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안의 말을 끝으로 식탁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말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냥 밥이나 먹자.’
더 상대를 해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안이랑 엘로이즈는 이 삭막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매일 아침 겸상을 한 거지?’
둘 다 강철 위장이야? 그래?
깨작거리며 식사를 하던 것도 잠시, 나는 다시 슬그머니 이안을 쳐다보았다.
‘아침부터 정복이라니, 어디 가나?’
평소 이안은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불편하게 옷을 껴입는 일이 거의 없었다.
늘 가벼운 셔츠에 이따금 베스트나 재킷을 걸치는 것이 전부였다.
왜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느냐 하면, 작가가 이안의 옷차림을 매번 세세하게 묘사한 탓이었다.
화려한 옷을 걸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나는 신이 내린 외모, 얼굴이 날개 어쩌구….
‘하여간 그 작가도 참 대단한 인간이라니까.’
설설 고개를 저었다.
남이사 정복을 갖춰 입든, 셔츠를 풀어 헤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신경 끄고 식사를 계속하려 했으나, 이안이 조금 더 빨랐다.
“보아하니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짧게 본론만 하시죠.”
개싸가지.
순간 울컥했지만, 나는 지성인이었으므로 분노를 꾹 내리누르고 물었다.
“어디 가시나요?”
고개를 든 그가 나를 버석하게 바라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
“…….”
말없이 시선을 마주치던 것도 한참, 먼저 눈길을 거둔 이안이 대답했다.
“…황성에서 월례 회의를 하는 날입니다.”
“아.”
오늘이 그 날이었구나.
이안 클라우드는 대공이란 작위에서부터 알 수 있듯,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이었다.
정확히는 황제의 이복동생.
선대 황제는 황후와 황비를 두고 있었는데, 현 황제는 황후 태생, 이안은 황비 태생의 아들이었다.
보통 이런 조건이면 둘 사이에서 피바람이 불 법도 하건만, 현 황제는 어릴 때부터 이안을 눈에 띄게 아꼈다.
이안은 어릴 때부터 검술과 체술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고작 18세에 변변찮은 스승 하나 없이 이미 최연소 소드마스터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런 이안의 능력을 경계하기는커녕 아주 높이 사며 입이 닳도록 칭찬하기 바빴다.
그런 유난 덕분에 대공 작위를 하사받은 지금까지도 그는 황실 기사단의 특별 고문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한 달에 한 번은 꼭 황성에서 열리는 월례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아무래도 작가는 이안에게 부와 명예, 재능을 전부 다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정도면 병이다, 병.’
얕은 사색에 잠겨 있을 무렵, 옆에서 이안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덧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가 보였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보통 그런 말은 일어나기 전에 하는 거 아닌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이안이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늦습니다.”
“네에, 그러시겠죠.”
“잘 아시는군요.”
나 방금 빈정거린 건데.
내 도발이 무색하게 동요 하나 없는 표정으로 이안이 뒤를 돌았다.
그 길로 곧장 다이닝 홀을 빠져나가려던 그가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이어서 반쯤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인.”
“네.”
이안이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툭툭 쳤다.
“식사가 아무리 훌륭해도 소스는 좀 닦으면서 드시죠.”
…소드마스터만 아니어도 한 대 쳤다.
***
엘로이즈 알피어스.
레반트 제국의 10대 개국 공신 가문, 알피어스 후작가의 차녀.
외모, 기품, 언행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아 사교계의 꽃으로도 불렸지만, 특유의 서늘하고 버석한 성정 때문에 ‘얼음 공녀’, ‘후작가의 얼음꽃’ 같은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다.
그런 그녀가 이안과 결혼을 하게 된 데는 집안의 입김이 컸다.
알피어스 후작은 야망이 큰 인물이었고, 클라우드 대공가와 손을 잡아 자신의 사업과 입지를 키우길 원했다.
공교롭게도 이안 역시 대공가의 입지를 단단히 해 주고, 대공저의 운영을 도맡을 대공비가 필요한 상태였다.
마침 이해관계가 딱 맞았던 두 가문은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결혼을 추진했다.
엘로이즈는 그 과정에서 쓰인 좋은 장기 말일 뿐이었다.
이쯤에서 보통의 영애라면 ‘사랑 없는 결혼은 싫어요!’라며 반항을 할 법도 하건만, 엘로이즈는 달랐다.
“제가 그분과 결혼하는 대가로 사업을 확장시킬 수 있다면 그보다 남는 거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업을 위해 딸을 팔아넘기는 후작이나 스스로 팔려 가는 엘로이즈나 참으로 대단한 부녀였다.
“…자, 이제 생각해 보자.”
식사를 천천히 마치고, 2층의 내 방으로 올라와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참고로 ‘우리 방’이 아니라 ‘내 방’이다.
이안과 엘로이즈의 침실은 우연히 마주칠 일도 없게 복도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었다.
이쯤 되면 정말 부부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일단 올해가 제국년 273년인 건 알겠어.”
하녀가 가져다준 달력을 휘휘 넘기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어디 보자…. 이안과 엘로이즈가 재작년 3월에 결혼했으니까, 딱 2년 2개월 차네.”
이렇게 보면 나름 신혼인데 말이지.
“와, 신혼이라는 말이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집안 분위기부터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데, 이게 무슨 신혼이냐고.
“아무튼, 다이아나가 돌아오는 게 제국년 274년 여름이었지.”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다.
그럼 다이아나가 귀국하기까지 대충 1년 정도 남은 건가.
“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손가락을 접으며 기간을 가늠해 보다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울화통이 치민 탓이었다.
“아니, 이왕 빙의를 시킬 거면 아예 결혼 전 시점이나 이혼 후로 해 줄 것이지. 애매하게 딱 결혼 2년 차일 건 뭐냐고!”
타이밍 한번 거지 같았다.
최애를 눈앞에서 보게 되면 기쁠 줄 알았는데, 이런 잔인한 운명이라니.
난 애당초 다이아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거지, 이런 식으로 엮이고 싶진 않았단 말이야.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1년 안에 끝장을 봐야 하는데….”
어차피 다이아나가 돌아오고 반년 후에 이 결혼 생활은 끝난다.
그즈음 제 감정을 알아차린 이안이 일방적으로 엘로이즈에게 이혼을 통보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반년간 다이아나가 받을 상처가 어마어마하다는 거지.”
다시금 밀려오는 착잡함에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하아….”
원작에는 이안의 결혼식에 참석한 다이아나가 얼마나 처참한 기분을 느꼈는지 나노 단위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 부분을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릿저릿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이안을 지지하는 남주 악개 팬덤들도 그 대목에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다이아나를 동정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겠는가?
“근데 그 원인이 나라니….”
내 최애의 고난과 역경이 된 기분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콱 찍고 죽고 싶은 충동을 애써 내리눌렀다.
“…죽을까….”
아니, 겨우 다이아나가 있는 세계로 넘어왔는데 그럴 순 없지.
울상을 지으며 깃펜을 다시 고쳐잡고 꾸역꾸역 글씨를 써 내려갔다.
“1년 안에 이혼을 하고, 다이아나가 돌아오기 전에 깔끔하게 사라져 주면 될지도….”
그러면 다이아나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고.
이안 그놈은 행복하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아니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종이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내 손이 우뚝 멈췄다.
무언가가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생각해 보니까… 이거 기회 아닌가?”
다이아나가 돌아오기까지는 딱 1년이 남았다.
만약 내가 그사이에 대공비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이안의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뜯어고쳐 놓는다면?
“벤츠까지는 아니어도 똥차 탈출은 가능할지도 몰라.”
막막하던 미래가 순간 희미한 볕이 든 것처럼 밝아졌다.
“맞아, 이거야!”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엘로이즈의 몸으로도 다이아나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있었는데!
결연하게 양 주먹을 쥐고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다이아나가 돌아오기 전까지, 개노답 이안을 갱생시켜서 다이아나 맞춤형 조신남으로 만들어 놓는 거라고!
이안의 꼬라지를 보니 좀 어려워 보이긴 해도,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명목상으로 난 대공비이니 이안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많았고, 난 이 소설을 몇 번이고 정주행한 독자니까.
나는 다이아나를 잘 아는 만큼, 이안 그 개자식도 잘 알았다.
이걸 잘만 이용하면….
“…으하하.”
다이아나의 옆에 조신하게 앉아 시중을 드는 이안을 생각하고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다이아나, 기다려!”
내가 쓰레기도 고쳐 쓸 수 있다는 걸 보여 줄게!