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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9)화 (9/91)

9화.

“네?”

“마, 마님!”

양쪽에서 비비와 마담 제드의 목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왔다.

“지금… 가게의 옷을 전부 사겠다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자네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재차 확답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나를 멍하니 보다가, 제 뺨을 가볍게 꼬집기도 했다.

“…앗!”

어우, 아프겠다.

너무 세게 꼬집은 것 같은데.

조용히 탄식하는 나와 달리, 마담 제드는 아직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나는 그런 마담 제드를 배려해서,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라면 놀랄 수 있지. 이해한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게 현실이라는 걸 자각한 건지, 마담 제드가 떨리는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호, 혹시 이유가….”

“귀부인이 드레스를 고르는 데 이유까지 필요한가?”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정말 자네의 드레스를 사러 온 게 맞아.”

“흐어어어억.”

다시 한번 현실을 짚어 주는 내 말에 마담 제드가 기함을 하며 숨을 들이켰다.

한 번만 더 짚어 줬다가는 숨넘어가겠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와 자신의 드레스를 십수 번 번갈아 본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그러면… 디자인 수정은 어디 어디를….”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본래 귀부인들은 취향이 까다롭기 그지없어서 레이스 하나, 리본 하나까지 사사건건 수정을 요청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건 이 마담 제드가 뒷골목으로 밀려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의 디자인에 자부심이 있는 만큼, 남들이 요청하는 디자인 변경을 거절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집이 있어 망한 케이스였다.

‘그런데 나한테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가게 사정이 급하긴 했던 모양이지.’

원래 돈 앞에 자존심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 증거로 마담 제드는 내게서 무슨 말이 나오든 각오하겠다는 표정으로 결연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무심하게 드레스들을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디자인 수정은 필요 없네. 내 몸에 맞게 수선만 부탁하지.”

“아무런 수정도… 필요 없으시다고요?”

“그래.”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든 지금의 엘로이즈 옷장에 있는 것보단 낫겠지.’

엘로이즈는 10년도 더 된 드레스를 아직 헤지지 않았다며 서슴없이 입고 다니는 여자였으니까.

물론 얼굴이 얼굴이라 뭘 입어도 태가 났지만 말이다.

‘잘도 그런 성정으로 사교계의 꽃 자리를 지켰다 이거지.’

알면 알수록 대단한 여자였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 뭐 이런 걸 실천하려고 했던 걸까?

아무튼, 엘로이즈의 평소 패션 센스와 달리 지금 눈앞에 있는 드레스들은 죄다 휘황찬란해서 뭐가 뭔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자네의 감각을 믿어.”

내 말에 마담 제드가 다시 한번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또 기함을 하나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눈이 별안간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뭔진 몰라도 엄청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제대로 먹힌 모양이군.’

뿌듯함을 속으로 삼키며 여유롭게 비비를 돌아보았다.

“대금은 바로 치르도록 하지. 비비?”

내 부름에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비비가 떨리는 손으로 백지 수표를 건넸다.

표정이 울멍울멍한 게,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백지 수표를 뺏어 들어 마담 제드에게 넘겨주었다.

“여기에 가격을 적어 대공저로 청구하게. 항목 하나도 빼놓지 말고.”

“허억….”

별안간 대공가의 순금 직인이 새겨진 수표를 받은 마담 제드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수표를 받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옷들은 내 치수에 맞춰 일주일 후에 대공저로 보내 주었으면 하네.”

“예… 예.”

“아 참.”

내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앞으로 항상 이 의상실을 이용할 생각이니, 내 치수는 확실히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에 마담 제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최,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마담 제드는 수표를 금고에 고이 넣은 뒤 줄자를 들고 내게 달려왔다.

“그럼 치수를 재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확실히 보았다.

여태까지 흐리멍덩하던 그녀의 갈색 눈에 음험한 이채가 도는 것을 말이다.

방금 전까지 기죽어 있던 사람이라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담 제드는 줄자를 펼쳐 들고 내 주변을 요리조리 돌기 시작했다.

“대공비 전하께선 팔이 길고 어깨가 반듯하시네요. 어깨를 드러낸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으셔도 예쁘겠어요. 세상에, 허리 모양이 이렇게 훌륭하다니! 척추 미인이시군요?”

‘척추 미인은 뭔데, 대체.’

한번 터진 마담 제드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타고난 몸이라느니, 어떤 원단을 갖다 대도 살릴 수 있을 거라느니.

‘아부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런 걸 떠나서, 지금 마담 제드는 정말로 신난 얼굴이었다.

그냥 적당히 할 걸 그랬나, 하고 슬슬 후회가 밀려오려던 차에 치수 측정이 끝났다.

무려 30분이 지난 뒤였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전하의 몸에 완벽하게 맞는 드레스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드레스는 꼭 일주일 안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마담 제드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뻑 갔군, 뻑 갔어.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만 한 치트키는 없지.

그럼 여기서 끝이냐고?

‘그럴 리가 있나.’

마담 제드는 뚝심이 있는 만큼 의리도 차고 넘쳤다. 그러니 이 정도로도 내 아군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내 사랑하는 다이아나를 위해선 조금 더 확실히 못을 박아 둘 필요가 있었다.

“비비?”

“네?”

“준비한 게 하나 더 있잖니.”

“예, 마님. 여기 있습니다!”

내가 고상하게 한 손을 내밀자 비비는 기다렸다는 품 안에 넣어 둔 백지 수표 하나를 더 꺼냈다.

나는 그것을 고스란히 마담 제드에게 던졌다.

“이, 이건 또 무슨….”

자신의 손에 백지 수표가 두 개나 들어오자 마담 제드는 얼굴이 희게 질린 것을 넘어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뭐 이런 걸로 놀라고 그래.

나 대공비인데.

“자네가 받고 싶은 금액을 쓰게. 0이 몇 개 붙어도 상관없으니.”

“네, 네?”

나는 아주 고상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웃어 주었다.

“앞으로 자네의 의상실은 내가 후원하도록 하지. 대공비의 이름을 걸고.”

자, 화룡점정이다.

***

“그럼 전하, 살펴 가세요!”

수표를 두 개나 던진 탓인지, 내가 가게를 나설 즈음에 마담 제드는 나를 거의 성녀 취급 하고 있었다.

이런 존귀하신 분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 몰랐다느니, 대공비 전하를 만난 건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느니.

벌써 스물여덟 번째 폴더인사를 하는 그녀에게 의연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그때 만나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척추 접히겠네.

딸랑,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쯤 해 뒀으면 완전히 내 편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지.’

이제 적당히 내 소식통으로 써먹다가, 다이아나가 귀국하는 즉시 제드 의상실을 연결해 주는 거야.

뿌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최애! 꽃길만 걸어!’

나는 능청스럽게 콧소리를 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비비, 이왕 나온 김에 조금 산책이나 하다 들어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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