명 어두운 밤인데도 화단에 수천 송이의 장미들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짜 예쁘다.”
산책로를 벗어나 꽃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며 감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에… 에취.”
옅은 밤바람이 불어오며 코가 간질간질해졌다.
“크응, 아직 밤은 좀 쌀쌀하네.”
코를 훌쩍이곤 옷소매로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슥슥 닦았다.
“너무 얇게 입고 왔나.”
얇은 실내복에 숄만 두르고 온 탓인지 바람이 불 때마다 스멀스멀 냉기가 스며들었다.
“에취! 킁, 오래는 못 있겠네.”
좀 느긋하게 구경해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밤도 늦었고….”
오늘은 이 정도만 보고 들어가야겠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서둘러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
이 층의 집무실.
이안 클라우드가 안경을 벗고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장미정원 한가운데에서 눈물을 닦던 엘로이즈가 도망치듯 본관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