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8)화 (8/91)

8화.

‘첫 번째는 수도의 흐름을 파악하는 거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이 시대의 의상실은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단순히 치장이나 패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사교계의 사람들이 모이는 의상실은, 모든 소문의 근원지이자 소식통이었으니까.

이 수도에 전해지는 소식은 반드시 의상실을 거친다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연히, 의상실을 쥐고 있는 사람이 수도 소식에도 밝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내로라하는 사교계 일원들은 각자 단골로 삼는 의상실이 있기 마련이었다.

‘사교계는 칼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라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나에 대한 소문 하나도 모르는 채로 매번 하녀의 입을 빌릴 수는 없지 않은가.

“마님, 이 부근은 전부 의상실 거리입니다. 마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골라 가시면 돼요.”

“친절하구나.”

“어느 의상실이든, 마님이 방문하신다면 극진히 모실 거예요! 저쪽에는 대형 의상실이 밀집되어 있답니다.”

내 속내를 알 리 없는 비비는 아까부터 말이 부쩍 많아진 상태였다.

애석하게도, 대형 의상실은 내 고려 대상에 들지 못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유명한 의상실에는 그만한 임자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지금 내가 저 의상실들에 들이닥쳐 실세를 잡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긴 에버딘 공작 부인이 애용하는 곳, 저 건너편은 메리 후작가에서 실세를 잡은 곳.’

애초에 후보에도 들지 않았던 대형 의상실들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렇게 오래 걷다 보니, 어느덧 의상실 거리를 벗어나 점점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좇던 비비의 얼굴에 걱정이 들어찼다.

“마, 마님. 의상실에 가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여긴 의상실이 더 없을 텐데….”

“잠자코 따라오렴.”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내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여기 어딘가였던 것 같은데… 아, 찾았다.”

마침내 골목 끝에서 의상실 하나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마, 마님. 정말 여기를 들어가시게요?”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니?”

“그게 아니라….”

무언가 말하려던 비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찾은 곳은 말 그대로, 다 쓰러져가는 의상실이었다.

건물을 받친 기둥엔 금이 가 있고, 간판의 칠은 반쯤 벗겨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제드 의상실〉

간판을 읽은 내가 끄덕였다.

맞게 찾아왔군.

“마, 마님. 옷을 주문하실 거라면, 차라리 저 메인 거리의 베로니카 의상실을 방문하시는 게 어떨까요? 거기가 수도에서 가장 큰….”

“비비, 난 네 의견을 물은 적이 없단다.”

“합.”

내 부드럽고 단호한 말에 비비가 화들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지금 이 의상실이 뒷골목의 볼품 없는 가게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시점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책에 빙의했으니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열심히 써먹어 줘야지.’

여긴 평범한 의상실이 아니라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본 뒤 으쓱였다.

“들어가자.”

딸랑, 하고 낡은 종소리가 울렸다.

건물 보수를 언제 한 건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낡은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건물 보수는 한번 해야겠군.’

다행인 점은, 그 와중에도 드레스나 원단이 있는 곳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는 것일까.

‘자기 작품을 애지중지하는 건 원작에서 본 그대로네.’

허름한 의상실 안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누군가 안쪽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짙은 갈색 머리의 중년 여자였다.

“누구….”

“있었군, 마담 제드.”

방금 전까지 졸고 있었던 듯 반만 뜬 눈으로 나를 살피던 마담 제드의 눈이 커졌다.

“대… 대공비 전하?”

허둥지둥 나온 마담 제드가 내 발치에 납작 엎드릴 듯 허리를 숙였다.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이 누추한 곳까진 어떤 일로….”

귀부인이 의상실에 오는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나.

“드레스를 보러 왔네.”

“예?”

내 대답에 마담 제드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엔 ‘왜?’ 하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뭐 하나? 가져오지 않고.”

“아, 네, 네!”

내 독촉에 멍하니 서 있던 마담 제드가 한발 늦게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좁고 너저분한 가게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후, 내 앞엔 열 개가 넘는 마네킹과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 드레스를 내 앞에 대령한 마담 제드는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덜 된 얼굴이었다.

찬찬히 그것들을 훑던 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

드레스는 하나같이 독특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이었다.

소매를 과감히 잘라 버린다거나, 등을 훅 파 버린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보색의 천을 이용해서 눈에 띄도록 만든다거나.

확실히 지금의 사교계 유행과는 동떨어진 드레스들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좋은 원단을 사용해 고심해서 만든 게 티가 나는 옷들이기도 했다.

‘역시 시대를 앞서간 디자인이야.’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내 눈치를 보던 마담 제드가 내 눈치를 보며 슬쩍 한 발자국 물러섰다.

“펴… 편하게 보십시오, 대공비 전하.”

“그러지.”

가볍게 끄덕이며 드레스 자락을 만져 보았다.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담 제드는 자신의 작품에 굉장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쓰러져 가는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에 들어가는 레이스 하나, 비즈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덕분에 이름도 없는 뒷골목의 의상실 주제에 턱없이 비싸다는 이유로 고객들에게 외면당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원작대로라면, 앞으로 6개월 뒤에 대박을 치게 될 거야.’

반년 뒤,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황녀 덕분에 제드 의상실은 그야말로 한순간에 수도의 명품 의상실이 된다.

바로 그게 내가 이 의상실을 찾은 가장 큰 이유였다.

이 의상실은, 1년 뒤 돌아온 다이아나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아카데미에서 슈즈 디자인을 전공하는데, 마담 제드는 그녀의 가장 큰 지원군이자 사업 파트너가 될 예정이었다.

‘원작에선 1년 뒤 돌아온 다이아나가 엄청난 노력 끝에 마담 제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만….’

내가 미리 이 의상실을 키워두고 다이아나에게 소개해 주면, 고생할 일을 덜 수 있지.

게다가 나만의 소식통 역시 만들 수 있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나는 이 의상실 하나로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잡을 생각이었다.

지금이야 별 볼 일 없는 곳이지만, 내가 돕는다면 이 의상실은 반년 뒤가 아니라 당장 몇 개월 뒤에도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임도 보고 뽕도 따고.

그게 바로 원작을 아는 사람의 특권 아니겠는가?

새삼 나의 잔머리에 어깨가 솟아올랐다.

“저… 대공비 전하?”

뿌듯하게 드레스를 둘러보고 있던 중,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담 제드가 나를 아까부터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너무 말이 없었나.

내 눈치를 연신 보던 마담 제드가 말을 이었다.

“저, 가게에 있는 드레스는 이게 전부입니다. 부끄럽지만 예산이 넉넉지 못해서….”

“그렇군.”

“혹시, 마음에 안 드신다면 제가 어떻게 해서든 대공비 전하께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마담 제드는 제법 절박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 만에 찾아온 고객일 테니까.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내가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아….”

마담 제드의 얼굴에 실망이 서렸다.

그러나 내가 조금 더 빨랐다.

“이 가게에 있는 옷을 전부 다 사지. 물론 장신구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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